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7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19. 9. 6. 18:40

2019 9월 7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가 6:1.5)

 

 “Why are you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미국의 어느 대기업 회장이 새 사업을 하려고 은행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담당 직원은 외근 중이었고 지점장도 자리에 없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앉아 기다리다가 여직원에게 다음날 올 테니 자동차 주차권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여직원은 이 은행에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규정상’ 도장을 찍어 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다음날 회장은 은행에 있는 자신의 모든 돈을 찾아 다른 은행에 맡겼습니다.은행의 모든 규정은 은행의 발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직원은 은행의 발전이라는 정신은 잊은 채 규정에만 충실하였습니다. 법에 ‘정신’이 빠진다면 그 법은 내용이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며 그저 자신과 타인을 속박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법의 정신입니다. 율법은 이 정신을 완성하려고 존재합니다. 해적선에 타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잃은 모든 규정도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합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시며, 사랑이신 당신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사랑에 율법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율법은 사랑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면 어떤 행동을 하든지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정신 나간 법이 되지 않으려면, 내가 지키는 것들이 사랑인지 늘 살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몇 년 전, 사람들 사이에 유럽의 체코가 크게 주목받은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체코가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사람들이 체코에 관한 이야기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한 자매님께서 제게 “신부님, 체코 가본 적 있으세요?”라고 묻습니다.

강의 때문에, 그리고 교포 사목을 하는 신부님 방문을 위해 세 번 가봤다고 대답을 했더니, “카프카의 생가도 다녀오셨겠네요.”라고 다시 묻습니다. 저는 그 생가 앞을 지나가기는 했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말하니 곧바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체코까지 가셨는데, 카프카의 생가에 안 가보셨어요? 신부님 책 좋아하시잖아요.”

사실 프란츠 카프카의 생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가 쓴 글을 읽지 않으면서 그의 생가를 직접 가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요하지 않은 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 속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떠올려집니다.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한 간호사가 다친 병사를 돌보는데 그의 고통이 너무 큰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강력한 진통제로 사용되던 모르핀이 다 떨어져서 그의 고통을 줄여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사기에 식염수를 넣어 고통받고 있는 병사에게 투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아주 강력한 약이니까 곧 좋아질 거예요.”

거짓말같이 이 병사는 고통에서 벗어났고 상태도 아주 좋아졌습니다. 이 효과를 플라세보 효과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간호사가 거짓말을 했다고 비판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병의 치료에 효과를 봤다는 것입니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서 바리사이 몇 사람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고 분개하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그 단순한 행동을 추수와 타작을 했다고 확대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안식일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인간을 위해 쉼의 시간을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이 시간에 온전히 하느님께 나 자신을 사랑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은 보지 못하고 그보다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율법의 준수만을 주장하면서 확대해석하는 당시 종교지도자의 모습이 어쩌면 사랑은 뒤로 미루면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반대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하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날거나 물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땅을 딛고 걷는 것이 기적이다.



내게 맞추는 삶.

어느 사람이 택시를 타고서 앞에 가는 비싼 외제 차를 쫓아가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택시 기사는 앞차를 쫓아가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 줄 알고서 정신을 바짝 차려서 앞의 비싼 외제 차를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택시 기사에게 이 손님이 말합니다.

“앞차 정말로 멋지지 않습니까? 사실 저 차는 제 것입니다.”

택시 기사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니, 자기의 멋진 차를 놔두고서 왜 택시를 타셨어요?”

그러자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차에 타면 내가 볼 수가 없잖아요.”

차를 구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타고 다니기 위한 것입니다. 단순히 보기 위해서 그리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차를 구매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겠지요.

다른 이들에게 맞추기 위한 삶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삶입니다. 이를 통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게 맞추는 삶을 살아야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 맞추는 삶은 곧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아닐까요? 누가 뭐라 해도 주님의 사랑에 맞춘다면 가장 큰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작은 일탄이 용남될 수 있는 조건

-전삼용신부-


 로마로 유학을 갔을 때 한국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언어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워낙 머리가 좋기 때문에 언어만 되면 공부는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는 방학 때 DVD를 빌려 자막을 띄워놓고 영화를 돌려보며 이태리 말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TV 시청이나 영화를 보는 것에는 말을 배우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들리는 말만 들리고 안 들리는 말은 끝까지 안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방법보다는 읽고 쓰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들을 매일 외웠습니다. 저녁이 되면 어설픈 실력으로 일기를 썼습니다. 일기는 내가 말할 때를 위해 도움이 되었고, 읽기는 들을 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조금은 빨리 이태리어에 익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화책만 주구장창 보는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신학생이 성경을 읽어야지 만화책을 보느냐고 판단을 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그 신학생이 저보다 말을 더 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일상에서는 말을 참 잘했습니다. 첫 방학이 되었을 때 저는 신학적인 용어들은 많이 알고 있었으나 일상에 필요한 말들은 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학생은 처음부터도 아이들과 잘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말을 잘하니 공부도 잘했습니다. 공부를 잘하니 스트레스가 적어서인지 영성생활도 참 잘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는 작은 일탈도 크게 나쁠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율법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도 큰 죄인데 남의 밀 이삭을 훔쳐 먹으니 바리사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는 제자들을 두둔하십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더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작은 잘못을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제사 빵을 집어먹은 일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바뀔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했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을 바꾸셨습니다.

      제가 미사하면서 제대에 성혈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성작을 건드려서 성작이 흔들려 그 안에 있던 성혈이 제대에 흐른 것입니다. 당시 괴로울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부족한 것도 없고 세상에서 더 바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과 미사를 하고 있던 중이니 주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일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대 위에 흐른 성혈을 보며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내가 부주의해서 예수님의 성혈을 제대에 뿌렸구나!’

      땅바닥이 아닌 것은 다행이었어도 주님의 성체성혈을 조심스럽게 간직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행복한 조건들은 더 이상 저에게 아무 위안도 주지 못했습니다. 만약 지금 죽게 된다면 지금까지 지켜왔던 모든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소홀히 여긴 것에 대한 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은 하늘나라이고 행복입니다. 행복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면 행복하고 그분을 잃으면 다른 무엇으로도 그 불행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행복의 유일한 길로 여겨야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행복해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비록 율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으나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허기를 채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은 받아들이지 않은 채 율법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했습니다.

      물론 죄는 예수님을 몰아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피해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더 함께 하기 위한 것이라면 작은 일탈은 또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일주일을 주님 뜻대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면 쉬는 날 하루쯤은 늦잠 자고 TV나 영화를 보며 게을러도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로만 맞추어져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뉴욕 맨해튼의 한인 공동체에서 처음 미사와 강론을 했습니다. 그날 성서 말씀의 주제는 겸손이었습니다. 제가 교만하게 살면 앞으로의 삶에 어려움이 올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겸손하게 지내면 앞으로의 삶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할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펼쳐서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갇힌 이를 풀어주고, 억눌린 이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의 성서 말씀처럼 겸손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기쁘게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하도록 지혜를 청하고 싶습니다.

 

매장과 파종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다른 면이 있습니다. 매장은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합니다. 매장당한다는 말은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매장한다는 말은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파종 역시 땅에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종은 어둠을 뚫고 새싹이 돋아나는 걸 기대합니다. 그러기에 파종은 새로운 희망을 의미합니다. 파종하는 사람은 수고와 땀을 흘리지만, 그 수고와 땀이 기쁨으로 열매를 맺으리라 기대합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새싹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파종된 것이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매장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법과 규정의 이름으로 쉽게 남을 단죄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언론은 제2의 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언론이 가지는 정보와 힘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언론은 공정해야 하고, 언론이 잘못 보도했다면 즉시 사과해야 합니다. 언론은 민심을 선도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단죄하기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고,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법과 규정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과 규정은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기까지 우리 인생에 쉼표는 있겠지만 마침표는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따르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있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던 7대 주요 농작물로는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올리브, 석류, 대추야자를 꼽습니다. 그 중에서도 밀은 유다인들이 주식으로 삼았던 빵의 기본 재료로 가장 으뜸가는 작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동 지방에서는 몇 천년 전 부터 곡식을 경작해왔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 유적지나 예리코 등지에서 불에 탄 밀알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주부들은 매일 맷돌로 밀을 갈아 빵을 구웠습니다.

 

 미풍이 불어오는 어느 봄날, 안식일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파릇파릇한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의기양양·사기충천한 얼굴로 씩씩하게 밀밭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큰 뜻을 품은 제자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눈길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밀이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덜 여문 부드러운 밀알은 비벼서 날 것으로 먹기도 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밀이삭을 훑어 입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웃의 밭에 들어가 밀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복음 6장 2절)

 

 바리사이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침소봉대’(針小棒大)였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바늘을 몽둥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수 행위나 노동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며 밀 이삭 한 두가지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규정 운운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쪼잔하고 천박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7절을 인용하며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사건을 소개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루카 복음 6장 3~4절)

 

 이스라엘 성전 성소에는 봉헌된 열두 개의 빵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로서 일 주일 동안 접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 주일이 지나면 사제들만이 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일행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굶주렸고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빵을 준 사제 아히멜렉도, 율법학자들도, 성경조차도 다윗과 일행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있게 적용될 수 있고 용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 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복음 6장 5절)



위로자 성모님

-이종훈신부-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그 이름대로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를 해방시켜주며, 가난한 이와 소외된 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셨다. 그렇게 그분은 하느님 구원의 소식,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셨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그분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분도 그런 현실을 모르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그분이 갓난아이였을 때 이미 예고되었다. 그분의 부모가 율법에 따라 아기를 봉헌하러 갔을 때 오랜 시간동안 구세주를 직접 보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 온 시메온 예언자가 그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알려 주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그가 그 아기에 대해 일러 준 말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언한 말과 많이 달랐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2-33).” 시메온의 예언대로 아드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형당하셨다. 그리고 그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모든 이들의 주님이 되셨다. 그분의 나라는 영원히 이어지리라 믿는다.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실현되며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사람들뿐만 아니라 반려동물과 숲의 나무와 돌과 바위들까지 평화롭게 모두 잘 살 수 있다. 그런 바람을 지닌 이들은 세례를 받았든 안 받았든 모두 하느님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받았던 도전, 수난, 그리고 때론 억울한 옥살이와 죽음까지 겪는다. 특히 작은이들의 인권과 말 못하는 자연의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더욱 그렇다. 그런 만큼 그들은 예수님과 하느님과 친하다.

 

예수님 곁에는 늘 그리고 끝까지 성모님이 계셨다. 잉태에서 십자가 아래에까지, 그 후에는 그분이 맡기신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늘 그분 곁에 혹은 그분 뒤에 계셨으니, 오늘날 진실과 진리 편에 있으려는 이들과도 함께 계신다. 성모님은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신다. 예수님을 참되게 따르려는 이들은 상장처럼 혹은 그들이 그분을 잘 따르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표징으로 반대, 모함, 비난을 받는다. 성모님은 그들을 위로하신다. 뱀의 머리를 밟는(창세 3,14) 그 힘과 용기로 그들을 격려하시며 다시 일어나 걷던 그 길을 계속 걷게 하신다. 진실은 밝혀지고 진리는 승리한다. 그 반대편에 서있던 이들은 그 날에 부끄러워진다.

 

예수님,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이 솔직하게 알려주신 십자가의 길을 용기 내어 따라갑니다. 처음 지녔던 굳은 결심이 물러지고 뒷걸음치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저를 아시고 용서하심을 믿으며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는 예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십니다. 빗나갔을 때는 슬픈 눈으로, 지치고 낙담할 때는 위로의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며 가야할 길을 밝혀주시고 인도해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6,1-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안식일이 아닌 은총의 안식일, 영원한 부활의 안식일을 주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처신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비난해 왔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 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는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다. 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맺은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한 응답을 하신다. 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관례에 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 했다고 하기보다, 그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즉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라고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 5)

-한상우신부-

예수님을 통해
쉬는 법을
다시 배웁니다.

안식일 통해
우리자신을
보게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안식일의 사랑을
주어야합니다.

예수님
사랑을 통해
우리가
소중한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일을
건네주십니다.

안식일의 정신은
교체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소중한 인격을
일깨워주십니다.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예수님 자체가
안식일의 주인임을
믿습니다.

다치고 아픈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안식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이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가시화됩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루카 6,1).
선교 여행으로 지치고 허기진 제자들이 예수님 뒤를 따라 밀밭 사이에 난 길을 걷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밀이삭을 흝어 입으로 가져갔나 봅니다. 어찌 보면 별 의도 없는 자연스런 행동인데, 바리사이들 눈에는 추수 정도의 노동으로까지 보인 듯하네요. 그렇다면 그들에겐 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기 위해 손에서 일을 놓아야 하는 규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임에 틀림없겠지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루카 6,2).
두 존재 사이에 관계 맺음이 시작되면 처음엔 서로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까?' 고민이 시작될 겁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후손들이 본격적으로 야훼 하느님을 "신"으로 모시면서도 그랬겠지요. 이집트의 파라오나 가나안의 바알처럼 자기들만의 "신"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들에게, 그래서 하느님께서 친히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거고요.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 하느님 백성으로서 피조물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 맞게 내리신 규정들이 탈출기 중반부터 신명기까지 모세오경에 잘 나타나 있지요.

안식일에 무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실은 하느님을 더 잘 섬기고 모든 피조물과 더 조화로이 공존하라는 하느님의 의도가 담긴 조항입니다. 그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날 해서는 안 될 일보다, 그날 해야 하고 허용하며 품어야 하는 일들에 대해 더 고민했겠지요.

아무튼 두 존재 사이에 시간이 지나고 관계가 깊어지면 서로에게 처음 제시한 규정은 차츰 희미해지게 마련입니다.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이미 존재에 새겨졌다는 관점에서 말입니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당연하고 익숙하리만치 몸과 마음에 배어들게 된 거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좀 더 정신과 마음으로 접근했더라면 그 긴 시간 동안 더 깊고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수많은 율법 규정이 불필요할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신뢰 만땅, 사랑 만땅의 관계가 되면 서로 눈빛만 봐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 되었다면, 척 하면 척! 두꺼운 율법 규정집을 치워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만은 뼛속 깊이 남았을 겁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율법 조문이 주인이 되어버린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 제도에 성자이신 예수님의 권위가 미치신다는 의미이고, 또 안식일이 회복과 해방의 날인 것처럼, 당신을 바쳐 온 인류에 참된 해방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개의 시선을 관상합니다. 제자들이 하는 행동 너머로 그들 존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따사로운 사랑의 시선,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에 대한 존중 없이 행동만으로 올가미를 씌워 단죄하려는 차가운 증오의 시선... 이 시선이 곧 그 사람의 마음이고 영혼입니다.

"여러분은 한때... 그러나 이제..."(콜로 1,21).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신자들의 과거와 현재, 즉 비포(Before)와 에프터(After)를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지배 아래, 사랑으로 애끓는 하느님의 마음보다 심판자의 칼날을 염두에 두고 살 때는 엄벌에 처하는 "심장 없는 신" 하나를 우상으로 삼아 섬기며 사는 꼴이기에 실제로는 진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원수로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 아들을 내주시어 세상과 화해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이제 사람의 아들의 공로로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진짜 하느님, 심장을 지니신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 되면 더 이상 세세한 율법 조항에 얽매여, 해도 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따지느라 심장을 빼놓고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에는 어찌 해야 될지 사랑이 답을 알려 줄 것입니다. 사랑이 길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사랑이 원하는 걸 하면 됩니다. 마음 저 깊은 곳에 머무르시는 주님께서 우리 존재 안에서 울려 주시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따뜻한 예수님의 시선에 우리 눈길을 포개어 사랑이 알려준 답을 찾아가면 됩니다.

율법의 자리에 사랑이 들어서면 비포(Before)와 에프터(After)는 사뭇 달라질 겁니다. 벗님도 그렇게 되실 겁니다. 아멘.

주님이 주인이시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61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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