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9. 5. 18:41

2019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 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루가 5,33-39)

 

 “No one tears a piece
from a new cloak to patch an old one.
Otherwise, he will tear the new
and the piece from it will not match the old cloa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화가 나면 심장 박동이 빨라집니다. 혈압이 올라갑니다. 혈압이 오르면 혈관이 터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몸은 혈관을 보호하려고 콜레스테롤을 증가시킨다고 합니다. 적당한 양의 콜레스테롤이 화 때문에 몸이 망가지지 않도록 혈관 벽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려면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라며 따집니다.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입니다. 단식을 하면 좋은 것인데 왜 남에게 화를 낼까요? 아직 단식이라는 계명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시려고, 언젠가 신랑이신 당신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에는 제자들도 단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선은 단식이라는 콜레스테롤로 그들의 화가 그들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고는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계명을 지키려면 어떠한 흥분과 화도 감당해 낼 수 있는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난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빈은 좋은 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청빈하게 사셨습니다. 또한 그러면서도 행복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 교육 때문에 가난해졌다고 자녀를 원망하는 일은 없습니다. 새 계명을 위한 새 부대가 된 사람은 모든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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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9월 20일(금) 저녁 7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갑곶성지에서는 순교자성월 기념 음악회가 열립니다. 특별히 이번 음악회는 평화방송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음악회를 열겠다고 결정을 하고 구상을 할 때에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세부 사항들을 방송국 사람들과 점검하고 준비하면서 막연함에서 벗어나 구체화 됩니다.

며칠 전 모든 출연진의 섭외를 마쳤고, 음악회 포스터까지 나왔습니다. 준비할 것이 아직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이제 9월 20일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음악회에 오신 분들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음악회에 찾아오실까?’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지만, 준비하면 준비할수록 기대되고 빨리 그날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제 마음을 보면서 하느님 나라도 비슷하지 않겠냐는 묵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구체적인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빨리 주님 곁으로 가는 것보다 이 세상 안에서 오래오래 머물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빨리 그 나라에 들어갔으면 하는 큰 기대감에 벅차오를 것입니다. 더욱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하게 되며, 이 안에서 큰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불평의 말을 전합니다. 요한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고 기도를 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에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고 대답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단식을 가리키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시지요. 주님의 살과 피를 통해 함께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에, 단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지요. 과거의 율법만을 좇아 살고 있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제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모든 것이 새로워졌는데, 그들의 마음은 문드러져서 새 계약의 일꾼들과 화합하지 못하면서 비판만 하면 사는 것입니다. 이 상태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저 과거에만 매여 살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그래서 그분의 뜻을 철저히 지키고 있을까요? 철저하게 지키는 우리의 새 모습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는 더욱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것을 바꾸어 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앤디 워홀).



작품을 통해 창조주를 알 수 있다.

몇 년 전, 네덜란드의 반 고흐 박물관에 간 적이 있습니다. 길게 줄을 서서 어렵게 들어간 곳이게 꽤 오랜 시간을 머물면서 작품 감상을 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또 안내 책자도 보면서 꼼꼼한 감상을 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작품 세계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의 작품을 통해 화가 반 고흐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의 고뇌, 사랑, 기쁨, 아픔 등이 조금씩 보였습니다.

고대 철학가 팔론은 ‘작품을 통해 창조주를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고흐가 그린 작품을 통해서 고흐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처럼, 이 세상을 통해 이 세상을 직접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화가를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보지 못해서 이 세상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세상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분명히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보일 것입니다.                    

정신을 잃은 법

-전삼용신부-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현재 가장 잘 나가는 강사는 김창옥 씨일 것입니다. 강의를 할 때 긴장을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강의를 잘 하는 줄은 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가 한 기업에서 남성 500명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는 너무 재미있게 잘 끝났습니다.

      그런데 책임자 몇 명이 오더니 막 야단치는 것이었습니다. 여성비하 발언을 너무 많이 해서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성문을 요구하였습니다.

      김창옥 씨는 수천 번을 강의한 내용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아무 항의도 없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그들도 재미있게 웃고 들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강의료는 받아야하니까 참고 반성문까지 작성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강의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움이 자꾸 솟구쳤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김창옥 씨는 딸이 유치원에 다니면서도 대변을 자신보고 닦아달라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두 명이 그를 판단하지 않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마치 대변을 다 보고난 듯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비로소 자신의 잘못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이런저런 발언은 삼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면 옳고 그름은 둘째고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독화살을 맞았는데 화살은 뺄 생각을 못하고 누가 쐈는지부터 찾는 것과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잘 따진다고 해서 그 말이 효과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기분을 살펴야합니다. 감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옳고 그름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급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에게 아침은 왜 안 먹었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잔소리는 항상 옳지만 상대의 기분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잘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옳고 그름을 자꾸 따지게 되는 이유는 사랑의 정신을 잃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떤 수녀님이 당신 수녀회의 회칙이 자꾸 복잡해지는 것에 대해 우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윗분들은 세세한 규정을 정해 놓아야 그때그때 편하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겨 모이면 새로운 규칙들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썩 긍정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가족에 법이 생기면 어떨까요? 남편이 언제 일어나서 무얼 해야 하고 언제까지 들어와서 집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면 그곳은 가정이 아니라 감옥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신, 어머니의 정신, 자녀의 정신만 올바로 갖고 있다면 세세한 규정은 필요 없습니다. 세세한 규정이 생긴다는 것은 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드는 정신이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모든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니 하느님께서는 10가지로 규정을 정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규율을 613개 항으로 세세히 구분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안 되어 관습법을 만들어 수천 개의 규정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모든 규정은 다 지키는데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법에 얽매여있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들은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불평합니다. 단식의 정신은 신랑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육체를 죽여야 영이 강해지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도 단식을 하면 그것은 예수님께 무례가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는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운 자리가 되는 이유는 신랑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좋은 지부터 살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따지는 법들은 정신을 잃은 트집 잡기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래야 당연한 거 아니야?”, 혹은 “저래야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며 싸움을 한다면 잠시 멈추고 먼저 ‘지금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부터 살펴봅시다. 그렇지 않다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정신을 잃은 법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는 상대에게 적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랑하여 기분이 좋은 지부터 살피고 옳고 그름을 말해야합니다. 그래야 새 옷에 새 천 조각을 대어 깁는 것이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기분과 법 둘 다 지킬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신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배웠습니다. 학점은 3학점이었습니다. 사제는 2의 그리스도라고 배웠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론은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었고, 자신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이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사도들의 이해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생각, 우리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린양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제단에 이사악을 바치려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며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이런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인류의 지성과 이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영적인 체험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박해하였던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임을 체험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를 방문하였고, 공동체를 위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악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공동체에 전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역사의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복음을 선포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하느님의 의로움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명예, 권력, 재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새로운 권위를 지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듯하게 품어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우리도 거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죄를 범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나의 가식과 위선을 돌아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지금 상처받고 있는 이의 이웃인가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징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이 되셨습니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다락방에서 나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교회도, 신앙도, 희망도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생입니다. 부활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듯이, 삶의 변화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변화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의 변화입니다. 의혹에서 믿음으로의 변화입니다. 욕망, 시기, 질투, 원망의 삶에서 헌신, 나눔, 용서,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삶입니다.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반영억신부-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단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의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결국 ‘내 생각만 옳다! 내 방식이 최고다! 우리가 제일 앞서 있다!’는 우월의식, 선민의식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옥중서간(獄中書簡)! 듣기만 들어도 가슴이 싸하게 아려오고, 코끝이 찡해지는 표현입니다. 오래 전 함께 살았던 문제아들 가운데, 이제는 성인이 되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이 잘 안풀린 친구들이 가끔씩 저에게 옥중서간을 보내줍니다.

요즘 보기 드문 손편지입니다.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해 꾹꾹 눌러썼습니다. 달필 중에 달필입니다. 교도소 안에 문예반도 있는지, 내용도 수준이 상당합니다. 자신의 지난 부족했던 삶에 대한 회한과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굳은 결심과 각오가 생생하게 느껴지며 큰 감동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옥중서한을 쓰셨습니다. 대체로 에페소서, 필립피서, 필레몬서, 콜로새서, 이 네 개의 편지를 옥중서한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만, 정말로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쓰셨을까? 하는 친저성(親書性)에 논란이 있지만, 옥중서한 한편 한편은 참으로 매력적인 편지들입니다.

모든 것이 제한된 깊은 감옥에서의 큰 고통 속에서도, 담장 너머 그리스도 신자들 신앙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격려하고 고무하는 교회 지도자의 모습들에서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옥중서한이라고 분류하고 추정하는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안에 수인이 된 나 바오로는 권고합니다.”(에페소서 4장 1절),

“내가 갇혀 있는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사실이 온 부대와 그 밖의 모든 이들에게도 분명히 알려졌으며…”(필리피서 1장 13절)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혀 있는 나 바오로와 교우 디모테오가 우리의 사랑하는 협력자 필레몬 그대와…”(필레몬서 1장 1절)

“여러분은 갇혀 있는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콜로새서 4장 18절)

콜로새는 소아시아 지역 리쿠스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에서 30킬로 이상 떨어져 있는 오지였기에, 긴요한 용무가 없는 한,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쳐갔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콜로새를 한번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오지 콜로새에도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리스도교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오지인데다, 에페소 교회와도 꽤 거리가 있었던만큼, 이 교회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약간의 고립과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기 콜로새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단적 요소였습니다. 아무래도 초기 교회다보니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다교 신앙, 그리스 철학이 뒤죽박죽된 일종의 종교 혼합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단을 선포하는 지도자들의 가르침 중에 크게 그릇된 것은 자기들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자신들은 다른 지역 그리스도교 교회 신자들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을 훨씬 더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결국 ‘내 생각만 옳다! 내 방식이 최고다! 우리가 제일 앞서 있다!’는 우월의식, 선민의식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더 큰 위험성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배척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콜로새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단적 교의, 특히 종교 혼합주의, 그리고 그릇된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 주변에서도 많은 이단들과 이단적 가르침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사회 안에서도 백성들을 큰 혼란 속으로 몰고 가는 그릇된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의 균형 잡힌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입니다. 방황하는 백성들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명확한 가이드 라인을 제공하는 것, 많이 배우고, 많이 연구하고, 많이 기도한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중요한 책무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콜로새서 구절은 ‘그리스도 찬가’라고 불립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자 우주 구원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장엄하게 찬미하고 기리는 노래입니다.

그리스도 찬가에서는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체 자연 질서 위에 계신 분이시며,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음을 선언합니다. ‘온갖 충만함’은 하느님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완전성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장엄한 찬가는 역사 속 인물인 나자렛 예수님을 하느님의 육화하신 아드님으로 선포합니다. 


새것과 헌것

-송영진신부-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6-38).”

이 말씀은, ‘새것과 헌것’에 관한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옳은 것은 지키고 옳지 않은 것은 버려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그리스도교를 뜻하고,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유대교, 또는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뜻합니다.
유대교, 또는 바리사이 같은 율법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는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는데,
그들이 볼 때에는 받아들이면 안 되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것’인데,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믿고 받아들여야 할 진리, 즉 ‘옳은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새로운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것은,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 즉 ‘옳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라는 옛 격언처럼
‘구원의 길’이 아닌 길은 ‘가면 안 되는 길, 나쁜 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14-15).”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1베드 1,18-19).”
여기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이라는 말과 ‘헛된 생활 방식’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모르고 살던 때의 삶을, 즉 ‘세례를 받기 전의 삶’을 가리키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말과 ‘해방’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의 삶’을 가리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지에 잘 도착하려면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야 하는데,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 있는 ‘옳지 않은 것들’은 모두 버리려고 노력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옳은 길’만 걸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1-24).”
이 말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라는, 즉 한결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진리의 길, 옳은 길, 구원의 길을 걸으라는 권고입니다.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이 되는 일은,
한 번에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 교회가 실천한 일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그 당시에 바리사이파 출신 신자들이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사도 15,1).” 라고 주장해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신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고,
그 일로 교회 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났습니다(사도 15,2).
그래서 사도들과 원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그때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사도 15,10-11).”
이 말은,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온다.” 라는 선언이며
가르침이기도 하고,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공개적으로 배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사도 15,28-29).”
이 말을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네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유대교 율법들을 모두 폐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때 할례가 공식 폐지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론은, 단순히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을 버리고 옳은 것만 지키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 있는 율법들을 모두 폐지한 것은 아니고,
주로 바리사이들이 정한 규칙들을 폐지했고,
할례처럼 구원받는 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을 폐지했습니다.

본당신부가 새로 부임하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해왔던 일들을 다 중단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지만,
그게 아니고 단순히 ‘낡은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옳은 것’과 ‘좋은 것’은 오래 되었더라도 꾸준히 지켜야 합니다.
오래된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고, 새로운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 교구장이 새로 임명된 교구에서도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모든 제도를 다 새롭게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꾸더라도 “옳지 않은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은 지킨다.”는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개선(改善)’을 하지 않고 ‘개악(改惡)’을 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완전한 변화

-이종훈신부-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더니 지금은 무인수납 중이라는 푯말이 나를 맞았다. 청년 직원이 코앞에 있는데 손님을 응대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 그와 대화해서 조그만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주문기가 저 뒤에 있었고, 어린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그 앞에서 선택하고 결제하고 있었다. 셀프 주유소는 익숙해졌는데, 식당 무인주문기는 아직 어색하고 불편하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참 빨리 변한다. 옛날 것이 더 좋고 편하다고 배움(?)을 게을리 하면 이제는 밥 한 그릇도 사먹기 힘들 것 같다. 어쩌면 정말 로봇이 손님을 맞이할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예수님의 등장은 그 시대와 권력층에 엄청난 도전이었다. 아무런 계보와 배경이 없는 한 똑똑한 사람으로 치부하기에 그분의 영향력은 두려워할만 했다. 그러나 그분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거나 사회를 전복하는 혁명을 주장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율법의 본질을 제대로 해석하고 사람들이 율법의 제정자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법을 가르치고 그 본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그들에 끝까지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억지로 그 사회에서 밀어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사회의 붕괴가 아니라 변화였다.

 

예수님도 그들처럼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에게도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함과 철저함을 거룩하다고 이해했던 그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분은 한없이 너그러우셨다. 그 너그러움의 끝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이 원하면 생명까지 내어주실 것 같을 정도였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우리가 철저하고 엄격하게 실천해야할 법은 사랑의 법이고, 그 의무의 끝은 없다. 모든 사람은 세상이 자신에게 너그럽고 부족함과 실수를 이해하고 사랑해주기를 바란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마음속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주셨다. 그들이 바라는 그대로 해주셨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지어내셨다. 그분의 뜻을 따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창조사업,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 청년은 무인주문기계를 찾지 못하고 아이스크림 하나 먹기만을 바라는 멀쩡한 한 아저씨를 안쓰럽게 여겨서 가게규칙을 깨고 나에게 말을 걸고 아이스크림 퍼주었던 것 같다. 부끄럽고 고맙다. 삶이 있고 법이 따라왔다. 그러니 삶이 바뀌면 법도 바뀌어야 한다. 옛 법은 기록물 보관소에 남기면 된다. 새 삶에는 새 법이 필요하다. 영원한 생명에는 하느님 사랑의 법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 사랑의 법 일부를 떼다가 옛 법에 끼어 넣을 수 없다. 완전히 새로워져야 하고 깔끔히 버려야 한다.

 

예수님, 새롭고 완전한 법이신 주님, 세상은 당신 안에서 당신을 향하여 만들어져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시간과 정력낭비입니다. 결국은 당신 뜻대로 세상은 만들어질 테니까요. 무인수납기가 잘 다루지 못해도 주님의 법에는 누구보다도 빨리 익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사랑법을 가르쳐주시고 그 길로 이끌어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5,33-39: 단식의 정신

자기들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삶을 볼 때, 자기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재도 지키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보면서 그렇게 살면서도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겠느냐고 비난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33)

 

그들의 단식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어떠했는가? 유대인들 중에는 진정 열심히 단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하는데,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단식하고 그 외는 먹을 것을 다 먹었다. 재를 지키는 것을 모두 드러내어 남에게 과시했고, 또 그에 대한 대가를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희생과 단식이 하느님 앞에 죄를 보속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무엇인가 함께 하는 사랑의 정이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단식하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지 않는 재는 지키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느냐?”(34)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을 혼인 잔치의 기간으로, 그리고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제자들을 손님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며 잔치의 주관자들이고, 잔칫상에 앉을 이들을 부르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단식을 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배불리 먹기 때문이다(요한 6,53 참조).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35)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신 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신 날,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고 하신 날이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36.37) 형식적인 율법에 매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항상 새로운 자세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마음, 즉 이전의 내가 아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묵은 나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반대로 행하려 하기 때문에 그 낡은 부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진정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그분의 말씀을 담는 우리가 되자.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루카 5, 39)

-한상우신부-

새 포도주를
만나는 향기로운
시간입니다.

새 포도주를 만나고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들 삶입니다.

새 포도주
맛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제의 포도주와
오늘의 포도주는
다르듯 매순간이
새로운 시간입니다.

우리를 위한
새 포도주이심을
깨닫게됩니다.

매순간이
새 포도주를
맛보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묵은 포도주는
묵은 포도주로
이어지고

새 포도주는
새 포도주로
이어집니다.

우리 영혼에
스며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새 포도주를
전해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생명의 길에
새 포도주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새 포도주가
될 때입니다.

용서하시는
새 포도주의
삶을 따릅니다.


-오상선신부-


이제 슬슬 종교 지배층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자기들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자기들의 계보에 속하지 않는 모호한 신원도 의혹을 일으키지요. 게다가 더욱 두려운 것은 그런 불확실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기적과 사랑으로 민중의 고통을 직접 어루만지며 그들에게 힘이 되어 준다는 점입니다. 지배와 착취, 단죄가 아닌 공감과 위로, 연대와 포용의 모습으로 말이죠.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비아냥거리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물론 기도와 단식은 자선과 더불어 하느님의 복을 얻을 수 있는 대표적 수행 방식으로 신앙 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진짜로 제자들이 "먹고 마시기만" 했겠습니까만, 율법과 제도의 틀을 수호하고 보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그들에게는 그리 보였을 수도 있을 겁니다. 뒤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루카18,9-14)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은 세세한 조항들을 따져 실행하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루카 5,34).
아무리 종교적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라도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혼인 잔치가 그렇습니다. 혼인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잇고 하느님 백성의 수효를 늘리면서 힘을 키우는 축복입니다. 일례로 신명기에 등장하는 갓 혼인한 남자에 대한 규정에서 "그를 군대에 보내서도 안 되고 그에게 어떤 의무를 지워서도 안 된다"(신명 24,5)고 명시되어 있을 정도니까요.

여러 날 동안 열리는 혼인 잔치는 가문과 마을의 커다란 행사입니다. 더우기 신랑의 친구라면 열 일을 제쳐두고 신랑 곁을 지키며 잔치를 더욱 풍성하고 흥겹게 해주어야 하지요. 신랑 곁에 있는 자체가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그때에 어떤 금욕적 의무를 고수하느라 잔치의 판을 깰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먹고 마시기만 할지언정 신랑과 누리는 기쁨이 우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기도와 단식"을 한 편에, "먹고 마시는 일"을 다른 편에 놓고, 양 편을 갈라 대립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경건함과 거룩함이 인간의 본성과 별개의 문제라 여기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성과 속의 철저한 별리 구조라 할까요.

그런데 우리의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일"을 "기도와 단식"과 더불어 주님을 섬기는 일로 통합하셨지요. 세상에 남을 우리를 위해 당신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고 마시도록 하심으로써 "먹고 마시는 일"도 영원한 생명을 맛보는 하느님의 일로 격상시키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실 새 계약은 시나이 산에서 모세의 중재로 하느님과 맺은 옛 계약을 부정하거나 전복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토대 위에서 직접 파스카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완성하신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리신 율법의 말씀을 간과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덧붙이고 재단해 형식 속에 가둬버린 정신을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빛을 발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루카 5,39).
예수님은 아무리 당신이 자신을 제물로 내놓는 최고의 사랑을 실천한다 해도 옛 포도주 맛에 길들여진 많은 이들이 옛 것을 고수하리라는 걸 모르시지 않습니다. 새로움에로의 변화를 거부하고 익숙해진 제도와 틀에 안주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 자체를 충성으로 여기기에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그것까지 포함해 모두를 포용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콜로새 신자들에게 써보낸 그리스도 찬가 부분입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통찰하여 우주적 차원에서 노래한 찬미가라할 수 있지요.

모든 만물은 "그분 안에서 ...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설령 민족, 언어, 문화, 종교, 역사가 다르다 해도,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창조된 모든 존재는 이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옛 것과 새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로 화해하여 통합됩니다. 진정한 평화입니다. 십자가의 가로 축은 온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포용을, 세로 축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역사를 한 줄기로 잇는 창조의 정통성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된 모든 만물은 하나의 노래를 부릅니다.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 엄격히 분리시킨 "기도, 단식"과 "먹고 마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도 안에서 메뉴얼로 분화되고 경직되어 버린 하느님 섬김의 장치를 혼인 잔치의 기쁨 안에 새롭게 녹여내십니다. 새 신랑과 함께하며 새 포도주에 취한 이들은 창조된 본성대로 모두 함께 저마다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고의적으로 하느님을 모독하지 않는 이상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는, 분리와 구별을 그치고 포용과 통합의 정신을 되살리라고 온 몸으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루카 5,34).
형식과 틀에 매여 사느라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지금, 여기" 혼인 잔치의 행복을 놓치지 않도록 합시다. 예수님께는 고행과 금욕 못지 않게 먹고 마시는 일도 기꺼워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에 겨워 번지는 맑고 싱그러운 웃음소리도 눈물과 땀방울만큼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이 될 수 있답니다. 혼인 잔치에서 신랑과 함께 기쁨을 실컷 누리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나는 누구와 술을 먹고 밥을 먹는가? 

-김찬선신부-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오늘은 위의 말씀을 가지고 묵상해봤습니다.

그저께 저는 주님의 영적인 시간표를 얘기하며
주님도 먹고 마시고 하셨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시간표에서 뺀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기들과 요한의 제자들만도 못하게
주님과 제자들이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합니다.
정말 주님의 제자들이 다른 것은 안하고 먹고 마시기만 했고,
설마 주님께서 기도도 복음 선포도 하지 않고 마시기만 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먹고 마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기도 하신 것이고,
실제로는 기도와 복음 선포를 더 많이 하셨고 다만 단식을 안 하신 건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먹고 마시기만 했다고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그리고 사랑보다 단식을 중요시했던 것이고
그래서 단식을 한 자기들은 진짜고 주님은 엉터리라 여겼던 겁니다.
이것은 영적인 교만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거야말로 엉터리 가치관이지요.

우리는 이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금요일에 금육을 하면 진짜 신자이고 하지 않으면 엉터리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엉터리이고 그런 신앙이 엉터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받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엉터리이지 다른 것이 엉터리가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하느님 사랑이라고 답을 주시고 이웃사랑도 못지않다고 하셨고
그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복음도 선포하시고 치유도 해주셨지만
죄인의 집에 가 술도 같이 드시고 밥도 같이 드셨던 거지요.

이것과 관련하여 술을 좋아하는 제가 반성하는 것이고 도전을 받는 것이
바로 사랑으로 술을 마시느냐 이것입니다.

알콜중독을 얘기할 때 술을 안 마시면 생각만 나도 중독이라고 합니다.
물론 여러 단계의 중독 중에 낮은 단계의 중독이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중증의 중독자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술과 관련하여 반성이 되고 중독과 관련해서도 반성이 되는 것은
좋아서 마시느냐 사랑으로 마시느냐 둘 중에서, 곧
나의 만족을 위해 마시느냐 사랑을 위해 마시느냐 중에서 전자라는 겁니다.

저는 제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 같은 사람하고는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그 좋은 술을 왜 싫어하는 사람, 원수 같은 사람하고 마셔
저의 만족을 위한 그 좋은 기회를 망칩니까?

노숙자들과 술 마시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있는데
사랑 때문에 그분들과 술 마시는 것도 마시고 싶지 않고
그래서 이것도 제 마음에 걸리고 아직도 도전꺼리입니다.

이런 저를 볼 때 주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를 대단히 사랑한다는 것이고,
술을 같이 마신다는 것은 더 대단한 사랑을 보이시는 거지요.

요즘 사랑할 줄 몰라서 밥을 혼자 먹는 혼밥족이 있고
술조차 혼자 먹는 혼술족이 있다는데 저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오늘 주님을 보며 나는 누구와 주로 식사를 하고 술을 먹는지 돌아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9월 4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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