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3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2019년 9월 3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40년 무렵 로마의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법학을 비롯한 귀족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은 그는 로마의 고위 공직자를 지낼 정도였으나 모든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590년에 교황으로 뽑힌 그레고리오 성인은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한 최초의 교황이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이,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 음악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기고 604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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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루가 4,31-37)
They were all amazed and said to one another,
"What is there about his word?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come out."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날이 밤도둑처럼 올 것이니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자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몰아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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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알렉산드로스 임금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한 곳을 바라보며 “저 곳에 내 이름을 따다 붙인 도시가 하나 생기면 좋겠다!”라고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얼마 뒤 다시 그곳을 방문하니 ‘알렉산드리아’라는 커다란 도시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임금의 말을 듣고 그의 뜻대로 임금의 이름을 따다 붙인 도시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권위가 있으셨다고 말합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다는 뜻은 그 말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만듭니다. 새사람을 만들 수 있는 것만큼 큰 권위는 없습니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말을 한다고 해서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0년 동안 같은 이유로 부부 싸움을 해도 하나의 버릇도 바꾸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말에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오늘 복음은 말씀이 어떻게 권위를 지니게 되는지 그 비밀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십니다. 마귀는 은근히 주님을 찬미하듯,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베드로는 같은 고백을 해서 교회의 수장이 되고 하느님 나라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의 칭찬으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시는 분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를 지키려면 세상 것들에 대한 애착에서 초탈해야 합니다.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시는 분은 성령이신데 그 성령의 불은 세속과 육체의 욕망으로 약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애착을 벗어난 사람의 한마디 말이 수천 마디 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제가 다 한숨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자매님께서는 아들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왜 안 했겠어요. 이런 식으로 계속 살 것이냐고 했더니 자기도 이러고 싶겠냐면서 화를 내면서 집을 나갔다가 한참 만에 들어왔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또 집 나갈까 봐 싫은 소리도 못 하겠고, 저렇게 의욕 없이 사는 모습이 안타깝고 화만 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안타까워서 자매님과 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대답이 하나같습니다. “다 필요 없어요.”라는 것이었지요. 만약에 그랬다가 또 집을 나가면 어떻게 하겠냐고,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더니,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도밖에 없죠.”
응석받이로 키우는 것은 지나친 관대함과 방임의 조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습을 원하실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만 해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답을 이야기하면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는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꾸짖으면서 마귀를 내쫓습니다. 악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뒤로 미루면서 계속해서 타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타협하지 않고 곧바로 실행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실천안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능력을 전해주십니다.


어떤 어린이가 길을 가다가 500원짜리 동전을 주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돈을 얻었다는 생각에 신이 나며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데, 한 여자아이가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500원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 아이는 이 500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당시에 아이들 세계에서 인기 있었던 컵라면을 하나 사서 먹고도 또 다른 군것질도 할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울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면서 ‘그래, 내 돈도 아니니까.’ 하면서 500원을 돌려주었습니다. 이 착한 선행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둘은 20년 뒤에 결혼했습니다. 500원을 돌려줌으로 인해 이것이 인연이 되었고 후에 결혼에까지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자그마한 사랑의 실천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무슨 영향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칭찬의 함정
-전삼용신부-
어느 날 까마귀가 치즈 한 조각을 훔쳐서 그것을 조용히 먹으려고 숲 속으로 날아갔는데, 마침 여우가 지나가다가 나무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치즈, 냄새도 좋다. 저것을 꼭 빼앗아야지.’
여우는 나무 가까이 와서 까마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마나님,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짐승입니다. 나는 당신이 이렇게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참, 마나님의 음성도 아름답겠지요? 만일 그러시다면 마나님은 조류의 여왕으로 불림이 당연합니다. 어려우시지만 노래 한 곡조 불러 주시렵니까?”
까마귀는 자기의 노래를 여우에게 들려주기 위하여 입을 열었습니다. 순간 치즈 조각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우는 그 치즈를 한 입에 삼켜 버리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칭찬이나 찬미가 다 좋을 것일까요? 그것을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다른 욕망이 들어있다면 그것은 참다운 칭찬이 아닙니다. 남을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이용하려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이 얼마나 용감한 고백입니까? 심지어 마르코복음에는 “더러운 악령들은 예수를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라고 합니다. 마귀의 특징은 항상 칭찬하고 찬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찬미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실 무언가를 바라는 그들의 욕망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찬미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우리 찬미가 참다운 찬미인지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자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라고 하시며 그를 교회의 수장으로 세우시고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셨습니다. 그러니까 시몬 베드로의 찬미를 닮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성령을 통한 신앙고백이고, 마귀들은 상대를 이용하기 위한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고백은 성령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생각으로 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성령은 믿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열매들도 맺어주십니다. 다른 열매들을 통해 우리의 예배가 참다운 예배인지, 그렇지 않은지 구분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믿음),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미운 마음을 가지고 미사를 드리며 주님을 찬미할 때 아마 주님께서는 “조용히 해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또 기쁘지 않고 우울한 마음으로, 혹은 평화롭지 않고 걱정과 근심, 초조한 마음으로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온유하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찬미를 한다면 더더욱 그러하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4-25)
성령으로 주님을 찬미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주시면 더 감사하겠다는 식의 찬미가 아닙니다. 지금 있는 것까지 다 빼앗겨도 당신만으로 충분하다는 찬미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래 입장에서는 그 칭찬에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돈벌이를 위해 고래를 칭찬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고래가 죽으면 돈벌이가 사라져서 슬퍼할 것입니다.
어쩌면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칭찬할 때도 이런 고래에게 하는 칭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더 성적을 잘 받아오면 칭찬을 해 줍니다. 그러나 공부를 못해도 칭찬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의 성적 때문에 칭찬한 것이지 자녀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안에 다른 욕망이 있을 때 그 칭찬은 상대를 이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마귀들도 자신들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찬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쫓아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것을 기대하며 신앙고백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없는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우리 욕정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드리는 찬미를 원치 않으십니다. 지금 주님을 찬미하는 시간에 기쁘고 감사하지 못하면 그의 찬미는 무언가 바라는 거짓 찬미입니다. 마귀의 찬미인 것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더라도, 되는 일이 없어도, 가족 안에 우환이 생겨도, 그래도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찬미할 수 있을 때 그런 찬미를 즐겨 받으십니다. 성인들은 사자에게 잡혀 먹힐 때도 찬미했고, 목에 칼을 맞을 때도 찬미했습니다.

-조재형신부-
유대인들이 인류의 삶에 공헌한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안식일입니다. 우리가 주말을 보내고, 저녁이 있는 삶을 보내는 것은 안식일이 정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루 쉬셨다는 성서의 말씀이 근거가 되었습니다. 저는 안식년을 잘 지냈고, 새로운 마음으로 주어진 소임을 시작하였습니다. 음악에도 쉼표가 있듯이, 그림에도 여백이 있듯이, 완벽한 것도 좋지만 우리의 삶에는 여유가 있으면 더 좋습니다. 하루 중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누군가를 도와주는 시간을 갖는다면,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다면, 생각을 공유하는 책을 읽는다면, 수고한 자신에게 밝은 웃음을 보낸다면 매일 매일이 안식의 시간이 될 겁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격려하지 않는다면 남도 그렇게 하기 힘들 겁니다.
다른 하나는 ‘죄의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인 악인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본능과 본성에 따라 사는 생명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 뿐입니다. 예술, 문학, 철학, 문명이 자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하와는 선과 악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지닌 하와는 선을 알면서도 악을 택하였습니다. 아담은 선을 알면서도 하와의 말을 따랐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죄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을 상실한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하느님께 돌아올 생각도 없습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인면수심(人面獸心), 극악무도(極惡無道),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죄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악령에 물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악령에 물든 사람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악령에 물든 사람은 어쩌면 자유의지를 지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 안의 거짓된 자아는 나를 악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 저주스러워라, 저주스러워라! 얼마나 숱한 층층대를 밟아 지옥의 밑바닥까지 끌려갔던 것입니까! 그러면서도 진리에 허덕이며 맘 조리고 애태우면서,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거짓된 자아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권위와 힘이 실릴 수 있도록, 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어제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시면서 선포하신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오늘 카파르나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 안에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삶과 죽음, 사명과 운명을 명명백백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시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복음 4장 18~19절)
고향 나자렛에서 크게 배척받고 홀대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실망이 크셨겠지만, 크게 연연해 하지 않으시고, 훌훌 털어버리시고, 다음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침을 계속하셨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오랫동안 들어왔던 유다 지도자들의 고리타분한 말씀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신선했고, 명쾌했으며,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 설교 중에, 그 자리에서 당신의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고 권위가 있는지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회당에는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 안에 들어있던 마귀는 예수님의 존재감과 포스에 기가 눌려, 자기도 모르게 일종의 신앙고백을 하고 만것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복음 4장 34절)
카파르나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마귀는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마귀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랜 세월 마귀의 횡포와 올가미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이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찬 모습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외친 것입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루카 복음 4장 36절)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친일 군부 독재자들의 통치방식에 익숙해서 그런지,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권위’라는 단어에 큰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사실 권위라는 것은 나쁜 것이 절대 아닙니다.
권위라는 것은 한 사회나 조직이 조화있고 균형감있게 운영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힘입니다. 한 리더십이 권위를 상실하게 될 때,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권력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리더 안에 권위와 품위, 품격이 조화를 이룰 때 그 조직은 살아나는게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는 그 모든 것이 자연스레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갖은 기득권란 기득권은 다 누리며, 언제나 정통성 없는 군사독재 정권 편에 섰던 언론들,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놓고 죽음까지 몰고간 반민족적 언론들, 선량한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릇되고 거짓된 정보를 제공한 반복음적 적폐 언론들을 바라보며, 권위와 겸손, 품위과 인격이 사라진 말이 얼마나 천박하고 사람을 해치게 되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와 다른 동물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 언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가장 독창적인 능력이 바로 언어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권위와 힘이 실릴 수 있도록, 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반영억신부-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의 권위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전합니다.
오늘 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 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로운 힘이 바로 신앙에서 나옵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송영진심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4).”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 힘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서 잠잠해지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고(루카 8,24),
온갖 질병을 고치는 힘이기도 하고(루카 5,24-25),
마귀들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이기도 하고(루카 4,35),
죽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기도 합니다(루카 7,14-15).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에 그 힘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옛날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이 아니라,
“오늘(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힘’이 들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서, 또는 다른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날마다 들으면서, 그 말씀 안에서,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1-37).”
여기서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그들은 그분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음을 느꼈고,
그 힘에 압도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이 이야기 바로 앞에,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이야기가 있는데,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은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반응과 많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자렛 사람들은 놀라기는 했지만, 그 말씀에 권위가
있다고, 즉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다고 느끼지도 않았고, 압도되지도 않았습니다.
나자렛과 카파르나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고,
‘듣는 사람들’ 쪽에 차이가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표현을 조금 바꾸면, 나자렛 사람들은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귀를 막고 있었고,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마태 13,13)이 되었고,
반대로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말씀의 힘’을 느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뒤의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을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5).”
아마도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힘에 놀라고 압도되어서
널리 소문을 퍼뜨리기는 했는데, 참된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은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그들은 마귀들도 복종하는 예수님의 말씀의 힘에 기대를 걸고
병자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루카 4,40).
여기서 마귀가 한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도 아니고 증언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고,
쫓겨나지 않으려고 반항하는 말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그 말은 마귀 들린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 마귀가 한 말입니다.
자기가 사로잡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마귀가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마귀에게 자유의지를 빼앗긴 사람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마귀 들린 사람의 말과 마귀의 말은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명령만으로) 마귀를 쫓아내신 일은,
‘예수님의 말씀의 힘’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힘을 생생하게 목격했고, 또다시 놀랐고,
그 힘에 더욱 압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시는 것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번역이 조금 어색한데, 어떻든 이 말씀의 뜻은,
“나는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는 표징이다.”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인간 세상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쫓겨난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마귀들이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들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패배와 멸망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마귀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들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것들을 물리치는 방법은 단 하나, ‘기도’뿐입니다(마르 9,29).
(기도할 때마다 온갖 잡념이 생기는 것도 마귀의 장난일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더 기도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보기
-이종훈신부-
뉴스보기가 힘들다. 좋은 소식은 거의 없고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끔찍한 사건사고와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정치소식들이 대부분이다. 안타까운 소식에 마음이 아프고 불의한 일에 화가 난다. 그런데 과연 내가 진실을 알고 있거나 정의로워서 그럴까? 그럴 자격이 있나?
남을 다치게 하는 일은 순간적으로 벌어지지만 치유와 회복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파괴는 쉽지만 창조는 어렵다. 분열과 죄에는 노력이 필요 없지만 평화와 용서에는 땀과 눈물 그리고 피까지 필요하다.
하느님은 죄스러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은 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이셨다. 마귀도 그것을 고백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 그 마귀는 예수님이 자기처럼 세상을 단죄하고 파괴하려고 오신 줄로 알고 있었나보다. 그러나 그분은 심판이 아니라 용서를, 멸망이 아니라 창조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셨다.
세상일에 안타깝고 슬프고 화나지만 희망을 버리지 말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으며 또 다시 조용히 기도한다. 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려는 거룩한 욕심을 부린다. 분노와 단죄는 나의 권한 밖이다. 의로운 분노는 오로지 하느님만 하실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도 단죄하지 않으셨다. 그런 마음이 되는 게 불가능해보이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 그럴 때마다 있는 힘을 다해 주님께로 마음을 돌린다. 회심이고 회개이다. 창조와 구원은 그렇게 십자가의 길에서 하나가 된다.
예수님, 주님 말씀대로 십자가의 길이 곧 구원의 길입니다. 악은 선으로 물리칠 수 있음을 배워 알지만 그대로 믿고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선한 마음을 지니는 것은 쉽지만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받는 도전, 저항, 비난, 폭력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주님의 마음을 가르쳐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슬픈 듯 평화로운 어머니의 얼굴에서 십자가의 평화를 배우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4,31-37: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나자렛에서 설교하신 다음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새로운 창조는 옛 창조가 끝나는 때인 안식일에 시작되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 당신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마귀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34절)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신다. 그것은 마귀가 진실을 말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마귀가 들린 사람을 완쾌시켜 주신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즉시 알아본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견디지를 못한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능력은 인간뿐 아니라 마귀의 힘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멀리하려는 그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권능을 견디어낼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 앞에 마귀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꼼짝 못하고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그것을 새로운 가르침,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놀란 것은 조용하고 간단한 말 한 마디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지도자들 즉 그들의 스승들과 다른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보았고 놀랐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권위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전파되었다.
예수님은 여기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당신의 아들임을 이러한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마귀들이 그분을 알아보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하겠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눈이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즉 깨어있는 삶이 될 때에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때에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인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보면서 또한 우리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기도하면서 주님께 은총을 구하자.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루카 4, 34)
-한상우신부-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누군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성하게됩니다.
안다는 것은
사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사랑하는 것으로
나가야합니다.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예수님의 이름이
더러운 영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이름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참된 만남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삶을
바꾸어 놓는
이름입니다.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아프고 병든
우리들을
정화하여주시고
건강한 삶으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어디로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구원을
당신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삶을 정화시키시는
예수님께로
돌아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진정 권위 있는 말씀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복음의 사건이 벌어진 시간적 배경은 안식일이고, 공간적 배경은 회당이지요. 복음서 내용을 이리저리 반복해서 만나온 우리에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은 공생활 초기라 아직 안식일이 논점이 되지는 않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예수님께 올가미가 되어 드리워질 것이니까요.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2).
복음사가는 이 일화에서 "몹시, 모든, 몹시, 대체" 등 다소 과장이 느껴지는 강한 표현을 자주 사용하며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설명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줄곧 설교를 들어왔을 보통의 유다인들이 놀라는 걸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기존 종교지도자들과 많이 다르긴 달랐나 봅니다.
말씀의 권위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요? 권위 있는 말씀은 과연 어떤 말씀일까요?
말씀이 우리 각자에게 다가와 우리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킨 체험들을 돌아보면서 답을 모아 봅시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우리의 구체적 실존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시선에서 나올 때, 미혹으로 뿌옇던 마음에 확신을 주며 안개를 걷어내어 주실 때, 그 말씀이 필요한 부분에 정조준되어 꽃힐 때입니다.
말씀이 이를 전하는 이의 사심이나 사욕으로 얼룩져 있지 않을 때, 자기 과시나 자기 영광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지향할 때,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진실을 전할 때입니다.
선과 사랑에서 출발한 말씀은 비슷한 지향을 품은 채 귀를 기울이는 이와 부딪혀 파열음을 내거나 튕겨나가지 않고, 순하고 부드럽게 흡수됩니다. 각자의 갈망과 필요를 감싸며 고요히 스며들어 듣는 이와 하나가 되지요. 모르긴 해도 그날 회당에서 예수님 말씀의 권위에 탄복했던 이들에게 그분 말씀은 그리 다가갔을 것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
권위 있는 말씀의 반대 예를 찾아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거칠고 소란스럽고 적대적이며 관계 파괴적인 "말"입니까! 두려움과 경계, 과시, 위협, 거부 등 어둠의 요소로 가득찬 "소음들"이 난무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악의 말이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
악에게 정면으로 던지신 이 말씀은 그 자리에서 곧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천지창조 때와, 주님 탄생 예고의 순간이 떠오릅니다. 말씀의 즉각적 실현은 창조와 강생의 순간은 물론 인류를 악에서 해방시키는 순간에도 이처럼 힘을 발휘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아버지로서, 목자로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1테살 5,4).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1테살 5,5).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1테살 5,11).
이미 사도는 마치 고칠 게 없는 모범 답안을 체점하는 듯 느껴질 정도로 그곳 신자들의 신앙과 열성을 인정해 주며 계속 그렇게 하라고 독려합니다. 이 편지를 받아들고 읽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마음에 피어났을 흐뭇하고 뿌듯한 감사와 기쁨이 느껴집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그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 그분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테살 5,11).
이 마지막 말씀이야말로 듣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되는 권고인 동시에,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어떤 지향으로 임해야 그 "말씀"이 진정 주님의 말씀이 되는지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연 격려하는 말, 성장에 도움을 주는 말은 선과 사랑의 주님에게서 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말씀"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아버지 오른편에 올라가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뚝딱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하지만 자기 것을 빼고 진실되게 하느님 뜻을 전하다 보면 형제자매를 격려하고 성장시키는 "말씀"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지막한 공감, 소소한 인정, 소박한 격려가 작은 치유를, 작은 해방을 일으키는 권위 있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아멘.
"하느님의 종들의 종" 성 그레고리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꽃을 보지 않고 꽃 향기만 맡는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59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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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