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2019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태오 23,13-22)
Blind fools, which is greater, the gold,
or the temple that made the gold sacr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인사하며,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위선자이며 눈먼 인도자들이라고 하시며 불행하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그동안 겪은 역경과 박해에도 그들이 보여 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항구한 희망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사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를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 주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임을 일깨워 줍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불행하여라, 너희 ……들아!”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세 가지 불행 선언은, 각각 하느님 나라, 개종자를 얻으려는 행위, 맹세에 관한 것이며 그들의 위선을 꾸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과 종교를 왜곡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오늘날에도 열린 마음과 열정과 기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주변에서 봅니다. 이런 태도는 마음은 멀어지고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헛된 예배 행위입니다. 나아가 이는 ‘늘 해 오던 것’만 굳게 지키며, 새로운 바람을 두려워하여 시대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전통주의를 고집하며 오래된 옷과 가구의 냄새를 제거하는 신선한 산들바람에 창문을 닫게 합니다.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려면 인간의 대답, 곧 믿음은 행실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삶의 분리,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분리, 생각과 말과 행위의 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하지만 암은 계속 성장하여 퍼져나가 간까지 전이되어 어쩔 수 없이 여덟 달 뒤 수술에 동의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티브 잡스 본인도 그의 자서전에서 후회했던 결정으로 수술 거부한 것을 뽑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아이폰을 만들었던 힘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들어야 할 때는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이상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 문제는 자기 자신만이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남들까지 설득을 시켜서 자신의 영역에 끼워 넣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같이 살자.’라는 마음이 아니라 ‘같이 죽자.’라는 마음은 아닐까요?
이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자기처럼 하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인지를 알면서도 ‘남들도 다 하니까.’라면서 똑같이 행동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예를 들어 교통신호를 받아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옆 차선에 있던 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갑니다. 또 그 뒤의 차도 신호를 무시하고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뒤의 차는 ‘왜 가지 않느냐?’면서 경적을 울립니다. 신호는 분명 정지 신호인데도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바로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직접 강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하는 말과 행동만으로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 사람의 지위가 남다르다면 어떨까요?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을 향해 불행선언을 외치십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의 단식과 기도와 자선은 그 누구도 쫓아가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위선을 보셨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 남들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삶, 그러한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영향을 받아 커다란 죄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을 통해서는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물을 잘 안 마십니다. 그런데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많이 마셔야 몸의 노폐물을 배출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마셔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실천이 잘 안 됩니다.
이런 고민을 어떤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저의 소변 색깔이 진한지 그리고 갈증을 느끼고 있는지를 물어보십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몸에 수분이 정말로 부족하면 신장에서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수분을 꽉 잡아 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변 색깔이 진해지는 것이지요. 또한 수분이 부족하면 몸은 본능적으로 갈증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소변 색깔도 정상이고, 갈증도 없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신부님, 우리 몸의 70% 이상이 이미 물입니다. 더 마신다고 그만큼 더 좋아지지 않아요.”라고 대답해주십니다.
굳이 억지로 물을 마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변 색깔이 진해지거나 갈증이 생기면 얼른 물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이상이 있을 때, 심한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될 때는 얼른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인도자의 조건
-전삼용신부-
영재 발굴단에 나온 여섯 살 서진이는 문제를 푸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상담 선생님 앞에서도 다른 것은 대답하지 않고 “일단 문제 하나 내봐요!”라며 자신의 실력을 뽐냅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들은 아직 풀 수 없다며 자격지심을 드러냅니다. 물론 그런 문제들은 여섯 살 다른 아이들은 꿈도 못 꾸는 혼합계산과 같은 것입니다. 영재로 인정받음에도 그런 자격지심은 왜 생겼을까요? 상담 선생님은 “나는 네가 문제를 잘 푸는지, 안 푸는지가 궁금하지 않은데? 네 기분이 어떤지가 궁금한데?”라고 말하니 서진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서진이는 문제집이 재미있어서 풀었던 것이 아닙니다.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문제를 풀어왔던 것입니다. 엄마는 서진이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맞히면 칭찬해주고 틀리면 칭찬해주지 않는 것 자체가 서진이에게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마음을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서진이 말고 세윤이도 있었습니다. 엄마는 여덟 살 세윤이가 공부가 제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세윤이는 학원을 무려 11개나 다닙니다. 팔방미인으로 엄청난 칭찬을 듣는 아이입니다. 세윤이는 엄마가 억지로 시킨 공부 때문에 한숨을 쉬다가 엄마가 나오는 동요에서 엄마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달리는 것인지, 엄마의 꿈을 위해 달리는지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우리는 다 누군가의 지도자요 인도자들입니다. 내가 인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적어도 자기 자신의 인도자입니다. 인도자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면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 지도자와 함께 망하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하늘나라의 문을 잠그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무엇이 중요한지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자녀에게 신앙보다는 공부나 성공을 우선시 가르쳤다면 그 부모는 눈먼 인도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지옥가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고, 또 세상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각자, 또 나에게 딸린 가족이나 이웃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손에 소위 만보기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그들은 하루에 몇 보를 걸었는지 체크하기 위해 손목에 그런 기구를 차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은 자신들의 건강을 수시로 체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차고 다니는 수고를 감수한다는 말은 그 사람들에겐 건강이 최고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손목에 어떤 것을 차고 다녀야할까요? 영혼 구원을 위해 하루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했는지 안 했는지 체크하는 무언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차고 다니며 수시로 체크해야 하는 것은 바로 ‘기도시간’입니다. 스마트 폰을 기도시간에 맞추어 놓고 기도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분들은 하루의 기도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나, 명예를 얻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며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녀들의 신앙일 것입니다.
저도 하루에 얼마동안 기도해야겠다는 것이 정해져있습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그것을 몇 프로나 채웠는지 체크합니다. 이것이 하루 중 가장 신경 쓰는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제가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또 기도하면 다 잘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친교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면 자신과 이웃을 위한 잘못된 인도자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도자의 조건은 무엇이 중요한 지 아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강 건너 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은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줄 겁니다. 홍콩의 대규모 시위는 한 지붕 두 가족이 가지는 갈등의 표현입니다. 유럽은 난민 문제로 사회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이익의 충돌, 자유와 억압의 갈등,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있습니다. 강 건너 불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지금 당장 나에게 오는 피해를 느끼지 못하는 일입니다.
‘발등의 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대학입시를 앞둔 학생과 학부모에게는 시험이 중요합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에게는 결혼 준비가 중요합니다. 인사이동을 앞둔 사제에게는 인수인계와 짐 정리가 중요합니다. 외국 생활을 시작한 저에게는 현지 생활의 적응이 중요합니다. 발등의 불이지만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리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강 건너 불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유럽 사회가 건강한 것은,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이 ‘강 건너 불’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시민단체들은 정부의 정책에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들은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지 않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국민은 공무원을 신뢰하고, 국가는 국민의 복지를 위해 예산을 집행합니다. 강 건너 불이 꺼지도록 서로 양보하고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발등의 불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합니다. 무너진 둑을 다시 쌓은 것은 어렵습니다. 시간이 날 때 기도하기보다는 기도하는 시간을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쳐야 합니다. 오늘의 근심과 걱정은 오늘 털어 버려야 합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오늘의 기쁨을 망쳐서는 안 됩니다.
문제의 중심에는 ‘돈’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돈님이 되는 것이고, 돈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게 됩니다. 교황님께서 정확하게 지적하셨듯이, 지금의 모든 문제는 종교 간의 갈등이 아닙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이 아닙니다. 자본이 가져다주는 화려함과 풍요에 중독된 우리들의 일그러진 양심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이라는 곳간에 더 많은 재물을 쌓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근본적인 치유는 물질보다는 정신이 더욱 소중하다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피부의 색, 직업과 직책,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 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참된 평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규칙적인 생활, 긍정적인 마음, 더불어 살아가려는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하루의 생활을 성찰하고,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나눈다면 세상은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십시오!’ 우리가 진리와 영혼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틀에 갇히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거짓의 틀을 깨라고 말씀하십니다.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 신뢰와 우애가 더욱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요 백성들의 자존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몇번이나 파괴되고 정복 당하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AD 70년,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히 함락 당하고 산산히 부서집니다. 그 와중에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알량한 교도권을 행사하며, 유다교를 지탱해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토록 불행하던 시절, AD 90년경, 마태오 복음서를 집필하게 되는데, 그 무렵 그리스도교는 유다교로부터 완전히 선을 긋고 독립하게 됩니다. 민족 종교이자 기성 종교, 나름 정통성을 자부하던 유다교 입장에서는 신생 그리스도교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이단으로 선포하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다교 쪽에서 워낙 강하고 심하게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몰아붙였기에, 마태오 복음서를 집필하고 있던 복음사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유다 회당의 지도자 격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이고 있던 위선과 이중성을 신랄하고 지적하고 몰아 붙입니다. 그들의 율법주의를 고발하고 단죄하면서, 절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고발과 단죄의 말씀이 얼마나 강하던지, 듣고 있노라면 섬뜩할 정도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단죄와 고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입니다. 속으로 ‘아이고~ 잘 됐다. 속이 다 시원하다!’며 뒤돌아서서 고소해하고, 끼리끼리 모여 낄낄댈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7가지 불행 선언은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자를 향한 경고의 말씀이기도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저지르고 있었던 위선적 삶과 이중적인 신앙생활은 오늘 우리도 저지르기 쉬운 악덕이니만큼, 강력한 경고 말씀을 매일 우리 각자의 삶에 비추어볼 일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정의나 자비, 신의나 이웃 사랑과 같은 율법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을 뒤로 내동댕이치고, 세세한 율법의 준수에만 목숨을 거는 율법제일주의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 손에 ‘지식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거들먹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뽐내던 지식은 거짓 지식으로 결국 백성들을 멸망에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참된 지식의 열쇠는 이미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그리스도 교회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들의 전매특허인 ‘맹세’를 밥먹듯이 되풀이하는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절대 진실’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결과 절대로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스러운 하느님의 이름을 거명하기는 두려웠던지 우회적인 표현들을 사용했습니다. 정말 웃기고 속보이게도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금촛대, 금속죄판, 금화)이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해보이려고 기를 썼지만, 성전 장사꾼이나 다를 바 없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태오 복음 23장 17절)
예수님께서 성전은 성전을 장식하는 금촛대보다 훨씬 상위의 가치를 지니고, 제단은 제단 위에 바쳐진 예물보다 훨씬 상위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명쾌히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간에 자주 오고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신앙이 주는 위로
-반영억신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올바로 믿고, 전하는 방법도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으로 하여 꼭 구원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이사야는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이사29,13-14). 우리는 이런 책망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16)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야 하고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마태5,33-37)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나 여가 생활의 연장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기로 말하면 좋은 것보다 훨씬 더 나쁘기도 합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고약한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느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게 됩니다. 그릇된 신심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걱정입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23,4).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내세워야 하지만 죄와 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지옥의 공포로 몰아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야단을 맞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야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자비가 없는 종교는 무의미합니다. 자비를 입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이 주는 위로요, 희망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은 좋으나 진심어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멘.

맹세
-송영진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태 23,16-17)”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 23,21-22).”
당시 사람들은 맹세를 할 때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가 없어서
성전을 두고 맹세를 했습니다.
그랬다가 맹세를 지켜야 할 때가 되면,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것이 아니니까 안 지켜도 된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그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일상적으로 그런 억지 주장을 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7).”
야고보서 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야고 5,12).”
지금 말하고 있는 ‘맹세’는, 자기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마라.”, 또 “‘예.’와 ‘아니요.’ 라는 말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고 가르치십니다.
맹세는 악한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언제나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은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맹세를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실이라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맹세를 하거나,
또는 거짓을 말하면서도 진실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맹세를 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도 죄이고,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도 죄입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죄.)
헤로데의 이야기에서 함부로 맹세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여기서 “맹세까지 하였다.” 라는 말은,
자기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고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헤로데는 정말로 자기 왕국의 절반을 딸에게 줄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었습니다.
로마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서 헛된 맹세를 한 것입니다.
<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하느님의 예언자를 박해한 헤로데가
“천벌을(하느님의 벌을) 받아도 좋다.” 라고 맹세한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이것은 진심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습관적인 거짓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마태 26,73-74).”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한 것도 큰 잘못인데,
자기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한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맹세한 대로 천벌을 받았을까?
실제로 천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천벌을 받은 것보다 더 큰 심적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평생 그때의 일을 뉘우쳤고, 울면서 통회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날이 밝자 유다인들은 모의를 하고, 바오로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였다(사도 23,12).”
바오로 사도를 죽이려고 했던 그 유대인들의 모의는 실패했습니다(사도 23장).
그러면 그들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맹세를 지켰을까?
하루 정도는 지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모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기들의 맹세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2서를 보면,
하느님을 걸고 맹세하는 말들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아니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2코린 1,18).”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불러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에 아직도 코린토에 가지 않은 것입니다(2코린 1,23).”
우리는 이 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를 위해서 변명한다면,
자기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또 거짓말을 감추려고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코린토 신자들이 그런 어법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어서
신자들에게 맞추려고 그런 것은 아닐까, 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러분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고 있다고 여러분은 줄곧 생각해 왔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의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2코린 12,19).”
(그래도 어떻든 ‘하느님을 걸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믿음
-이종훈신부-
창조는 어렵지만 파괴는 쉽다. 위로와 희망은 어렵지만 비난과 단죄는 쉽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위로할 수 없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참된 희망을 말하기 어렵다.
우리 신앙은 사느라고 지치고 상처 입은 이들을 위로하고 절망하며 슬퍼하는 이들에게 다시 일어나 걷게 하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주님이 해결사나 슈퍼맨 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인생의 참된 동반자가 되어주신다. 나그네 인생길의 목적지를 밝혀주시고 순례를 마칠 때까지 위로하고 격려하시며 힘을 주신다.
신앙은 삶의 짐이 아니어야 한다. 외우고 지켜야 하는 또 다른 의무가 아니라 던져 버리고 싶은 삶의 무게와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와 상처에서도 의미와 희망을 찾게 해주는 안내자가 신앙이다. 믿음에는 돈이 안 들지만 종교는 돈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믿는 이들이 버거워할 만큼 필요하지 않다.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그릇 두 개만 있으면 하느님을 모실 수 있다. 비 오거나 뜨거우면 천막을 치면 된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하느님이 부르셨으니 어련히 잘 먹여 살리실까.
신앙이 위로와 희망을 주고 그것을 자라고 굳건하게 하는 데 이것저것이 필요하다면 믿는 이들이 도울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내리신 저주에 가까운 질책에 마음이 불안해지지 않아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13)”
예수님, 저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부르셨으니 뭔가 좋은 것을 주실 것이고 주님이 시작하신 일이니 끝맺음도 주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거기에서 위로와 희망이 생겨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뭐가 있어야 하고 어떤 건 없어도 되고 또 없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필요한 것은 얻어주시고 불필요한 것은 치워버리고 그거에는 마음도 주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3,13-22: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오늘과 내일의 복음 말씀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해 가장 무서운 말씀이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13.15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일곱 번이나 차례로 당할 화를 지적하신다. ‘불행하여라!’는 말씀은 진노일 뿐 아니라 비애가 곁들여 있는 말씀으로 이것은 의로운 분노이고 하느님의 뜻에 완고하게 눈을 감고 자기 편한대로 하느님을 이용하는 자에 대한 서글픈 사랑의 심정에서 나오는 분노이다.
위선자라는 말은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내면의 상상과 감정은 겉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을 경건하게 준수한다든지 정교하게 꾸며진 기도문, 성구를 적은 것을 옷 속에 넣는다든지 옷 술을 달고 다닌다든지 한다. 또한 규칙과 규례를 소상하게 준수하지만, 마음속으로 이웃을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사랑하거나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함과 거만함과 자기만족이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불행한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하늘 나라의 문을 자기 스스로의 못된 행위로 닫아 놓고서는 자신은 못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로막는 데에 있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것인가? 마태 6,10에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러한 세상을 생각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시민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그 뜻이란 사랑의 실천이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이 그들이 만든 수천 가지나 되는 사소한 규칙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소홀히 한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면전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버리는 행위라고 예수님은 지적하시면서 경고하신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떤가? 예수께서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토록 ‘불행하여라!’고 진노하셨다면 예수님의 그 진노를 받을 만한 허물이 과연 나에게는 없는가? 특히 하느님 앞에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불림을 받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안다고 하는 오늘날의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까지도 내 악한 표양으로 막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오늘의 복음 앞에 진정 하느님의 뜻을 따름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경외하며 겸손하게 행하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며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는 삶이 될 것이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 19)
-한상우신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야 할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거짓과 모순을
버려야 진리의
길을 제대로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길을 인도하는
어리석고 눈먼
인도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믿음으로
욕망을 먼저
내려놓을 수
있어야 참된
인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려놓지 않고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깊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눈먼 인도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제자신의 어둠과
어리석음을 먼저 닦는
인도자이길 바랍니다.
이 모든 삶을
이끄시는
하느님, 당신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일갈을 듣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해 당신의 때를 향해가시는 예수님으로서는 위험천만한 발언입니다.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의 분노를 일으킬수록 주님의 죽음은 더 확연히 실체를 드러낼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예수님의 목소리는 거침 없습니다. 이미 밑바닥을 받아들인 이에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13)
행복과 불행은 당사자 본인이 감정이나 느낌으로 감지하는 상태지, 명령한다고 그리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형태의 어미를 사용하신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깨닫지 못하면서 악을 자행하는 이들을 더욱 강하게 일깨우시려는 의도 같습니다. 그 안에는 "사실 너희는 불행하다, 계속 그렇게 산다면 반드시 너희는 불행해질 것이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하지만 저주의 의미를 담은 단정으로 들리지 않고 내장이 뒤집힐 만큼 안타까움 가득한 호소에 가깝게 들립니다.
소위 백성을 하늘 나라로 이끌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을 추구하려는 사랑이나 열의 없이 제도적 절차로만 의무를 이행할 때 지도자와 백성은 서로 불행합니다. 지도자는 스스로 하느님(하늘 나라)을 놓아버렸기에 불행하고, 백성은 그 길을 차단 당해 불행합니다. 하지만 백성은 선택권이 없었던 터라 하느님에게서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이나 조직에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려 온 힘을 기울이지만, 정작 개종하게 되면 정신보다 형식을, 본질보다 비본질을 택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도록 이끄는 자도 불행합니다. 사실 정성을 다해 철저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들보다 편법에 능한 형식주의자가 함께하기 훨씬 편하겠지만, 결국 함께 "지옥의 자식들"로 전락할 뿐입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예수님께서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금과 성전, 예물과 제단 중 과연 어느 것이 본질이고 어느 것이 비본질인지 묻고 계십니다. 지금 복음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는 알 것 같은데, 당시의 패러다임에 갇힌 이들은 그 뻔한 정답을 진짜로 모르는 걸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는 걸까요?
"무엇이 더 중요하냐?"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이 공허하게 허공에서 흩어집니다. 이기심과 편견,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이들에게서는 그냥 튕겨나올 뿐, 도무지 내면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허공을 떠돕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중요하다고 하시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비본질이 본질 자리를 꿰어찬지 오래라서 이 질문 자체가 진작에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신앙을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낯선 이방인 바오로와 그 일행을 신뢰해 주님의 길에 들어선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서 복음의 불행 선언과 대조되는 축복을 발견합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희망의 인내"(1테살 1,3)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이러한 덕행은 사도와 그 일행의 "처신"(1테살 1,7)이 맺은 열매입니다. 그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1테살 1,5) 복음은 전했기 때문이며, 새로운 개종자들이 자신들을 능가하는 신앙과 열정으로 살아가길 사심없이 축복하면서 길을 터준 바오로, 실바누스, 티모테오의 진정어린 기도 덕분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위해 주님께 빌어 주는 "은총과 평화"(1테살 1,1)는 과거 예수님께서 기존 유다교의 지도자들에게 안타깝게 외치신 호소에 대한 응답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는 이들은 한 걸음 앞서 가면서 비록 자신이 소멸되더라도 하느님 백성의 성장과 행복을 기뻐할 줄 압니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화답송)
딱 한 걸음 앞서 걷는 이들은 뒤따르는 이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살펴주고 북돋워 주어야 할 소명을 지닙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을 충실히 사랑하면서 이 사랑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아낌없이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그 자리에서 환호"하며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합니다. 그들에게 이기심이나 자기 영광, 권태나 게으름은 발붙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아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28일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