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2019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 22,34-40)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 Greatest Commandmen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들자, 나오미는 모압 출신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뒤를 따르려고 고향과 종교를 버리는 룻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보편적인 소식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에 속하지 않으면서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시하던 모압 사람 룻이, 과부인 시어머니에게 충실함과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면서, 뒷날 베들레헴의 가정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연결 고리가 됩니다.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간에 벌어진 논쟁에서 전개됩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라삐 학교가 모세 법을 갈라놓았던 613개의 계명을 감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잘 알려진 성경의 본문을 상기시키십니다.먼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모든 경건한 유다인이 아침과 저녁마다 반복해서 바치던 ‘쉐마’(이스라엘아, 들어라!: 신명 6,4) 기도를 인용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는 레위기 본문(19,18)을 상기하십니다. 레위기에서 이웃의 개념은 친척과 같은 나라 사람만을 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로 확대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주는 새로움은 두 가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주님의 법의 핵심이요 본질로 정의하십니다.그다음, 예수님께서는 법의 전문가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서로 달리 구분된 것으로, 그래서 다른 수준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던 두 계명을 통합하시고 이를 동일하게 여겨야 할 원칙과 요약으로 나타내십니다.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 곧 성경 전체를 요약해 줍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성지에 있다 보면 다양한 본당의 신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어느 신자분이 자신의 본당 신부님 미사에서 큰 은혜를 받는다면서 늘 감사한 마음이라면서 신부님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곁에 있던 다른 신자들의 표정이 너무나 밝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긍정적인 에너지가 옆의 분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잠시 뒤에 또 다른 신자분을 만났는데, 이분께서는 자기 본당 신부님이 너무 조용하게 말해서 미사가 너무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부님 흉을 봅니다. 이때 주변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요? 분위기가 냉랭해집니다. 불만족이라는 부정적 에너지가 주변에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두 분은 같은 본당에 다니시는 분이었습니다. 똑같은 신부님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반응이 이렇게 정반대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부님에게만 문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마음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난 바리사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바리사이들은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님을 이기려고만 합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되지 않자, 오늘 복음에서처럼 무리를 지어서 그분을 이기려고 한데 모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조금도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기기 위해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율법에는 총 613개의 계명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613개 중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크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약 어느 한 가지를 콕 찍어 말하면 “왜 다른 계명은 중요하지 않으냐?”면서 따질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불만족이라는 부정적 에너지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계명을 다음의 두 계명으로 정리하십니다. 바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안의 부정적 에너지는 내려놓고 긍정적인 사랑의 에너지를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계명을 충실히 따르는 모습입니다.


2~300명의 CEO가 모인 모임에서 강의를 하게 된 강사가 정말로 궁금해서 그렇다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거나 반에서 1등을 한 분이 얼마나 계시죠? 한 번 손들어 보세요.”
그래도 한 회사를 대표하는 CEO이니 학업 성적이 우수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학업 성적을 얼마나 강조를 많이 합니까? 그런데 이 강사의 예상과는 달리 손을 든 CEO는 단 세 명에 불과했습니다. 공부가 성공의 중요 요소가 아니라는 증거였지요.
지능이 직업적 성공에 미치는 영향은 2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직업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서 성공하게 만드는 요인의 75%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고 합니다. 낙관적인 생각, 그리고 우리가 하는 행동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믿음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인생의 정북향
-전삼용신부-
2010년 한 여성이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4개월 때였습니다. 다행히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제왕절개 시술이 가능해질 때까지 5개월간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 속에 누워 있었고, 9개월이 되자 병원으로 옮겨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들은 산모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준비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지키던 가족들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녀를 지키는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서툰 말투로 대화도 건네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병원음식을 씹어 자신의 입으로 엄마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것처럼 행동하던 2013년 5월, 아기가 작은 소리로 엄마를 부를 때 엄마가 눈을 떴습니다.
중국 장롱샹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 기사화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3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리맡에서 미소 짓는 아기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고요.”
의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는 음식을 겨우 삼킬 수만 있었고 씹지 않은 것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음식을 씹어 엄마의 입속에 넣어주었을까요?
[출처: ‘왓칭 2: 시야를 무한히 넓히려면’, 김상운, 정신세계사]
바다에서 길을 잃고 방향을 모를 때는 정북향에 있는 북극성을 찾는다고 합니다. 북극성만 놓치지 않으면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고 결국엔 육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쪽일 거야, 저쪽일 거야’를 생각하다보면 바다 한가운데서 빙빙 돌다 좌초하기 십상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으로 유명한 ‘스티븐 코비’ 박사는 강연을 할 때 사람들의 눈을 감아보라고 한 다음 각자가 생각하는 정북향을 손을 들어 가리켜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눈을 뜨면 웃음바다가 됩니다. 각자 다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서로 협의를 해서 한 방향을 정하라고 합니다. 다수결로 한 방향을 정했을 때 코비 박사는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 올바른 방향이 어느 쪽인지 일러줍니다. 그러면 청중은 또 웃습니다. 정북향은 다수결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나침반이 필요할까요? 그냥 흐르는 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인생을 회고합니다.
“저는 현 직장에서 목표를 정했고 결국에는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종사하고 있는 전문분야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개인적인 삶과 가정생활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나는 아내와 자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합니다. 도대체 직장에서의 출세가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인가를.”
이것이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맞게 될 운명일 것입니다. 존재의 이유는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게 해 준 이가 정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만들어준 사람이 정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한대로 살아야 망가지지 않습니다.
모든 만들기 어려운 것은 다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에는 항상 그 만든 이가 존재합니다. 집도 만든 이가 있고 스마트폰도 그렇고 더 만들기 어려운 모든 동물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간을 만드신 분이 사람이 되셔서 인간을 만드신 이유가 바로 ‘사랑’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지 돈 벌러 나가거나 공부하러 학교에 가는 것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큰 성공을 했어도 미운 마음이 있다면 결국 실패한 인생입니다. 방향 먼저 잘 잡아놓고 다음에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헛수고만 하다가 인생을 허비합니다.
장롱샹 씨의 아기는 어떻게 이 ‘사랑’의 진리를 알았던 것일까요? 아마 우리 안에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가 넣어져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 때는 잡다한 생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아서 존재의 이유가 보이는데, 자라면서 세상이 그 진리를 보는 눈을 가리는 것 같습니다. 사랑보단 경쟁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후회하지 말라고 또 이렇게 정북향을 말씀해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조재형신부-
자리를 옮기면서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거주자 등록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허가도 받고, 운전면허도 신청하고, 은행 계좌도 열고, 직원 미사, 직원회의도 해야 합니다. 마트도 알아야 하고, 사제 모임도 참석해야 합니다. 아침에 동네 산책하니 그것도 좋습니다. 아이의 눈이 가족, 동네, 학교,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듯이, 저도 이곳에서 많이 볼 겁니다. 예전에 외국에서 살았던 것도 도움이 됩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부족함을 인정하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도움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이곳에 왜 왔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룻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약에는 롯과 룻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점 하나가 차이나는 이름이지만 삶은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였고,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룻은 베들레헴을 선택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현재 내가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하루의 생활을 성찰하고,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나눈다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욕심과 미련 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강물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대가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영혼을 보여주는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 나눔의 우산, 사랑의 우산을 기증해 주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고 성당에 왔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우산을 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분이 나눔의 우산을 기증해 주셨습니다. 본당에서 준비한 사랑의 우산을 쓰면서 비를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외로움의 비를, 슬픔의 비를, 고통의 비를 맞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우산을, 작은 봉사의 우산을, 희생의 우산을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옛 어른들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무덤에 묻힌 육신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화장한 뒤에 남은 ‘유골’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합당한 삶을 살았느냐입니다. 땅에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는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백성을 사랑하였던 세종대왕,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용감히 싸웠던 이순신 장군,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던 김구 선생,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이태석 요한 신부님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무덤과 유골을 기억하지만,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분들의 열정과 그분들의 사랑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어느 것이 중요한지를 질문합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질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확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해서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 불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
-양승국신부-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금권과 타락으로 얼룩진 성전 정화작업을 실시하십니다. 다음으로 행하신 일은 유다 지도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당시 가난한 백성들, 세리들과 죄인들, 고아와 과부들은 기쁘게 예수님을 환대했고,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지도층 인사들, 바리사이, 사두가이, 율법학자, 헤로데 당원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그분에게 난감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분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올가미 속으로 밀어넣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마태오 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과 유다 지도자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펼쳐진 이른바 ‘마지막 논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존경하는 랍비, 메시아로 오신 주님께 겸손하게 여쭈어보는 질문이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고 곤경에 빠트리려는 야비한 의도의 질문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세금 문제, 부활 문제, 다윗 자손 메시아 문제, 그리고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가장 큰 계명’ 문제였습니다.
난감한 질문을 던지면서 계속 예수님께 태클을 걸었지만, 결과는 예수님의 연전연승이었습니다. 계속되는 논쟁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 적대자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 한 가지를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오 복음 22장 36절)
그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또 다시 촌철살인의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요약과 종합의 명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구약 성경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구약 성경 전체를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게 첫째 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오 복음 22장 37~40절)
예수님께서는 못배우고 가난한 백성들도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신앙의 진리를 아주 간단히 종합해서 설명하십니다. 이 또한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잘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느님 사랑, 인간 사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쉽게 가르치십니다. 한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해야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심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함을 통해, 두 사랑이 지닌 불가분의 관계를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이 실천하던 이웃 사랑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동족 유다인들에게만 적용시켰고,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개념을 크게 확장시키셨습니다. 사랑은 국경이나 인종을 넘어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냥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 안에 얼마나 진심, 진정성, 정성이 포함되어있는지 성찰하며,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아니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그분을 대해온 것을 크게 뉘우칩니다. 그분께서 가장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 불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
-반영억신부-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명함입니다. 다른 명함은 거짓이며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3.35 참조). 우리는 지치지 말고 일치로 향하는 길과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와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라는 부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존중과 대화로서, ‘주님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누가 더 큰 사랑을 내어 놓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요한 바오로 2세, 2001.09.27 강론)임을 알고, 모범이 되어 서로 도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호경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긋는 동작을 통해서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느님과 나의 사랑을, 동시에 옆으로의 이웃과 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장 큰 계명
-송영진신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의 근본정신이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 다음으로 ‘이웃 사랑’을 말할 수 있는데,
‘이웃 사랑’도 ‘하느님 사랑’과 똑같이 계명의 근본정신이다.” 라는 뜻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과 모든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두 사랑이 하나가 될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이웃 사랑 없이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은 ‘위선’입니다(1요한 4,20).
그러면 반대로, 하느님 사랑 없이 이웃만 사랑하는 것은?
무신론자들이 이웃 사랑 실천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빗나갈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세속에서는 사랑과 좋아하는 감정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사랑은 ‘아가페’,
즉 ‘하느님의 완전한 선과 자비의 실현’을 뜻합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사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것과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사랑할 때에는 사랑 외에는 다른 것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산상 설교에 언급되어 있는 위선자들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다른 곳을 향해 있는 자들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이 하느님만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선자들은 마음이 자기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칭찬과 존경을 사람들로부터 받기를 바라는 욕망이
마음속에 숨어 있는 상태에서 바치는 기도는 기도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 말들을 간단하게,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이라고 줄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 외에는 다른 마음도, 다른 생각도, 다른 욕심도 없는 것,
이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함으로써 믿음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믿음이 없다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사랑이 없다면, 말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빈껍데기 믿음이 될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사랑이 없고, 사랑 없이는 믿음도 없습니다.)
사랑 실천의 대표적인 예는 ‘착한 사마리아인’인데(루카 10,33-35),
그는 강도를 당한 사람이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을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 사람들로는,
그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을 예로 들 수도 있고(루카 10,31-32),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를 예로 들 수도 있습니다(루카 16,19-21).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가 화를 내면서 아버지에게 한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보십시오, 나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당신을 섬기며 당신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나에게 당신은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당신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는군요(루카 15,29-30).”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고, 동생을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에 사랑은 하나도 없고, ‘화’만 잔뜩 들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사랑이 없으니 동생의 굶주림은 보이지 않고, 방탕하게 살았던 죄만 보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으니까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받고 있는 사랑은
보이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지 못한 일만 보입니다.
사랑 없는 사람의 눈에는 남의 죄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은 회개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하게 행동하고,
또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은 외면하면서,
자비 없는 정의와 심판만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를 보시고,
그래서 우리를 가엾게 여기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처벌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9-11).”

이웃 사랑
-이종훈신부-
예수님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종교지도자들도 정치인과 권력자들도 관심을 갖고 그분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분을 시험하는 도전적인 질문이나 함정이 있는 질문들을 하곤 했다.
예수님은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셨다. 그분은 공생활 전까지 다른 사람들처럼 일해서 생활비를 벌어야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그들의 고충이 무엇이며 사회제도와 권력층의 함수관계도 아셨다. 그분은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아주 관심이 많으셨다. 그분이 하신 비유말씀의 소재들 안에는 농사일과 부녀자들의 일상부터 정치적인 사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권력층의 도전을 받으셨을 때도 융통성 없이 응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요한 3,16).
그분의 관심은 곧 사랑이었다. 반대파의 뒷조사를 하고 언쟁하고 투쟁하는 우리 정치인들과는 전혀 결이 다르다. 그들의 행동에는 국민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반대파를 눌러 권력을 잡는 위험한 놀이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을 알고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거기에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셨다. 그들도 당신처럼 행복하고 자유롭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이 어떤 것인지 알아 참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알게 되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며 당신께 덤비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는 어리석고 안타깝게 보였을 것이다. 자기들이 지금 여기서 누리고 있는 안락한 현실이 곧 하느님의 축복의 전부라고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또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예수님을 떠보는 질문을 던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숲 전체를 보지 못하는 편협한 마음과 사고방식을 지닌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두가이들에게는 이 세상 너머의 더 넓은 세상을, 바리사이들에게는 그들이 몰두하는 율법전체의 의미를 알려주셨다. 예수님은 그들도 사랑하셨다.
좋아하는 사람,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범죄 집단도 그렇게 한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사랑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자신과 다른 사람도 사랑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참 어렵지만 어려운 만큼 가치 있고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지름길이다.
예수님, 못되게 구는 이들이 밉고 벌주고 싶지만, 그 마음 뒤에 그런 그도 품고 싶은 바람이 조그맣게 있음을 봅니다. 아마 주님께서 뿌리신 그 씨앗에서 나온 싹인가 봅니다. 힘없이 여리게 보이는데 무시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을 가졌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우주의 주인이신 분을 낳고 키워주셨으니 저도 어머니 손에서 그렇게 자라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2,34-40: 가장 큰 계명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우러러 보았다. 바리사이들은 무리의 힘으로 예수님을 이기려고 한다. 논증으로는 그분을 이길 수 없다고 느끼자 무리로 그분을 이겨보려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보려고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다. 예수께서 계명을 달리 말씀하시면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이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지도 않고도 그분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그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며 첫째 계명이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선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절)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첫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고, 둘째 계명에 의해 증명 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가치관이 확실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 위에, 즉 우리의 가치관의 첫 자리에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셔야 한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할 때는 우상숭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느님-인간-세상 재물로 순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올바로 실천할 수 없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은 사랑을 할 줄 알고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지으셔서 이 세상에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관상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기에 우리가 보는 나의 이웃은 바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 상대도 하느님의 모습이고 나 자신도 하느님의 모습이라면 인격적인 사랑의 나눔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 37)
-한상우신부-
가장 먼저도
가장 나중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최선의 삶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무엇보다도
먼저입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의 중심또한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깨닫게됩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갈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오늘또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오늘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함께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이란
하느님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길을 먼저
지나가십니다.
지상에서도
천상에서도
하느님 사랑입니다.
마음과 목숨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자유의 길입니다.
-오상선신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예수님께서 당신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의 질문을 받으십니다. 무수한 조항들로 이루어진 율법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겠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근간이 되는 조항을 제시해 달라는(제시해 보라는) 요구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예수님께서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모든 계명은 하느님과 맺은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기에 하느님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계명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더 잘 섬길지 안내하는 길잡이입니다.
"마음, 목숨, 정신"은 영육의 생명을 떠받치는 인간 존재의 정수입니다. 곧 온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섬기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 의무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내용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는 그 사랑으로 사랑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옵니다. 그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
"달려 있다"는 표현이 매우 강하게 다가옵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와 문화의 뿌리인 율법과 예언서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답변은 과연 핵심 체크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모상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진정한 하느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윗 가문의 역사를 잇는 이방 여인 룻이 등장합니다.
나오미가 과부가 된 며느리 룻에게 제 동족 모압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자 오히려 "룻은 시어머니에게 바싹 달라붙"(룻 1,14)습니다. 민족도 연배도 다른 두 여인 사이에 연대가 형성됩니다. 한때 제 식구였던 며느리가 여인으로서 새 삶을 찾아 행복하길 기원하는 시어머니와, 노년의 여인을 염려하는 젊은 룻의 충실함이 엮어낸 연대입니다. 서로에 대한 연민과 배려는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 1,16)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의 허브라 할 수 있는 한 남성이 죽고 없어진 자리에 이제 하느님이 견고한 중심축으로 자리하시게 됩니다. 그들의 연대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민족과 국가, 계급과 빈부, 연령과 성별의 장벽을 무너뜨리십니다. 인종도 직업도 출신도 전혀 다른 이들이 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공통 분모로 하나가 됩니다. 아무 조건 없이 서로 돕고 때론 울타리가, 때론 디딤돌이 되어 줍니다. 이렇듯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네."(화답송)
억눌린 이, 굶주린 이, 잡힌 이, 눈먼 이, 꺾인 이, 의인, 이방인, 고아, 과부에게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히 돌보시고 버팀목이 되어 주십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노년의 과부와 이방인 과부, 약하디 약한 두 여인은 이제 하느님의 그늘에서 살아갈 것이고, 서로에게 하느님 닮은 신의를 지키는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는 그들을 거쳐 이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온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기본이고 중심이며 절정입니다. 이 사랑을 가장 가난한 순간에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랑이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랑 때문에 사랑을 그리워하는 참 사랑의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막 사랑이 아니려면
-김찬선신부-
“스승님, 율법에서 제일 중요한 계명이 무엇입니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사람이 있기에 하는 말이지요.
하지만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사람은
자기가 사소한 것에 목숨 건다고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목숨을 거는 것을 보면 그것이 그에겐 중요한 거겠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그것이 사소한 일이지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사소한 일인지 큰일인지 가만히 앉아 따져보지 않아 그럴 수 있고,
따져봤는데도 그의 가치관이 전도되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 중요한 것에 대해 묻는 율법학자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설혹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다 해도
우리에겐 배울 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저만 해도 어떤 때 보면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생각지 않고 막 살고 있을 때가 있고,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는 사랑보다 감정이 앞설 때가 있으며,
사랑을 하더라도 무분별한 사랑을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실로 요즘의 저를 보면 무분별한 사랑을 많이 합니다.
어떤 때 보면 제가 사랑조급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나은지 저렇게 하는 것이 더 나은지
잘 식별치 않거나 식별하려하지 않고 마구 사랑을 합니다.
닥치는 대로랄까요?
이 사람 이렇게 해줘야겠고, 저 사람 저렇게 해줘야겠고,
이 일도 해야겠고, 저 일도 해야겠는데 그 밑바탕에
사랑이 있긴 한데 사랑욕심인 것 같기도 하고
닥치는 대로 막 사랑하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꼭 큰 실수를 할 것 같기도 하고,
부도수표를 날릴 것 같은 예감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랑이 깊은 기도에서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때는 저의 집에 성체가 안 계신 것이 아쉽고,
언제고 성체께 달려갈 수 있었던 큰 수도원이 그립기도 하며,
일생 집에 성체 없이 산 여러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깊은 기도에서 나오는 사랑을 해야 함을 생각하고,
이런 때 기도는 사랑의 식별이라는 생각도 하는 오늘입니다.
주님, 불쌍한 저로 하여금 더 깊이 기도하며 사랑하게 하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25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