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2019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태오 19,23-30 )
"Amen, I say to you,
it will be hard for one who is rich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Again I say to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pass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one who is rich to enter the Kingdom of God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하시며 그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기드온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파견을 받는 내용입니다. 모세와 비슷하게 부르심을 받은 기드온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명에 부적합한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하느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집안의 가장 약한 씨족에서 이렇게 약하고 무의미한 도구를 선택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기드온과 함께 계십니다.우리가 나약하고 무능력하다고 느낄 때, 우리의 수단이 우리에게 맡겨진 활동에 부적합하게 나타날 때, 사방에서 온갖 형태의 환난과,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장해물이 다가올 때,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하고 한탄하기보다는 주님에 대한 신뢰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의 위험을 경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재물은 일상생활에서 엄청난 특전을 가져다줍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고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에 넉넉한 예물도 바칠 수 있고 많은 호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은 도움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를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부유한 사람의 상황은 영적인 관점에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재물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재물에 매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재물을 멀리하고 재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늘 나라에 쉽게 들어가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힘만이 이런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합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워낙 강렬한 사건이었기에 이때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코넬대 교수로 인지 심리학의 대가라고 불리는 울릭 나이서는 이점을 확인해보았습니다. 강렬한 사건이었기에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말이지요.
우선 사고 당시 어디에 있었고 어떤 기분이 들었는가를 설문지에 스스로 적게 했습니다. 그리고 2년 반 뒤에 똑같은 사람을 불러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변함없이 똑같이 답변을 했을까요? 같은 답을 말한 사람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고, 25%는 완전히 다른 장소와 시간 그리고 상황을 이야기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왜곡된 기억이 사실이라고 박박 우기더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마치 자기 뜻이 주님의 뜻인 양 착각하면서 자기주장을 조금도 내려놓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분명한 진리를 전해주십니다. 그 진리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봉헌도 많이 하고, 또 자선을 위한 헌금도 많이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니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세상의 재물만을 가지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나도 들어가기 힘든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 편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그분의 사랑과 자비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내 뜻이 아닌 주님 뜻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냥 이유 없이 친구를 때리고 욕을 해대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부모는 너무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림 치료가 좋다고 해서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아이는 자신이 다른 아이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을 그리는 것입니다. 상담사 역시 깜짝 놀라면서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으니 다른 감정치료를 권했고, 실제로 많은 곳을 다니면서 감정치료를 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원래 이렇게 폭력적이고 잔인한 것일까요?
이 아이를 상담한 한 정신과 교수님께서는 머리를 촬영해보자고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머리 CT 촬영결과 좌측구엽에 골프공만 한 낭종이 발견된 것입니다. 폭력성을 관장하는 좌측구엽이 낭종으로 눌려서 아이가 폭력적으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수술로 이 낭종을 제거하자 아이의 폭력성은 없어지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정의 변화가 실제 어떤 병으로 갑작스럽게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감정의 변화를 단순히 정신적인 이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그러면서 원래 그렇다며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다양한 해결 방법이 있음에도 상식적으로만 생각하고 여기에서 멈출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해결 방법은 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잠은 죽음이라 생각하자
-전삼용신부-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인생수업’의 저자 퀴블러 로스 박사는 시사주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죽음에 대한 문제를 끝까지 연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한 체험이 ‘죽음 이후의 삶(사후생)’에 나옵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게 되자, 박사는 그 날 병원과 시카고 대학을 떠나겠다는 통보서를 제출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마지막 세미나를 마치고 승강기로 걸어갈 때였습니다.
한 여성이 박사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박사의 모든 생각을 다 읽고 있다는 듯이 그녀는 함박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박사님, 제가 딱 2분만 시간을 빼앗을게요. 사무실까지 함께 걸어가도 될까요?”
이 2분이 그녀에게는 가장 긴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여성은 1년 전쯤 세상을 떠난 슈와츠 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살짝 몸을 만져봤는데 실제 촉감이 있었습니다. 부인은 말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돌아왔어요. 첫째는 저를 위해 해주신 일에 대해 박사님과 스미스 신부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죠. 더 진짜 이유는,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아직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학자인 그녀는 자신이 죽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그래요. 그런데 스미스 신부님한테 쪽지를 하나 써주시면 좋아하지 않으실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박사가 그 쪽지를 신부님에게 건네주지 않을 것을 환히 알면서도 친필 싸인까지 다 하고는 “이젠 됐나요?”하고 말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지 마세요. 아직은요.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때가 되면 아실 거예요. 약속하실 거죠?”
박사는 “약속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문 밖으로 나갔고 박사는 재빨리 문을 열어보았지만 복도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죽음이란 것이 찾아오고 함께 걷게 된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제대로 살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진실을 알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해집니다.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누기 위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접습니다. 그렇게 퀴블러 박사의 좋은 책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쓴 ‘인생수업’에서 그녀는 죽음을 앞둔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돈을 더 많이 벌지 못한 것일까요? 더 열심히 일하지 못한 것일까요? 더 많은 지식을 쌓지 못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 많이 춤추지 못하고 더 노래하지 못하고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더 행복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말하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죽음은 곧 나의 시야를 왜곡시키는 자아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방해 없이 죽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보게 됩니다.
‘인생수업’에 나오는 한 죽음을 앞둔 아이의 사례입니다.
소년은 아홉 살 인생 중 여섯 해 동안 암과 싸웠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아버지에게 3년 동안 버려둔 채 차고에 세워져있던 자신의 자전거를 꺼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소원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었지만 그때까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마치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모퉁이에서 아이가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나타났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파리하고 창백해서 아무도 그가 자전거를 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밝게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달려왔습니다.
2주 뒤 소년의 1학년짜리 동생은 우리에게 형으로부터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형은 1년 뒤 동생의 생일에 자신이 곁에 있지 못할 것임을 알았나봅니다. 삶의 시간도 기력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 용감한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동생에게 자전거를 물려줌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룬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런데도 부자가 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1코린 15,31)고 말합니다. 오늘 죽는다면 오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께 나아갈 것입니다.
잠은 죽음과 매우 흡사합니다. 저녁 잠자리가 항상 내 생의 마지막이라고 여기시면 좋습니다. 그러면 존재의 이유를 명확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 존재의 이유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하라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행복하려면 내어주어야 합니다. 소유하면 어제 복음의 부자처럼 슬퍼집니다. 초콜릿 맛을 전혀 모르면 초콜릿이 없는 것이 슬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맛을 아는데 조금밖에 없다면 슬픈 것입니다. 그 조금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다시 기뻐질 것입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매일 밤 맞는 잠을 죽음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는 ‘진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 원칙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 원칙에서 드러나는 그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리는 찾아가는 것이고, 진리는 탐구의 대상입니다. 지혜, 지식, 성찰은 진리로 안내하는 길잡이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던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무엇일까요? 내적인 결심과 그 결심을 인내로써 지키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어떤 것을 진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절대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서 갖는 마음가짐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우리를 지켜보는 이데아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개입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인 과정으로서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로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전부 팔아서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지금 강도당한 이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자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재물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는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을 가꾸지 않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재물, 우리의 권세, 우리의 업적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가꾸지 않는 사람은 재물이 많아도, 재물이 없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내면을 잘 가꾸는 사람은 재물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내면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외모, 재산, 능력, 재능을 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우리의 내면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 잠시 일상의 삶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나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내면을 잘 가꾸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캐오는 부유했지만, 내면을 보았고 구원받았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내면을 보았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양승국신부-
성인!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리 범인(凡人)들과는 너무 동떨어진 별세계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인의 삶은 우리와 종이 한 장 차이였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우리보다 조금 더 인내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보다 조금 더 이웃들을 환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인들의 삶에서 주목할 만한 측면은 그들 역시 오늘 우리가 지니고 살아가는 죄, 한계, 나약함,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어둔 밤’을 지내며 괴로워했습니다. 때로 깊은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인해 힘겨워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한 가지! 어두운 그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거룩하게 되는 것’(테살로니카 전서 4장 3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특별한 그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매일의 고통을 잘 견뎌냄을 통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눈물과 기도로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매일 맡겨진 직무에 충실함으로서 우리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매일 비우고 매일 떨치며 매일 새 출발하는 가운데 우리는 조금씩 하느님을 향한 성덕의 계단을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12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12세기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지혜와 경륜은 하늘을 찔렀는데 당대 교황님들을 비롯해 많은 왕들이 그에게 조언과 상담을 청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라며 우러러 보았습니다. 동시에 베르나르도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 수도생활 쇄신의 선구자, 교회 분열을 저지하는 든든한 보루, 탁월한 성서학자, 위대한 명 설교자, 그러면서도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마지막 교부’ 또는 ‘꿀과 같은 혀를 가진 박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090년 프랑스 귀족 가문의 촉망받는 자녀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다정다감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22살의 나이에 시토회에 입회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인품과 지도력, 그리고 놀라운 언변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입회하기 전 그는 여러 형제들과 친구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하나로 모았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당시 개혁파 수도원으로 ‘뜨고 있던’ 시토회에 동반 입회를 하게 됩니다.
초기 양성 기간을 마친 베르나르도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그 유명한 클레르보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척박한 황무지였던 클레르보에 작고 소박한 수도원을 건립한 베르나르도는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고행과 단식, 집필과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았고, 숨을 쉬었으며, 또 그 결실을 형제들과 나누었습니다. 점차 클레르보는 수도생활 개혁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메마른 골짜기였던 클레르보는 점차 빛과 생명의 계곡, 기쁨과 구원의 골짜기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르나르도의 성덕에 감화를 받고 클레르보로 몰려왔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가톨릭교회 쇄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교황청의 폐단과 고위성직자들의 세속화를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교회당국으로 부터 공인받은 순회 설교자로서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했습니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베르나르도는 스스로에게 그 유명한 질문 한 가지를 던졌습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그가 남겨준 수도자로서의 모범을 바라보며 같은 수도자로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는 교도권으로부터 부탁받은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는 즉시 고향집으로 달려가듯이 부지런히 클레르보로 돌아와 평범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계속했습니다. 그가 수도원으로 돌아올 때는 절대 혼자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를 데리고 왔는데 그의 삶에 매료된 나머지 수도생활을 선택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부자는 죄인인가?
-반영억신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3)는 말씀을 들은 한 부자가 “하느님,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의 재산 반을 당신께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재산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재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되 무엇을 버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버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상을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버린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 때문에”(루카18,29. 마태19,29) 바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얼마 전 고등학교 축구 승부조작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연관된 경기 몰수패및 해당학교의 대회출전 금지, 지도자 영구 자격정지가 선언되었습니다. 상만을 추구해서 근본정신을 잃은 결과입니다.
한 가지 때문에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때문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를 얻을 수 있는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사실 부자가 가진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이 가려 보아야 할 참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은 인간을 노예화 하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상’만을 생각하면 부정을 해서라도 일등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신, 의미, 알맹이, 즉 내용을 보면 부정한 생각을 한 순간 이미 경기에서 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부자는 죄인인가요? 사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잘 써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쪼록 많이 벌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들을 하나하나 늘려가기 바랍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버려도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쓰러지지만 착하게 살면 나뭇잎처럼 피어난다”(잠언11,28).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지 않으면 결국은 하느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누리려 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됩니다. 부디 모든 것을 얻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의 물질에 매여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에서 보아야 구원의 길이 보입니다. 내 잣대가 아닌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의 모두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삶의 변화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이 말씀의 뜻은, “부자는 부자인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여기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불가능한 일’을 뜻합니다.
(낙타와 바늘구멍에 관한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를 가끔 보는데,
그런 해석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변질시킨 해석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느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내려 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3).”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5).”
재물이든지 권력이든지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그런 것들을 하느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묵시 22,15).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부자들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을 싫어하셨나? 또는 미워하셨나?”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싫어하신 것은, 부자들이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이지, 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 분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특별히 더 사랑하셨다.” 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말도 정확한 말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셨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부자들보다 더 사랑하신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사실은 사랑의 방식이 조금 달랐음을 나타내는 장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없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셨고,
부유하고 힘 있는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꾸짖는 말씀을 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차별도 아니고, 역차별도 아닙니다.
위로의 말씀도 사랑이고, 꾸짖는 말씀도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인데,
각자에게 맞는 방식을 선택해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부자는 부자인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은 무조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은 부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물이 하나도 없더라도,
그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가 될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부자들은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5-26)”
유대인들은 재산이 많은 것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런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조금씩은 그런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복을 누린다.’, 또는 ‘복을 받았다.’ 라는 말 속에
그런 사고방식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재산이 많은 것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실제로 재산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그 사람도 역시
바늘구멍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라면 마귀의 유혹인가?
또 가난이 하느님의 축복인가?
모든 부자가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그래서 마치 재물을 섬기는 것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가진 재물은 마귀의 유혹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 자체는 하느님의 축복이 아닌데,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이 더 풍성하게 내린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축복과 은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안 믿는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안 보이고, 믿는 사람들 눈에는 보입니다.)
“나는 재벌급 부자가 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날마다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고
돈을 모으고 있다. 이렇게 살았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라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질문의 답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성실하게 노동을 하는 것은 ‘선(善)’입니다.
모든 사람이 가난해지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목표가 아니라,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 목표입니다(사도 4,34).
사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모든 사람이 풍족하게 사는 나라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의 뜻은, “부자는 부자인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재물에 대한 애착심과 집착을 버리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입니다.
(이 말씀은 가난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은 아니고, 재물에 대한 애착심과
집착을 버려서 재물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 애착심과 집착을 버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닌데,
그 일도 역시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께만 의지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영원한 갈증
-이종훈신부-
재물은 나쁘지 않지만 그것에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기면 하느님과 멀어지게 된다. 사는데 이러저러한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들 중에는 꼭 필요한 것도 있고, 있으면 좋고 없으면 조금 불편한 것들도 있고,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은 것들도 있다. 그러니 꼭 필요한 것들만 가까이 두고 살면 좋겠다. 그러면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 테니까.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고(마태 6,21), 여기서 나의 선행과 희생에 대한 칭송과 보답을 받으면 저기서 하느님께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마태 6,2.5). 오른손이 하는 선행을 왼손도 모르게 하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골방에 들어가 마음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주님을 만난다. 사는 데는 이것저것이 필요하고 마음을 나눌 친구도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깊은 갈증을 해소시킬 수는 없음을 안다. 그래도 내가 살 수 있게 하고 잠시 쉬고 위로해주며 그리고 하느님을 더 갈망하게 도와주니 고맙다.
하루를 힘겹게 살고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이웃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사치스럽게 들릴지 잘 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이 배불리 먹이시는 이들을 그들에게로 보내신다.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며 그들의 좋은 벗이 되라고 보내신다. 당신이 그렇게 하시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우리를 보내신다.
영화에서 그리고 가끔 실제로 인생역전과 성공신화를 이룩한 사람들을 본다. 그건 말 그대로 영화에서나 있는 일이고 실제로 그런 사람은 매우 적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확률은 거의 없다. 인생역전을 이루거나 개천에서 나온 용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도되는 이들도 잘 살펴보면 그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거나 그렇게 되기 좋은 배경이 이미 있었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 실망한다면 마음이 아직도 이 땅에 붙들려 있다는 증거일거다. 확률이 약 800만분의 1인 로또 1등에 당첨되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마음과 비슷하다. 세상 삶은 지나가고 하느님의 품은 영원하다. 여기서부터 영원한 세상을 알고 마음에 품고 산다면 잠시 지나치는 이 세상살이도 행복할 것이다.
예수님, 주님은 저희에게 아버지 하느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몸인지라 이 땅의 세상살이가 아주 익숙한데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주님 계신 곳을 그리워합니다. 아마도 땅을 지으실 때 흙속에 그 갈증을 섞어 넣으셨나봅니다. 오늘도 그 갈증을 따라 살고자 하오니 이끌어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를 주님의 길로 인도해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9,23-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고 하신다. 여기에서 낙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 낙타는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 바늘구멍이 낙타의 거대한 몸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져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정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신 말씀이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신 것이다. 낙타와 바늘귀의 예가 그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한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즉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6절)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27절) 베드로가 그렇게 물은 것은 우리 모두가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물었던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어떤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큰 사랑으로 완전히 버린 분들이다.
“너희도 열 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28절)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부족하고 죄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결하리라는 뜻이다. 그분을 따르는 것은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배”는 하늘 나라에서 누릴 상급을 의미한다. 현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 26)
-한상우신부-
집착과
소유사이에
점점 좁아져가는
바늘귀와 같은
우리마음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이와같이
한계도 끝도
없습니다.
영원히 움켜쥘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우리의 생명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조차 깨닫지
못하게합니다.
마음과 영혼의
눈마저 멀게 만듭니다.
집착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자유로
나가야합니다.
하늘 나라는
더 많이
자유로워지는
나라입니다.
내려놓아야
만나게되고
움켜쥔 그것마저
나누어야 비로소
드러나고 넓어져가는
하늘 나라입니다.

-오상선신부-
슬퍼하며 떠난 부자 청년의 뒷모습을 씁쓸히 바라보며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마태 19,23)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가 단순히 돈과 재물이 많은 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압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일 것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느님 사랑에는 목숨까지 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좋다는 건 다 챙겨도 하느님을 소유하는 데는 별 열의가 없어 하느님과 그 어느 것도 맞바꿀 마음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지요.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집은 살 곳을, 토지는 노동과 식량의 터전을, 가족은 역사를 잇는 구성원을 가리킵니다. 삶의 근본 요소들이라 할 수 있죠.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해 이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과 다를 바 없겠지만,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깨달은 이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성녀 아빌라의 데레사).
백 배로 돌려받는다는 말씀은 모자람 없이 아쉽지 않게 충만히 되돌려받는 완전한 보상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함으로써 그가 무엇을 바쳤든, 바친 것은 물론 그 이상의 것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전부"를 지니시고 오셔서 그와 하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
서열과 우선순위가 중요했던 제자들을 위한 말씀이지만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이지요. 하느님을 위해 버린 종류와 양, 정도의 가치매김은 세속적 시각과 상당히 다르리라는 뜻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도 자기와 타인의 희생과 봉헌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 가치는 오로지 하느님만 아십니다.
제1독서는 판관 기드온의 부르심 장면입니다.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판관 6,15)
미디안족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소명에 기드온이 이처럼 고백합니다. 허세도 비하도 없는, 겸손하고 진실된 자기 인식이 명징합니다. 그저 솔직담백합니다.
겉 꾸민 재산을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 설 때 이렇게 됩니다. 사실 자신의 부족함을 가리기 위해 인맥과 경력, 명품과 은행 잔고, 학력과 거주지를 내비치며 은근히 높게 평가되기를 바라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지요. 집과 가족과 토지 등 나를 치장하던, "나"가 아닌 것들(사실 하느님의 것들)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약하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내비칠 수 있는 이는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기드온이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듯 보이면서도 주님의 천사에게 묻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주님의 이름 때문에 유형 무형의 재물을 다 내려놓고 가난하게 된 이는, 우리 때문에 가난하게 되신 하느님의 부유함을 대신 돌려 받습니다. 주님과 우리가 부유함과 가난을 서로 맞바꾸면서 구원으로 나아갑니다. 스스로를 작고 약하고 보잘것없다고 가식없이 고백할 수 있는 이는 자기가 작고 약하고 보잘것없음을 아는 덕에 하느님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너의 그 힘을 가지고 가서 ...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판관 6,14) 오늘 벗님에게 하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고통과 사랑이 짝이 되게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는 판관기의 기드온에 관한 얘기입니다.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고 아주 매력적인 얘기인데
지금까지 저는 한 번도 기드온 얘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얘기는 주님의 천사가 기드온을 주님의 용사라고 부르며 나타나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고 얘기하며 아주 기를 북돋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용사라는 말이나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이
전혀 자기에게 맞지 않는 얘기인 것 같고 특히 자기 민족에게는
더더욱 그런 것처럼 느껴졌는지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
이 질문에는 두 가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면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것과
그러니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거라는 점입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자주 하니 이런 질문 아주 친밀한 주제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고통이 없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고통은 있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오히려 고통이 더 많고 더 큽니다.
성인들을 보면 알 수 있고 성 마리아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고통만 있지 않고 당신도 함께 있다고 하시고 그러니 우리도
고통과만 있지 말고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으라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디고 이겨낼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제도 그리고 전에도 수없이 말씀드렸듯이
고통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조건이기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건 아니 계시건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자녀를 너무도 사랑하지만 고통을 없애줄 수 없고
다만 자녀의 고통에 사랑으로 함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알기 전과 비교할 때 천양지차입니다.
첫 번째 차이이고 제일 큰 차이는 고통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차이이고
그래서 고통을 무조건 거부하던 것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심지어는 감수甘受, 곧 달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받아들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랑 때문이고 사랑으로 함께 계신 하느님 때문입니다.
요즘 고통은 별로 크지 않은데 조그만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영혼들을 보면 한심스럽기도 하고 가엾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사랑 없이 너무 큰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은 없이 너무 사랑만 유아적으로 받았기 때문인데
사랑하기에 부모들이 자식을 너무 고통을 모르게 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고통과 사랑이 꼭 짝이 되도록 키워야 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사랑이 고통의 짝이 되게 해야 최고입니다.
고통 중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체험을 한 번이라도 한 사람은
단단해져 그래서 고통보다 더 한 것, 곧 죽음이 올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기드온은 하느님의 두려움 없는 용사가 되기 전에 그 하느님 체험을
하는데 우리도 하느님의 용기 있는 전사가 되기 위해 먼저 하느님 체험을
해야 함을 깨닫기도 하고 정성껏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22일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