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2019년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주님,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15,21-28)
"Please, Lord, for even the dogs eat the scraps
that fall from the table of their masters."
Then Jesus said to her in reply,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찰한 뒤 이스라엘 자손들이 투덜거리자,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하고 광야에서 최후를 맞을 것이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강아지에 비긴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딸을 고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주님 앞에서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고, 이집트를 빠져나오고 몇 달 뒤에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분부에 따라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찰하라고 보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지만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쳐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과 장해에 골몰하며 실망에 빠져 “밤새도록 통곡”합니다. 이는 자신들의 소심함에 따른 슬픔의 눈물입니다.주님께서는 깊은 상처를 준 당신 약속에 대한 이런 믿음이 백성에게 부족함을 참지 못하십니다. “너희가 저 땅을 정찰한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 “악한 공동체”에 속하면서 하느님께 투덜거리는 사람은 누구도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불신에 따른 처벌입니다.오늘 복음은 가나안 여인의 뛰어난 믿음의 본보기를 보여 줍니다. 그는 주님의 은총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마귀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에도 그분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은 당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충만한 가나안 여인처럼 하느님의 자비하심에서 오는 은총을 얻고자 우리는 끊임없이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경상도의 어떤 성지를 찾아 가는데 그날이 가장 더운 날이었습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정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운 날 이게 무슨 고생이야?’하면서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장소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이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꼭 가고 싶었지만 기회가 되지 않아서 가지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이곳에서 관광을 하면서 전부터 가졌던 바람을 하나 채울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길도 생각지도 못한 좋은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잘못된 길은 나쁜 길이라고 고정을 시키려고만 합니다. 사실 우리의 삶 안에서는 잘못해서 간 길이 오히려 좋았을 때가 더 많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좋을 것입니다.
원하는 대학이 있었지만 다른 대학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원하지 않는 대학에 들어간 것을 ‘미래가 없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자신의 인생이 끝장난 것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안에도 분명히 밝은 미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길이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참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리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부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유대인들이 멀리하는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을 구원의 반대편에 있다고, 그래서 잘못된 길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잘못된 길 안에서도 구원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강아지로 표현하는 모욕적인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구원의 기쁨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누가 어떤 행동을 해도 구원의 기쁨에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을 보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찰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길에 있다고 힘들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찾는 믿음이 분명히 내 삶을 기쁨과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서 정말로 무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텔레비전의 어떤 프로를 보고서였지요. 이 프로가 너무나 무서워서 화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을 꾹 감고 있었고, 때로는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그 장면을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마 이 프로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바로 1970년대 후반에 보았던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입니다.
컬러텔레비전이 아닌 흑백텔레비전으로 볼 때였습니다. 특수효과도 조잡했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도 너무나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봤던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더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우연히 텔레비전의 어떤 프로에서 당시의 큰 인기를 끌었던 그 무서운 장면을 잠시 보여주더군요. 무서웠을까요?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습게만 보였습니다.
지금의 고통과 시련이 내게 가장 두려운 순간으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두려움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 순간을 떠올리면서 ‘겨우 이거로 힘들어 한 거야?’라면서 웃게 될 것입니다.
지금 어려워하시는 분들... 모두 힘내십시오. 웃을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발끈하지 않으려면
-전삼용신부-
시골에서 홀로 사시는 어머니를 뵈러 밤늦게 아내와 두 아들을 트럭에 태우고 달리던 중 음주 차량에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아내는 목이 뒤로 꺾이며 간신히 생명은 건졌지만 전신마비가 됩니다.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는 무보험자였습니다.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처가가 나섰지만 처가도 파산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아내를 트럭에 싣고 호떡 장사를 시작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환경미화원에 지원하여 젊은이들을 제치고 1등으로 취직합니다. 하지만 새벽부터 출근해야 하는 직업인지라 아내가 문제였습니다. 정부가 지원해주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힘들었습니다.
아내는 매우 깔끔한 성격이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댔습니다. 설거지를 해놓으면 “좀더 깨끗하게 해라”, 바닥 청소를 해놓으면 “다시 해라”라는 식으로 간섭했습니다.
“시집살이가 따로 없었지요. 너무 힘들고 지칠 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나 그는 20년 넘게 매일 꿋꿋하게 아내의 얼굴을 닦아주고, 양치질을 시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밥을 먹여주고, 잔심부름을 해주며 아내를 잘 돌보고 있습니다.
강연 100°C에 나와 전신마비 아내를 돌보는 이야기를 한 김동덕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의 그런 참을성은 어디서 나올까요? 그의 강연 제목은 “나와 아내와 당나귀”입니다. 자신과 아내만이 아니라 당나귀를 제목에 넣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에게 온유하게 대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당나귀’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산골에서 살았고, 어머니는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종일 일하러 나가셨기 때문에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가 대화하고 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동물들이었습니다.
커서도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동물이 당나귀였습니다. 가격도 싸고 키우기도 쉬워서 새끼 당나귀 두 마리를 분양받았습니다. 처음엔 말을 잘 안 들어 애를 먹었지만, 자주 쓰다듬어주고 사랑을 베풀자 사람처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내 병수발에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당나귀들을 찾아가 하소연하였습니다.
“제가 ‘얘들아~’ 하고 부르면 당나귀들이 제게로 달려와요. 그리고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죠. 제 말을 듣고 정말 이해한다는 듯이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해요. 하하하.”
그가 20년간 아내에게 그렇게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나귀라는 돌파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혼자 힘만으로는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예수님께 은총을 청합니다. 딸이 마귀가 들려 고생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경우와는 다르게 그 여인의 애를 먹입니다. 계속 청해도 들은 채 만 채 당신 갈 길을 가십니다. 여인은 참으로 무시당하는 기분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까지도 빨리 치유해 주어 돌려보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위해 파견되었다고 하시며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안 들어주시면 되지 자신을 쫓아오는 여인을 개 취급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셨을 텐데도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 여인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자아가 비워진 만큼 그 안에 믿음으로 찹니다. 아니 오히려 믿음이 자아를 그만큼 밀어내고 죽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대한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그 여인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을 완전히 비웠다는 것을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하며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칭찬해 주십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 때 발끈한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믿음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그만큼 크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크기는 자아의 크기에 반비례합니다. 자아가 죽을수록 믿음이 완전해집니다. 온유한 사람일수록 더 큰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아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김동덕 씨가 끓어오르는 자아의 불만족을 당나귀를 통해 죽일 수 있었듯,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에 대한 감동으로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자아를 죽이는 만큼 믿음이 커지고 믿음이 커지는 만큼 주님은 나의 뜻을 따라주십니다.
나의 자아를 죽이는 힘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이 나를 감동시켜 다른 것들은 거뜬히 참아낼 수 있게 합니다. 이 성령이 오게 하는 시간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 사랑에 더욱 감동할수록 더욱 주님을 알게 되고 더욱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매일 주님의 사랑에 감동받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드님까지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 자아를 죽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존재의 이유를 찾은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와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4주년을 앞둔 지금,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너무나 현격한 태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독일 지도자들은 매년, 아니 기회 닿는 대로, 피해를 입은 이웃 나라를 찾아가 눈물로 사죄하고 있습니다.
“사망자를 기리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독일인과 독일의 이름으로 피해자들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큰 부끄러움을 느끼며, 진심으로 용서를 청합니다. 저희가 희생자들의 묘소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여러분들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 독일이 저지른 범죄는 사죄나 배상으로 완전히 지울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압니다.
과거는 지울수 없기에 계속 사죄를 하고자 합니다. 사죄는 많이 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죄의 진정성은 계속 전달되어야 합니다. 피해국들에 대한 사죄는 현재와 미래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피해국의 세대도 교체됩니다. 사죄는 과거를 모르는 새로운 세대에게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반면 아베의 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안그래도 쓰라린 우리들의 가슴에 굵은 소금을 계속 뿌려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망언들을 계속할 수 있는지, 그의 사고 구조, 뇌구조를 세밀히 분석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세계 역사 기록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는 침략과 강점, 강제 징용과 위안부 존재 조차 부인하니,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따로 없습니다.
“침략의 정의는 학계나 국제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위안부는 강제 납치되어 온 사람들이 아니고 돈 벌려고 온 직업여성들입니다. 한국은 어리석은 국가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미 종지부를 찍은 한일청구협정을 한국이 일방적으로 위반하고 있습니다. 국교 정상화의 기반이 된 국제 조약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굴욕적인 대일 외교를 말끔히 청산하고 진정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대법원이 내린 강제 징용에 대한 배상 판결은 그런 흐름의 한 과정입니다.
일본은 1965년 졸속으로 처리된 한일청구권 협상으로 과거사가 다 해결됐다는 입장입니다. 독일은 전쟁 피해국들과의 협약을 관계 개선을 위한 기회로 보는데 비해, 일본은 협약 하나 맺었다고 모든 것이 이제 끝났으니, 더 이상 과거사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입니다.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소양과 양심을 갖춘 독일 지도자들의 진정성 있는 반성의 목소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꽃다운 우리 소녀들의 동심과, 우리 청년들의 미래를 처참하게 짓밟은 일제 군국주의의 잔혹한 만행은 3억불, 5억불, 8억불이 아니라 천억불을 줘도 부족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잔혹한 범행은 배상금만으로 해결될 일도 결코 아닙니다. 진정성있는 사죄가 매년, 매번, 틈만 나면, 아침에 눈만 뜨면 반복되어야 마땅합니다. 특히 피해 당사자들에게 직접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한국 사법부가 내린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을 아베가 극구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배상을 인정하면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긍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독일은 끊임없이 과거사에 대해 사죄를 거듭합니다. 독일 지도자들은 피해국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관련 행사가 있으면 빠짐없이 참석해서 고개를 숙이고 헌화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진정성있는 사과 앞에 주변 국가들도 무릎꿇은 참회자들의 어깨를 두드려줍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사를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감추고자 기를 쓰며 군국주의 국가로 회귀를 꿈꾸는 아베 정권과는 무척이나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아베는 지금 잠자고 있던 군국주의 유령들을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군사대국으로서 태평양을 주름잡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강력히 대응하지 않으면 또 다시 어떤 문제를 야기시킬지 그 누구도 알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마귀 들린 딸의 치유를 간절히 청하는 가나안 여인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여인이 처해있던 상황은 너무나 절박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마귀에 들려도 호되게 들렸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으며, 증세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딸 죽겠구나!’하는 생각에 젖먹던 힘까지 다내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마태오 복음 15장 22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신앙을 좀 더 성장시키기 위한 마음에서 살짝 뜸을 들이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오 복음 15장 24~26절)
꽤나 모욕적인 말씀 앞에 분노하고 포기할만 한데도 가나안 여인은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오 복음 15장 27절)
가나안 여인의 딸을 향한 극진한 모성애, 당신을 향한 강한 신뢰심과 믿음에 탄복한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오 복음 15장 28절)
오늘 백척간두에 선 우리나라, 우리 백성에게도 꼭 필요한 마음이며 믿음입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다
-반영억신부-
우리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드러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마태15,21)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 이방인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끝까지 간청하였고, 마침내 응답을 얻어냈습니다.“믿음과 겸손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겸손함이 배어있는 믿음만이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함께야).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을 잘 찾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안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지킨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주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원의에 대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안봉환신부-
오늘 독서는 주님 앞에서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고, 이집트를 빠져나오고 몇 달 뒤에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분부에 따라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찰하라고 보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지만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쳐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과 장해에 골몰하며 실망에 빠져 “밤새도록 통곡”합니다.
이는 자신들의 소심함에 따른 슬픔의 눈물입니다.
주님께서는 깊은 상처를 준 당신 약속에 대한 이런 믿음이 백성에게 부족함을 참지 못하십니다.
“너희가 저 땅을 정찰한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
“악한 공동체”에 속하면서 하느님께 투덜거리는 사람은 누구도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불신에 따른 처벌입니다.
오늘 복음은 가나안 여인의 뛰어난 믿음의 본보기를 보여 줍니다.
그는 주님의 은총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마귀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에도 그분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은 당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충만한 가나안 여인처럼 하느님의 자비하심에서 오는 은총을 얻고자
우리는 끊임없이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먹기
-이종훈신부-
이스라엘은 기적적으로 이집트 노예생활을 탈출하고 그 이후 40년 동안 많은 시련과 갈등을 겪으며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것들의 최종목적지,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앞에 섰다. 그런데 그곳을 정찰하고 돌아 온 이들의 평가는 일치했고 또 달랐다.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강했다(민수 13,28.31). 그들이 강하지만 이길 수 있다는 이들(민수 13,30)과 이길 수 없다는 이들(민수 13,31)로 갈라졌다.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들은 강했을 것이 분명하다. 정착생활을 한 이들과 노예생활을 하다가 40년 떠돌이생활을 한 이들은 비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에 비해 열등했을 것이다.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무모해보이고 이길 수 없다고 한 이들은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예고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 그대로였다.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바로 이 광야에서 너희는 시체가 되어 쓰러질 것이다(민수 14,29).” 이길 수 없는 마음은 이길 수 없고, 이길 수 있다는 마음은 이길 수 있다. 이것은 의지력과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40년 동안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하느님을 믿느냐 못 믿느냐이다.
가짜뉴스, 억지주장, 폭력, 부정한 거래 등으로 작은 시민들이 고통을 겪는다. 그들은 연단에서 눈 깜짝하지 않고 마이크에 대고 거짓을 외친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반면 진실과 공정을 외치는 이들은 그들에 비하면 오합지졸 같다. 그들은 힘도 무기도 규율도 없다. 진실과 공정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여기저기서 모여 외치다가 흩어진다. 그게 다다. 진실과 공정이 거짓과 폭력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다. 아니 이긴다. 이 싸움은 힘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선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선(善)의 힘을 믿느냐 못 믿느냐, 하느님을 믿느냐 못 믿느냐이다. 이길 수 없다는 마음은 그 자체로 이미 패배자이고 이길 수 있다는 마음은 이미 승리한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참 빛이신 주님, 세상의 어두운 일들로 마음도 자꾸 어두워집니다. 비난하고 낙담하며 체념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립니다. 이때야말로 진정으로 믿음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 믿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아니라 희망과 신뢰를 버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믿음이 약한 저희를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5,21-28: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 가셨다. 그래서 소외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 거기에서 한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절)라고 외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셨는데,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분을 이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한다.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어머니다. 이 여인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다.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주님께 애원한다. 딸이 우상숭배와 죄로 길을 잃고 호되게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신다. 그것은 그 여자로 하여금 더욱 절실하게 소망하도록 만들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다.
이 여인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여인은 이방민족이었지만,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여인은 율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청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 잡힌 이방민족들인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동정심이 생겨 예수님께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하고 답하신다. 예수님은 먼저 당신이 세상에 오심, 기적 그리고 당신 부활의 권능을 먼저 유대인들에게 드러내시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얻으시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여인이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녀”로 이방인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셨지만, 여인은 곧바로 유대인을 “주인”이라고 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라고 말한다. 이 여인은 이렇게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리고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을 지닌 백인대장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에 모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라고 하셨다.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우리도 청하여야 한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 27)
-한상우신부-
간절함이
기도입니다.
간절함이
사랑입니다.
부스러기의
간절함이 하늘을
울립니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의 생명이란
간절함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간절함이
우리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간절함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간절함으로
만나게되는
은총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함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간절함으로
위로하여 주십니다.
간절함으로
우리의 삶은
진실된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믿음의 방향은
간절함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간절함이
우리자신과
우리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어느 누구의
간절함의 기도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시대적 배경이 크게 차이 나지만 공통적으로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이의 긴장을 담고 있습니다. 곧 야훼 신앙과 가나안 이교 신앙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갈등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마태 15,21-22)
티로와 시돈은 이교지역으로,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지역,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실 때 언급하신 고을들이지요.(마태 11,20-24 참조) 거기에서 한 가나안 부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호되게 마귀가 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15,22)
다윗은 가나안 여러 민족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영토와 왕정을 굳힌 임금입니다. 그런 다윗의 후손에게 가나안의 한 여인이 희망을 걸고 자비를 청합니다. 그녀는 자기들의 신 바알에게 딸을 치유할 힘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그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우리가 아는 착한 목자의 답이라 보기엔 상당히 까칠합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요즘 문제가 되는 자국(자민족) 이기주의, 민족 차별주의와 비슷한 냄새마저 풍깁니다. 주님의 자비는 경계가 없는데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마태 15,25)
말을 못 알아듣는 게 아닐텐데 그녀는 거절 비슷한 완곡한 표현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시 청합니다. 딸의 구원을 위해 못 할 것이 없는, 참으로 절박한 어머니의 심정이 느껴지지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수위가 점점 높아집니다. 급기야 그녀와 그녀의 딸, 곧 이교도인들은 강아지에 비유하신 겁니다. 그녀로선 모멸감과 분노를 충분히 느낄만한 상황이 전개되어 갑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그런데 그녀는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재차 청을 드립니다. 먼저 온순히 동의하며 충분히 예수님을 존중해 드린 후, 계속 졸라댑니다.
"주인!" 이 안에 담긴 여인의 진정성이 결정적 전환을 이루어냅니다. 사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요. 바알은 농경 문화 안에서 풍요와 다산을 주관하는 신으로 "바알"이라는 이름 자체에 "주인"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비유 속 "자녀"들의 아버지를 "주인"이라 먼저 고백한 것입니다. 그녀는 들리는 소문에 꽤 솜씨가 좋다는 유다인 치료사를 한 번 떠볼 목적으로 온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네 신(주인) 바알을 능가하는 진정한 신의 이름을 믿고 그 이름에 희망을 걸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예수님의 꾸밈없는 감탄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분은 절박한 이교 여인 앞에서 터져나오는 탄성과 치하의 속내를 감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알아 주십니다. 이 말씀 안에는 그녀의 딸은 물론 여인의 긴장된 마음을 녹여 주는 순수한 사랑이 철철 흐릅니다. 어쩌면 거절과 반복된 간구로 숨가쁘게 오간 대화는 제자들과 군중, 그리고 오늘의 우리를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는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전 주님의 명령으로 미리 가나안 땅을 정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각 지파에서 차출되어 사십 일간 정찰을 다녀온 "수장"들의 보고는 매우 비관적이고 회의적입니다. 세상의 언어로는 "긍정성이 결여된 시각"이고, 신앙의 언어로는 "믿음이 없는 시각"일 겁니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민수 13,30)
다행히 모두가 그런 게 아니어서 칼렙과 여호수아가 백성을 독려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이미 가나안의 과일, 가나안의 사람들, 가나안의 신들에게 주눅이 들어버린 백성은 "소리 높여 아우성치고 밤새 통곡"(민수 14,1 참조)합니다. 어둠에 질식된 그들은 빛을 향해 숨을 들이쉬려 하지 않고 더 깊고 짙은 어둠을 택해 매몰되어 갑니다. 어둠은 전염성이 크기에, 집단 의식도 한몫 했을 거라 짐작됩니다.
최고로 좋은 선물을 준비해 놓으시고 백성이 기뻐할 모습을 기대하시며 한껏 부풀어 계셨을 하느님께서 많이 실망하십니다. 당신의 동행과 권능을 싸그리 무시해 버리고 스스로 구렁에 들어앉은 백성들의 불신과 패배주의로 받으신 상처는 참혹합니다. 그래서 아프고 슬픈 말씀을 던지시지요."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 14,28)
사실 이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여인을 치하하며 하신 말씀,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라는 내용과 결과는 천양지차였지요. 불신의 악담을 퍼붓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사십 년을 떠돌다 죽어갈 것이고, 믿음으로 매달렸던 여인은 바라던 딸의 치유와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힘과 풍요에 지레 겁을 먹고, 그 땅을 약속하신 하느님께 신뢰를 드리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과, 당신 손수 뽑으신 백성에게 무시당하신 하느님의 관계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겸손을 기꺼이 받으시고 사랑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에게서 회복됩니다. 번번이 가나안의 우상에게 당신 백성의 마음을 갈취당하셨던 하느님의 상처는, 스스로 아버지 하느님은 "주인"이라 부르는 가나안 여인의 마음을 통해 아물었으리라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 안에서 믿는다면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희망하는 바는, 주님 "귀에 대고 한 말을 반드시 그대로 해 주시는" 그분의 능력으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과 바람과 기도가 어떠해야 할지 오늘의 말씀들은 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마태 15,27)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민수 13,30)
어떠한 처지에서도 이렇게 고백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힘은 없지만 믿음이 있는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4995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9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