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Margaret K 2019. 8. 5. 19:08

2019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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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오 17,1-9)

 

 "This is my beloved Son, 
with whom I am well pleased;
listen to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연로하신 분이 옥좌에 앉으시는데,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는데, 그분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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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모든 이의 재판관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연로하신 분으로 나타나, 세상의 주인인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왕권을 주시는 환시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종”으로서 겪으시는 수난 때에, 장차 영광스러운 심판관으로 오시는 “사람의 아들”의 표상을 당신 자신에게 부여하며 완성하실 것입니다.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모세와 엘리야가 나누는 거룩한 대화 내용을 전해 주는 루카 복음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을 목격한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십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에서 죽음의 고뇌를 겪으시기 전에,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를 거두신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 제자들은 장차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목격하고, 믿음의 순수함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이때 말씀과 행위에서 능력에 찬 예언자들이며, 장차 오시기로 한 메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주님께서 세상을 떠날 일을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메시아의 예형과 그림자로서 율법을 나타내고, 엘리야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인물로 예언을 나타냅니다. 둘 다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십니다.곧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며, 이는 하느님께서 성경과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오래 전부터 밝혀 주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탈출은 당신의 떠나가심, 곧 당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구원자의 수난은 특별한 찬양의 대상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분으로부터 자신이 어렸을 때 겪었던 힘들었던 일들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힘든 시간이었겠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이야기였고, ‘나 같으면 도저히 이겨내지 못했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과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더군다나 웃음까지 지으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었는데, 마치 남 이야기하듯이 말씀하시네요?”

이 말에 웃으면서 말씀하십니다.

“글쎄 말입니다. 당시에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였는데, 지나고나니 별 일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마 그 상황을 겪고 난 후에 더 강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 분께서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을 가지고서 이겨내시기에 점점 더 강해지는 자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는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할 수 없어.’라는 마음가짐을 가졌을 때, 또한 지금을 포기할 때에 변화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더 나아지는 나를 희망하면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즉, 주님께서 수난을 앞두시고 제자들 앞에서 당신의 신적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주님께서는 이제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지요. 사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만 앉아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의 길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이 영광스러운 모습은 이렇게 고통과 어려움을 동반하는 당신의 수난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원하신 그 길을 거부하지 않으셨기에 영광스러운 변모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모습을 따르라고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 그 길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아픔과 얼마나 많은 고통을 체험합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그 길을 피하고 포기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제발 이 길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기도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가 주님의 모습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그 결과 보여주신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이 모습을 나의 행동으로 실천할 때, 우리들의 모습 역시 예수님처럼 환하게 빛나는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의 위기는 내일의 농담거리다(H.G.웰스).



마음가짐

모든 것은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자주 깨닫습니다. 매주 제 아버지께서 입원해 계신 병원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옵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매주 왕복 2시간이 넘는 길을 다녀온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더군요. 더군다나 성지에서의 바쁜 일을 마치고 다녀오게 될 때에는 피곤함이 가득합니다.

지난주에도 병원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다시 성지로 돌아왔습니다. 너무 피곤했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있지만 몸은 꼼짝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주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커피 나오는 시간이 무료해서 아무 생각 없이 주방에 있는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만 1시간 넘게 그 안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텔레비전이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본 것입니다.

이 프로가 끝난 뒤에 후회가 밀려듭니다. ‘할 것도 많은데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했구나.’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문득 이 1시간 동안 피곤함도 잊고 실컷 웃으면서 즐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생각지도 않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이었지요.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삶은 지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라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아닐까요?                   

'관계'가 남는 만남

-전삼용신부-


공동생활을 오래했던 한 수사 신부님이 이탈리아의 한 공동체를 방문했습니다. 4백 명이 함께 공동 생활하는 곳인데 서로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매일, 아침이나 저녁이나 따뜻하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공동생활의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답니다.

      “어떻게 이런 신선한 사랑을 매일 나눌 수 있습니까? 서로 지겹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들은 매일 아침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게 하소서.’”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즐거울까요, 긴장이 될까요? 당연히 긴장이 됩니다. 그리고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이미 나의 사람이 되었다고 편하게 생각하면 막 대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혹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함으로써 상대에게 부담을 줍니다. 그렇게 관계가 소원해지게 됩니다.

      정채봉씨가 쓴 에세이집에 ‘만남’이란 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작가는 여러 가지 만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가장 잘못된 만남이 생선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만남은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으로 꽃송이 같은 만남을 듭니다. 피어있을 때에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남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어떤 만남일까요? 그것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크게 보자면 오래 지속되는 만남과 빨리 끝나버리는 만남, 이렇게 딱 두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오래 지속되는 만남엔 ‘눈물’이 있습니다. 이 눈물이 마냥 기분 좋은 눈물만은 아닐 것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감싸주기 위한 눈물이요, 나를 사랑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눈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래 가는 만남은 내가 즐겁기 위한 만남이라기보다는 상대를 즐겁게 해 주는 만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누군가를 만날 때 힘이 든다면 잘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즐겁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힘들면서도 즐겁다면 잘 만나는 것입니다. 즐겁기만 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이익을 얻기 위해 만난다면 그 사람과의 만남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위한 만남은 많은 참아냄이 필요합니다. 매번 처음 만나는 것처럼 긴장해야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사람을 만날 때 즐겁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을 만날 때 힘이 들면 만나도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 때문에 하느님께 죽여 달라고 청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에게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남이 좋은 만남입니다. 엘리야는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과 만났습니다. 심지어 삼년 반이나 그들을 피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에게서 바알 예언자들을 죽여 이스라엘을 정화하였습니다. 이런 만남이 좋은 만남입니다.

      마냥 즐겁기만 하다면 나중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힘이 듭니다. 그래서 좋은 만남인 것입니다. 자녀가 나이든 부모와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만남이 남는 만남입니다. 그래서 힘이 든다면 계속 만나야합니다. 그래야 나도 발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도에도 적용됩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나를 죽이기 위해 기다립니다. 나의 피를 빼내시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도 그런 하느님을 만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도 나를 만나시는 것이 힘이 드십니다. 당신의 피인 성령을 주셔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피를 흘리는 만남이기 때문에 오래 가는 만남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자들은 아직 이 만남을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영광 속에서만 머물려하고 피를 흘리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순교해야 함을 더욱 확고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성경을 뜻합니다. 성경 말씀은 바로 ‘탈출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오늘 복음에서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라고 하듯이 ‘나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영광만을 위한 기도가 얼마나 기도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지를 알아야합니다.

      부모를 만나 자신을 크게 만들려는 사람이 있고, 부모를 만나 자신을 작게 만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를 만나 자신을 크게 만들려는 사람은 부모를 이용하는 사람이고, 부모를 통해 자신을 작게 만들려는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관계가 진정한 관계인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신의 뜻에 따라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기도이고 어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며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하시며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기도한다면 주님께서는 그런 영광은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나를 죽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 키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나면 반드시 내가 조금 더 주님의 뜻에 죽어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우리 얼굴도 주님처럼 변모되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단의 분위기는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전무후무·사상초유의 대 기적 앞에 제자들의 입은 떡 벌어졌으며, 이런 분을 자신들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철철 흘러 넘쳤습니다.

 

 때를 놓칠세라 성격 급한 수제자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에 앞서 장엄한 신앙고백까지 했습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복음 9장 20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잔뜩 들뜬 제자단의 분위기를 즉시 가라앉히십니다. 조만간 도래할 메시아로서의 슬픈 운명, 고통스런 최후에 대해 가감없이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복음 9장 22절)

 

 한껏 업되었던 분위기는 즉시 가라앉았으며 싸해졌겠지요. 제자들의 그런 모습이 짠하셨던지, 위로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루카 복음 9장 27절)

 

 그런데 그 예언의 말씀은 8일 후에 곧바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사도들 가운데서도 최측근 제자들 세명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 사도를 데리고 타볼산으로 오르십니다.

 

 찰라의 순간이었지만 세 사도는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스승님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아주 살짝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왜 하필 타볼산일까요? 산은 구약시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계시를 접하던 장소였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산은 곧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라는 위대한 현현은 우리에게 장차 도래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삶의 신비를 살짝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영광을 아주 조금 드러냅니다. 완전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고 그야말로 맛만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주님 나라의 모든 것을 볼 수는 없고, 파악할수도 없습니다. 다만 언젠가 다가올 결정적인 날, 주님 얼굴을 마주 뵙게 되는 날, 영광스런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명명백백하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갑작스레 영광에 싸여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두 인물, 모세와 엘리야는 왜 나타나신 것일까요? 상황 설정이 조금은 갑작스럽고 생뚱맞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더군요. 모세는 이스라엘 최고의 사제요 율법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 가장 탁월한 예언자였습니다. 두 사람의 등장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의 주인이요 주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신약 성경이 저술되던 당시 유다교 안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지상의 삶을 마친 다음 하늘나라로 승천한 인물이며, 언젠가 다시 돌아올 인물로 여겨지는 사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우리를 대신한 세 제자에게 드러난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타볼산 위에서는 아주 잠깐 하느님 나라가 드러났지만, 예수님의 영광스런 수난과 부활 이후에는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수난과 부활로 인해 일시적이었던 하느님 나라는 항구적인 것인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서, 아직 갈길이 먼 우리들이기에 세 제자들처럼 어안이 벙벙할 것입니다. 분위기 파악이 잘 되지 않아 많이 답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분을 직접 마주하게 될 그날, 그분의 수난과 영광에 결정적으로 참여하게 될 그날, 우리 앞을 짙게 가렸던 구름과 너울이 사라지고, 우리 역시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이토록 초라하고 남루한 옷을 훌훌 벗고 거룩한 주님의 옷으로 갈아 입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얼굴도 주님처럼 변모되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반영억신부- 

 

“어떤 개가 고기 한 첨을 물고서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물속에 비친 제 그림자를 본 그 개는 그것이 더 큰 고기 덩어리를 물고 있는 다른 개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속의 개가 가지고 있는 고기를 빼앗으려고 덤벼듬과 동시에 자기 입에 물고 있던 고기 덩어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이솝우화). 이 이야기는 현재 가진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욕심내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좀처럼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없는 것에만 생각합니다”(쇼펜하우어).

 

베드로 사도도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달라진 얼굴모습과 하얗게 번쩍이는 의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9,33).하고 말하였습니다.

 

 얼떨결에 한 애기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체험을 영원히 간직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욕심을 부리려면 이런 욕심을 부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차지하고 싶은 욕심 말입니다.“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 것도 원치 않습니다. 주님만을 차지하게 하소서”(예수아기의 성녀 데레사). 사실 주님은 “세상의 빛”(요한 8,12)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 속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데살5,5). 그러므로“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페5,8).

 

 그러기 위해서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9,35)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한2,3-4)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이기도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1-22).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의복이 하얗게 번쩍였다’는 것은 죽음으로써 영광스럽게 됨을 말합니다. 하얀 옷은 묵시록3,5에서는 순교자들의 옷으로 표현됩니다. 다니엘서 7장 9절에서는 ‘태고적으로 부터 계신 이의 옷’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고린3,18).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그러므로 다른 욕심은 접고 주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하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맞갖은 모습으로 바뀌어가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들어라”하신 말씀은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 걸어가야 할 수난과 죽음의 길을 동행하며 끝까지 걸으라고 제자들을 격려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삶의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끝까지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말씀 듣기

-이종훈신부-


피정 봉사자가 엉뚱한 생각을 품지 않는 한 피정은 대부분 좋다. 피정 중에 하느님을 만났기보다는 잘 쉬었기 때문일 거다. 그렇다고 거기에 마냥 머물 수는 없다. 집과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당신의 일터인 갈릴래아로 먼저 가시며 제자들도 그리로 오라고 분부하셨다(마태 28,10).

 

장보고 밥하고 청소하고 풀 깎고 이것저것 정리하니 하루가 지났다. 수도원이라고 하루생활이 뭐 특별한 게 없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거기다. 피정 봉사한다고 하지만 정작 교우들은 강의나 프로그램보다는 그날 먹은 밥을 더 잘 기억한다. 그래도 봉사자들은 잘 준비한다. 그것이 봉사자의 일이고, 피정하는 이들을 정말 쉬게 만드는 분은 주님이시다.

 

신앙은 진통제도 환각제도 아니다. 도망치고 싶은 그곳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피정은 잠시 쉬며 재충전하는 시간이다. 세 제자가 그 산에서 스승의 참 모습을 보았던 것처럼 피정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잘 본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그전에 수없이 들었던 그 말씀을 새롭게 또 듣는다.

 

기도는 말을 많이 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조용히 잘 들음이다. 그 들음은 말씀을 머리와 가슴에 새김으로 끝나지 않고 그대로 실천함이다.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구원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존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 만만치 않고 세상사가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차 내가 그리고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은 안다.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거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 말씀하소서. 이 무익한 종이 듣습니다. 그 말씀이 감동을 주지 않아도 게다가 무슨 뜻인지 몰라도 그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셔서 행복하셨으니 그 마음을 제게도 나누어주소서. 아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루카 9,29-32).”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예수님께서는 수난만 예고하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부활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 때문에 낙담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리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혼나기도 했습니다(마태 16,23).
예수님께서는 낙담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난을 당하고 돌아가시는 것으로 끝나버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생생하게 보여 주신 일, 즉 일종의 시청각교육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당신의 부활 예고 말씀이 틀림없이 이루어질 말씀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상상 속의 나라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나라라는 것을
직접 보여 주신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예수님, 모세, 엘리야가 모두 ‘영광’에 싸여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은 부활, 승천과 하나인 사건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동시에 그 모든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처음에는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데,
이 말을 제자들 자신들의 말로 바꾸면, “우리는 처음에는 그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도 못했다. 그만큼 신비스럽고 영광스럽고 황홀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분명히 우리가 직접 목격한 실제 사건이었다.”가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일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
즉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자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잠에 빠졌다는 말에서, 겟세마니에서의 일이 연상됩니다(루카 22,45).
늘 기도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어떤 중요하고 결정적인 때가 되면 특히 더 많이
기도하셨는데, 곁에 있었던 제자들은 그럴 때마다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제자들의 그런 모습이 지금 ‘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할 때, 또는 어떤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혹시 예수님께서 주무시느라고 내 기도를 못 들으시는 것은 아닌가?” 라고
의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 나는 잠만 자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를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루카 9,33).”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황홀하고 행복해서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로 곧바로 직행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또는 천국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운 곳이고,
상상 이상으로 행복한 곳이라고 표현됩니다.
그래서 아주 잠깐이라도 그곳을 엿보거나 체험한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그곳으로 가서 살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게 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라는 말은,
그만큼 황홀경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34-36).”

“이렇게 말하는데”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중간에 끊으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소망을 거절하셨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 말씀에서 ‘그의 말’은, 이 이야기 바로 앞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간절하게 희망한다고 해도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그곳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거쳐야 할 중간 과정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 사람마다 각자 자기의 인생을 끝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는 내 자유의지로 인생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생을 끝내는 것은 내 자유의지로 하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과연 그게 옳은 태도일까?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숙제처럼 주신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늘 진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께서 특별히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 살아가면서 스스로 찾아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심

-조욱현신부-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얻으실 영광 받으신 모습이다. 이 모습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수난의 때가 되어도 제자들이 당황하지 않게 해주시려는 배려이다. 즉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항상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복음: 루카 9,28-36: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루카복음 9,27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하신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장차 이 땅에 나타날 당신을 둘러싼 영광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오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그 영광을 세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기도하신다.

 

그때에 거기서 놀랍도록 밝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바뀌어 옷마저 번개처럼 번쩍이고 빛처럼 반짝였다. 거기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나타나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대화의 내용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시는 신비와 십자가 위에서의 고귀한 고통을 의미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 곁에 나타난 것은 그분이 바로 예언자들의 주님이심을 제자들이 알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주님의 영광을 보았다. 우리의 눈이 아무리 좋아도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더욱이 죄 많은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을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잠에 빠졌다고 표현한 것 같다. 그들은 나약한 잠으로부터 회개하고 깨어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보았고 그분의 위엄을 볼 수 있었다. 그분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말한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3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필리 1,23) 베드로 역시 사랑하는 마음과 열심한 행실로 초막 셋을 짓겠다고 약속한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을 보고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아직 주님의 구원업적은 시작단계에 와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34) 그들을 덮은 것은 주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거룩한 영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칠 것이다.”(루카 1,35) 이 현상은 하느님의 말씀이 들릴 때 나타난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 이 말씀은 거룩한 아드님을 가리킨다. 이 구름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음성에서 비롯하는 믿음의 이슬로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빛나는 구름이다. 아버지의 음성은 바로 십자가의 순간이 가까이 왔을 때,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에 따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주님의 인성까지도 하늘빛에 의해 영광을 받게 되시리라는 것도 알려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게 해 주셨다.

 

제자들은 아직 연약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자 겁이 나서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주님은 자애로운 주님이시기에 말씀과 손길로 그들을 위로하며 일으켜 세우신다. 그분은 산 위에서 번갯불처럼 번쩍이셨고 해보다 더 밝게 빛나심으로 우리를 장차 드러날 당신의 영광의 신비로 이끌어 주셨다. 그리고 주님은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라고 분부하신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말로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려야 할 것이다. 주님의 변모 축일은 바로 우리의 변모를 위한 날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 29)

-한상우신부-

가까이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십니다.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 여정을 통한
영광의 생생한
부활입니다.

거룩한
변모의 순간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순간입니다.

거룩한 변모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보게됩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거룩한 사랑은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사랑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변모를 통해
당신이 누구시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뚜렷이 보여주십니다.

거룩한 변모도
뜨거운 기도도
아름다운 변화도
사랑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말씀들에는 현실을 넘어서는 초현실적 상황이 전개됩니다. 독서는 다니엘 예언자가 본 환시의 한 대목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제자들 앞에서 거룩히 변모하심으로써 다가올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
"기도"는 하늘과 땅을 잇는 일이고, "산"은 땅에 뿌리를 둔 하느님 현존의 장소입니다. 첫 문장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방향성과 목적성이 오늘의 내용 전체를 준비시킵니다.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모세와 엘리야, 영광, 구름, 소리..."
일상적이지 않은 광경들이 펼쳐집니다. 지상에서 좀처럼 체험하기 힘든 놀라운 순간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신 예수님과, 하느님의 사람으로 지상의 소명을 완수한 두 천상 존재가 등장해 함께 대화를 나누는, 그야말로 천상적이고 영적인, 비현실, 초현실 현장이 제자들 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자체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지요.

반면 지상적이고 육적인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제자들을 바라봅니다. "잠에 빠졌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만 겁이 났다."
잠, 무지, 겁(두려움). 이는 상상도 못한 주님의 신비 앞에서 인간에게 엄습하는 당연한 반응일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도 한 마디 드린다는 게 바로 "초막" 이야기였지요.

종교적 존재인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는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를 의식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절대자께 예우를 드리되, 인간의 한계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체험적 실재 안에서 표현하려 하지요. 그것이 곧 성소입니다. 인간은 신이 이 땅에 자리잡으실 수 있도록 최대한 아름답고 찬란한 거처를 지어 봉헌합니다. 유형의 성전, 성소는 무형의 초월적 존재가 거하시면서 인간 가운데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베드로 역시 존경과 경외심, 감동, 감사 등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감동을, 초막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말씀으로 표현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천상과 지상을, 영과 육을, 초현실과 현실을 이으려는 인간의 방식이지요.

반면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천상과 지상을, 영과 육을, 초현실과 현실을 잇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비참한 방식으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써 땅의 죄악을 하늘의 자비와 결합시키고 화해시킨 방식입니다. 고통 속에서 각자의 소명을 완수했던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맞이하셔야 할 완성의 때를 격려하고 경축합니다.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루카 9,35)
소리는 성부 하느님의 현존을, 구름은 성령의 현존을 가리킵니다. 그 자리에 계셨던 성자 예수님을 포함해 바로 이 곳, 이 순간이 성 삼위 하느님의 온전한 현존의 순간, 장소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소개와 당부, 권고의 의미로 곧장 제자들을 향해 발설된 만큼 인간 존재 역시 고려된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현장은 성부, 성자, 성령, 천상적 인간, 지상적 인간 모두가 현존하는 충만하고 완전하며 부족함이 없는 완성의 낙원, 태초의 동산과 같을 겁니다.

제1독서는 밤의 환시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의 아들을 목도합니다. "희고, 깨끗한, 불꽃, 타오르는 불, 불길, 구름, 통치권, 영광, 영원한..."
천상의 광채를 표현하기엔 인간의 말이 너무 초라하고 빈곤하게 느껴질만큼 어마어마한 광경입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이 환시를 통해 성부의 위엄과, 장차 오실 사람의 아들, 성자의 영광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 세기를 지나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밤의 환시가 아니라 현실 안에서 삼위 하느님의 현존과 그 영광을 직접 본 것입니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36)
산을 내려오는 예수님의 마음, 제자들의 마음을 관상합니다. 예수님 마음 안에 앞으로 가실 길에 대한 확신, 감사, 사랑, 벅찬 기쁨, 그리고 비장함이 차올랐을까요? 그리고 제자들은? ... 그들은 침묵합니다. 침묵은 신비 앞에 선 인간이 취해야 할, 취할 수밖에 없는 응답입니다. 설명할 길 없는 무지, 혼란, 두려움, 기쁨... 침묵은 이 모두를 감싸안는 신비의 언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어쩌면 이미 우리 각자는 주님 영광의 얼굴을 영혼 깊숙이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명히 의식하건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건 그 영광의 얼굴이 우리를 지금 이 자리까지 이끌어 왔을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번지르하게 빛나는 화려함은 주님의 영광이 아닐테니 뒤로 하고,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어떤 얼굴을 통해 당신 현존을 드러내셨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에서 가장 찬란히 빛난 주님의 영광은 분명 어디쯤에서 우리의 개인 소명과 한 길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환희 빛나는 벗님의 얼굴을 그려보며 미소짓습니다.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49378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6일 일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