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8월 2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8. 1. 18:51

2019년 8월 2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마태오 13,54-58)
 

 

Taught the people in their synagogue.

They were astonished and said,
Where did this man get 
such wisdom and mighty deeds?
Is he not the carpenter’s s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을 일러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의 축일들, 곧 목축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파스카 축제, 땅을 일구어 얻은 맏물을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누룩 없는 빵의 축제인 무교절, 그리고 주간절 또는 추수절, 광야에서 보낸 시간을 기억하는 속죄일과 초막절에 대하여 일러 줍니다.우리는 날마다 일의 노예가 되어 생기 없이 권태롭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은 이따금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의 많은 시간과 관심을 빼앗으며 이웃에게 마음을 쓰는 것마저 막습니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큰 축일들을 지내면서 자유롭고 기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주님과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주님을 위한 축일들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십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그리고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관대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축일은 두 가지 목적을 지닙니다. 첫째, 주님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기도와 찬미와 찬양으로 그분과 하나 되고자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이웃을 더 기쁘게 맞이하고 말을 들어주며, 우리 시간과 일을 기쁨과 자유와 특히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나눌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교회는 이런 하느님의 원의를 자기 것으로 삼아 한 해 동안 많은 축일을 제정하여, 예수님께서 주님과 부활로 이룩하신 새로운 삶을 기뻐하며 살아가게 합니다.이따금 사람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일에 맞서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같은 고향 사람인 예수님께서 위대한 예언자이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단순한 “목수의 아들”로 여기고 맙니다. 우리는 이웃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누구나 자기 시야의 한계가 세상의 한계인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큰 공감을 갖게 하는 말입니다. 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한 분이 좋은 의견을 냈습니다. 그러자 다른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거 제가 해봤는데 별로 효과가 없어요.”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효과 없다면서 단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자신의 행동에서는 실패를 맛보았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가장 큰 효과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보고 자기가 생각한 것이 모두 옳다고 착각합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시각을 보편적인 관점으로 믿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들은 자신의 말 앞에 이런 말들을 자주 붙입니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말을 붙임으로 인해 자신의 시각을 정당화하지만, ‘누구나’는 일부분에 불과하고 ‘상식적으로’는 비상식적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러한 착각의 늪에서 절대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다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생각의 크기를 더욱 더 넓히면서 많은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단순히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내 시야를 더욱 더 넓혀주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십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많은 기적과 말씀을 통해 이분이야 말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향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른 곳에서 행하셨던 많은 기적들을 고향에서 오히려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고향이기에 더 많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좁은 시야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은 오히려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내 시야를 넓혀주는 겸손을 통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혼자만의 비전은 몽상이나 망상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최태성).



도둑질

어느 스승이 한 제자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도둑질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

제자는 “곧바로 뉘우치고 훔친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라고 공손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도둑맞은 것이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평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것 역시 원래대로 회복시켜 주어야 하겠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 특히 부정적인 판단은 이렇게 그의 평판을 훔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훔친 평판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겠는가? 바로 그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하고 또 그에게 칭찬과 지지를 해주었을 때 비로소 그 평판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남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 우리이지요.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남에 대한 ‘뒷담화’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뒷담화가 남의 평판을 훔치는 도둑질이었네요.                   

나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

-전삼용신부-


 이번 여행을 가던 중 고속도로에서 저희 차 앞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보지 못하고 그저 보이는 것만으로는 트럭 두 대가 고속도로를 막아 그 앞에 서있는 사고 차량들을 보호해 주려는 것 같았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여 내려서 도로 위에 떨어진 잔해들을 조금 치우던 중 사고 난 차량에서 스마트폰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집어 주인에게 전해주는데 뒤에서 앞에 트럭을 박은 차량 주인 것이었습니다. 그 두 대의 트럭이 사고가 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받는 분은 아파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앞의 차 운전자는 이리저리 걸으며 전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저는 앞의 트럭운전자에게 혹시 신고를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도 당황하여 아직 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5분 정도는 지난 것 같았는데 모두가 그저 구경만 하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뒤의 차 운전자는 차에 발이 끼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핸드폰이 있는 제 차로 다시 돌아와 119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뒤에 차들이 잔해가 치워진 두 트럭 사이로 빠져서 앞으로 가는 틈에 저도 앞으로 운전을 해서 그 트럭 두 대를 빠져나왔습니다. 마음은 갓길에 다시 세우고 구조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싶었지만 ‘신고까지 해 주었으면 됐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남들처럼 사고 난 두 차량을 뒤에 놓아두고 제 갈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경찰서, 소방서, 119 구조대, 앰뷸런스 등에서 전화가 계속 오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10분이 다 되어가는 데도 전화가 오는 것을 보니 그 차에 끼인 사람은 계속 그렇게 있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차에 끼어봐서 아는데, 그때는 아프기보다는 외로웠습니다. 사고를 내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고 혼자만 차에 끼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인 그분을 두고 그냥 떠나버린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바쁜 일도 없었고 놀러가는 중이었는데 뭐가 급하다고 휩쓸려 가버린 것일까요? 맨날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강의를 하며 사람이 물이 빠져있는데 어떻게 구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 정작 그런 처지가 되니 제 자신도 사제나 레위인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자라실 때 본 것만 기억하고 자신들이 아는 것 안에 갇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그들이 메시아가 되었을 것입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란 뜻은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합니다. 평범한 인간의 수준만으로는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고 그리스도가 되어야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는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어보려 했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메시아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이니 예수님이 하신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준에 가까웠기 때문에 가장 예수님을 잘 알아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자신이 예수가 되어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맞습니다. 애벌레 눈에는 모든 애벌레들이 자기 수준으로 보이겠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나비는 다른 애벌레를 볼 때 자신처럼 나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가 되면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사람을 당신 아버지의 수준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도 당신과 같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애는 부모님을 보면서 네 발로 걷고 짐승처럼 먹고 싸기만 하는 존재지만 그 안에서 자신보다 더 위대해질 미래를 봅니다. 그래서 아기들이 짐승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행동하는 대로 대접하지 못합니다. 부모가 이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기 안에서도 자신들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난 이들도 모든 인간을 자신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하루를 지나고 보면 ‘저 분이 예수님이라면 내가 그렇게 대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그러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차에 끼여 있는 사람을 두고 그냥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그리스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려면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이들이 예수님으로 보이기 때문에 저절로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나타나셔도 나자렛 사람들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성소에 대한 갈등을 느끼던 중 기차 역에 쓰러져 “목마르다!”라고 말을 하는 한 행려자를 보고 그가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더 데레사도 그 순간 예수님이 된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처럼 말하려고 수만 번의 옹알이를 하고 걷기 위해 수천 번을 넘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예수님이 되려는 노력은 어떤 것이 되어야할까요? 바로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으로 보고 그렇게 대하는 노력이어야 할 것입니다. 수천 번, 수만 번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나도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을 때 이미 예수님으로 새로 태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사람,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개방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본격적인 공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셨던 예수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나자렛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겠습니까? 어서 빨리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들, 동기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드뎌 안식일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고향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예수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경탄할만한 말씀, 전무후무한 말씀에 완전히 빠져든 사람들, 마음 깊숙히 감명을 받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 사람들, 결국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오 복음 13장 54~56절)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릇된 질문, 그릇된 의혹으로 인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던졌어야 할 질문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여야 했습니다. 일단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분 말씀의 진의(眞意)를 정확하게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건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심장으로, 영혼으로, 전력투구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 귀와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개방성의 결여’였습니다. 삶의 진리, 신앙의 진리는 인간적인 눈과 마음으로는 이해하거나 수용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신앙의 신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앞에 우선 마음과 영혼, 정신을 활짝 개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고향 마을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인간 측의 활짝 열린 마음과 깊은 신앙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사람,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개방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승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기적을 계승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 사람들의 실수와 불행은 우리를 심각한 자아 성찰로 초대합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으며,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 교회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수님과 가장 멀리 서 있는 존재로 전락하기는 너무나 쉽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섣부른 앎이 병이다

-반영억신부-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 법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뿌리 깊은 선입견이 진실을 왜곡하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요? 혹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불평불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 마음의 옹졸함이 불평을 키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에는 '불평금지' 스티커가 붙여있답니다.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살펴야 하겠습니다.

 

 자기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안봉환신부-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의 축일들, 곧 목축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파스카 축제,

땅을 일구어 얻은 맏물을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누룩 없는 빵의 축제인 무교절,

그리고 주간절 또는 추수절, 광야에서 보낸 시간을 기억하는 속죄일과 초막절에 대하여 일러 줍니다.

 

우리는 날마다 일의 노예가 되어 생기 없이 권태롭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은 이따금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의 많은 시간과 관심을 빼앗으며 이웃에게 마음을 쓰는 것마저 막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큰 축일들을 지내면서 자유롭고 기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주님과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주님을 위한 축일들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십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그리고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관대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일은 두 가지 목적을 지닙니다.

첫째, 주님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기도와 찬미와 찬양으로 그분과 하나 되고자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이웃을 더 기쁘게 맞이하고 말을 들어주며, 우리 시간과 일을 기쁨과 자유와 특히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나눌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하느님의 원의를 자기 것으로 삼아 한 해 동안 많은 축일을 제정하여,

예수님께서 주님과 부활로 이룩하신 새로운 삶을 기뻐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따금 사람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일에 맞서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같은 고향 사람인 예수님께서 위대한 예언자이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단순한 “목수의 아들”로 여기고 맙니다.

 

우리는 이웃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이종훈신부-


휴가철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쉬지 못하는 것 같다. 쉬는 휴가 중에도 더 많이 보고, 또 먹고, 더 신나게 노느라고 쉬지 못한다. 쉴 수 없는 걸까? 쉴 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쉬지 못하게 하는 걸까?

 

이집트 노예생활을 탈출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은 축제의 규정을 제시하셨다. 그날, 거룩한 모임이 있는 날에는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레위 23,8.27.35.36).” 생업에 종사하다 하루 쉬는 게 아니라 축제를 지내기 위해 일하는 것 같다. 사실 하느님도 엿새 동안 세상을 지어 만드시고 이레째 쉼으로 그 일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가야되는 그 이유도 하느님께서 지정하신 그 장소에서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였다(탈출 3,12).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살고, 그분 안에 쉼이 진정한 휴식이고 또 지난 시간 땀 흘려 일한 것들의 완성이다.

 

안다, 이런 주장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지게 들리는지. 휴일도 없이 일해야 하고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까지 나오는 세상살이다. 하지만 하느님이 계획한 세상은 이런 게 아니다. 재화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서로 나누지 않고 서로 신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리 되었다. 한 사람이 너무 많이 가져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하고, 가진 자는 그 많은 재화를 어찌 할 줄 몰라 엉뚱한 곳에 써서 자신도 이웃도 헤친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으라고 요구하셨다. 하늘나라가 땅으로 내려왔다고 믿으라는 뜻이다. 죽지 않아도 안식할 수 있다. 우리를 쉬게 하시고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하느님은 결코 먼 곳에 계시지 않고 애써 힘들게 찾도록 꽁꽁 숨어계시지 않는다. 부르면 바로 곁에 계시고 믿으면 쉬게 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주님, 주님을 믿습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나 다서 탈렌트를 받은 이나 똑같이 칭찬하셨으니 분에 넘치게 일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맡기고 쉬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거기서 그만하게 일러 주십시오.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3,54-58: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을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대아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1코린 1,23)로 박해를 받으셨지만, 계약과 무관했던(에페 2,12 참조) 다른 민족에게서는 존경을 받으신다.

 

이 회당은 악의에 찬 믿지 않는 사람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못되고 버릇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 그러자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랐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끓었기 때문이다. 그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 이 말은 예수님을 폄하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 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개천에서 용났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가정에서 훌륭한 자녀가 나온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 57)

-한상우신부-

씻지 못할 상처란
편견과 고정관념의
상처입니다.

편견의 먼지를
털어내면 존경이
드러납니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그 사람의 전부일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한 사람의 소중한
역사(歷史)를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써내려가는
소중한 역사입니다.

고정관념을 갖고
판단하기 위해
존재하는 우리들이
아닙니다.

더 멋지고
더 아름답게
발전할 수 있는
소중한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익숙한 판단과
편견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우리가 막았어는
안됩니다.

편견을 내려놓으면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 우리의
삶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그 사람안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존경과 존중으로
서로를 일으켜 세웁시다.


-오상선신부-


그동안 보아왔듯이, 마태오 복음 13장에는 비유가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와 말씀에 대해 가르치시고, 또 제자들에게 따로 뜻을 풀어 주시지요. 그러시고는 "그곳을 떠나"(마태 13,53) 고향 나자렛에 가시는 것으로 13장이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놀랍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금의환향의 잔치를 벌여도 될 만한 순간입니다. 자기들과 같은 처지로 살던 이가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 지혜와 기적을 드러내는 것이 놀랍고 자랑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놀라움은 경탄과 찬미, 기쁨으로 옮겨가지 않고 "못마땅함"(마태 13,56)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당시 권력이 인정하는 타이틀도 없는 한낱 목수의 아들, 과부 마리아의 아들이 "어디서" 저런 능력을 얻었을지가 논란거리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출신을 따지자니 과거에 묶일 수밖에 없지요. 안타깝게도 그들은 현재, 더 나아가 미래를 바라보며 기대하고 희망하기를 포기합니다. 그리고는 "안다"고 생각하는 과거로 등을 돌린 채 멈추어 버리지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복음 환호송)
나자렛 사람들은 "과거"가 영원하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과거가 낙인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영원한 건, 늘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십니다. 말씀이신 분은 늘 새롭고 역동적이십니다. 말씀을, 복음을 과거 경험적 틀에 가두어 버리고 새로움을 박탈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말씀은 절대로 새로움을 빼앗기지 않을 뿐더러 더 싱싱하고 참신하게 자라날 것이니까요. 과거를 움켜쥔 채 벽 모서리를 향해 돌아 앉은 이에게는 기적과 같은 은혜가 베풀어지기 어렵습니다. 믿지 않는 이에게 기적은 혼란만 가중시키는 기현상일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는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도록 명하시는 축제들이 나열됩니다.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 햇곡식을 바치는 축일, 주간절, 속죄일, 초막절...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레위 23,7.8.35. 36)
매 축제에 대한 설명마다 반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한 명령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께 인간이 바치는 한갓 제물과 축제가 뭐 그리 유용하다고 이런 강요를 하시겠습니까! 이는 오로지 사람을 위한 당부입니다. 얼핏 엄격한 의무 조항처럼 들리지만,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종과 이방인과 짐승들까지 함께 쉬고 즐기며 자기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경축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일에 몰두해 보신 분들, 소위 일벌레라는 칭찬 비슷한 오명을 지니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건강과 관계, 신앙과 영혼까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일의 중독성, 일의 대가로 얻어지는 재물의 중독성, 일의 성과로 인해 인정을 받으면서 생기는 명성의 중독성 등등 영혼을 지키려 웬만큼 깨어 노력하지 않고는 많은 사람이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생업"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과도한 일 집착이 결국 하느님을 대신할 또 다른 우상을 빚어낼 수 있다는 걸 아십니다. 사실 자유인으로서 맞는 때와 절기마다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기쁨과 흥을 나누는 것이 파스카의 기적을 이루신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길입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현재를 경축하는 사이, 재해석된 과거와 함께 미래도 기대 가능한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축제는 바로 과거에 빛을 비춰 주는 장이지요.

예수님은 과거 이스라엘이 체험한 파스카를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이 오셔서 현존하시는 그곳이 곧 축제의 장이지요.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그 축제를 제대로 만끽하지도 즐기지도 못합니다. 숙고와 의미 찾기, 재해석의 필터 없이 그저 인간적으로만 바라본 과거가 그들에게 올가미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과거의 예수님이 어떠셨든, 과거의 우리가 어떠했든, 우리는 지금 우리 앞에 현존하시는 주님과 함께 축제를 지낼 줄 알아야 합니다. 재물과 성공과 명성의 고삐를 잠시 놓고 거룩한 쉼, 거룩한 기쁨, 거룩한 나눔의 축제를 한바탕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느님 현존과 은총의 자취인 과거 모든 사건들을 주님의 눈과 주님의 마음으로 재해석한다면, 기억하고 감사하는 축제의 기쁨은 기본이고, 미래의 희망은 덤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벗님, 오늘 함께 축제를 지냅시다!
"환호하여라, 우리 힘 하느님께!!!"(화답송) 아멘. 알렐루야!

*오늘은 저희 프란치스칸들에게는 의미있는 축제일입니다. 아씨시 프란치스코가 형제회를 시작하고 그곳에서 삶을 마친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작은 몫)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전대사 축일이랍니다. 오늘 모든 프란치스칸들은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며 작은 희생을 바침으로써 "용서"(Perdono)의 축제를 지냅니다. 이 축제로 우리 각자의 작은 몫을 주님께 봉헌하면서 과거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회개의 삶을 시작하며 감사의 날로 삼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벗님을 축복합니다.

올바른 전대사 받기!

-김찬선신부-


여러분은 포르치운쿨라 하면 어떤 것이 생각납니까?
전대사? 고백 성사? 성모 마리아? 행진?

오직 전대사만 생각나신다구요? 그렇다면
그것이 비록 우리 믿음 안에 있을지라도 어쩌면 영적인 욕심일 것입니다.
오직 행진만 생각나신다구요? 그렇다면
그것이 비록 좋은 체험일지라도 산티아고 순례와 크게 다를 게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고백 성사만 생각난다거나 성모 마리아만 생각난다면
이 축일의 전체적인 의미를 알고 지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춰 축일의 의미를 새길 수는 있겠지요.
그래서 올해 저는 포르치운쿨라 전대사에 대해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올바른 전대사 받기>가 올해 묵상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전대사 받기란 열매만 쏙 따먹으려는 자세가 아니지요.
씨만 뿌려놓고 거름을 주지도 가꾸지도 않고 열매만 따먹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와 잠벌까지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진정한 뉘우침이 있어야 하고,
그런 다음 은혜로운 정화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고백성사입니다.

고백성사와 관련하여 제가 자주 범하는 잘못이 바로 성찰과 뉘우침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백성사를 보는 것인데
성사의 사효성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성사의 사효성에 대한 믿음이란 죄 사함을 받기 위한 은총의 상태에
내가 비록 있지 않더라도 성사는 그 자체로 효력이 있다는 믿음인데
이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훌륭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앞서 봤듯이 이것 때문에 성찰과 뉘우침에 소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는 마치 때밀이에게 내 몸의 정화를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 돈만 주면 때밀이가 알아서 나의 더러운 곳을 다 씻어주니
그리 해도 되지만 우리 영혼의 경우는 무슨 죄가 있는지 성찰이 부족하기에
무슨 죄가 사해졌는지도 모르고 그 은혜로움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게 암 덩어리가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고 있는 사람보다 그것이 제거됐을 때 더 고마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래야 암의 원인을 알기에 또 다시 그 암에 걸리지 않겠지요?

고백성사의 은혜는 죄 사함의 은혜뿐 아니라
내 죄가 사해졌다는 그 은총체험의 은혜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의 은혜까지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사랑의 결심 없이 전대사만 받으려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전대사가 이기주의적이지 않고 더욱더 완전한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죄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다 사랑치 않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의지도 없고 결심도 없는 것은 마치 암 덩어리만 제거했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두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미움의 뿌리를 도려낼 뿐 아니라 사랑의 의지와 힘을 키워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며,
사랑하려고 할 뿐 아니라 실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
오늘, 포르치운쿨라 축일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빕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4일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