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2019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마 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머무르실 때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0,40)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 성녀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9-27)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whoever believes in me,
even if he dies, will live,
and an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Lord, if you had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서로 사랑하자며,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당신은 부활이요 생명이니, 당신을 믿는 이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라자로와 마리아의 누이로 예수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당신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시는데(요한 12,2 참조),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잡히시던 날까지 그분을 모셨던 이가 바로 마르타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마르타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되살려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그들 집, 곧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그러자 마르타는 주님이 계셨더라면 라자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오빠를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서 마르타는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믿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믿음을 보시고 라자로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이렇게 보니 마르타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봉사로 똘똘 뭉친 여인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되찾아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획된 생명으로 이 땅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며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그런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되돌려 주시고자 하는 생명은 육신의 숨이 아니라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라자로가 되돌려 받은 육신의 생명은 다시 끊겼지만 그가 되돌려 받은 영원한 생명은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마르타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많은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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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화는 더 큰 실수를 키울 뿐입니다. 그렇다면 실수를 함으로써 화가 줄어들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화는 실수와 함께 점점 더 커질 뿐입니다. 따라서 화가 났을 때에는 최대한 빨리 그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언젠가 화를 내시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어떻게 할지를 모르시더군요. 그래서 이 분을 손을 꽉 잡고서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화가 났는지를 말씀하시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자, “화 낼 만하니까 화내지요.”라고 하십니다. 나중에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에 이야기를 나눠보니, 화를 내고 있었을 때 무슨 이유였는지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화를 낼 이유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화를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화를 낼수록 실수를 하게 되고 결국 누가 가장 큰 손해를 겪게 되겠습니까? 가장 큰 피해는 바로 내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후회만 가져오는 화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이를 마르타 기념일을 맞이하는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마르타의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를 예수님께는 특별히 사랑하셔서 자주 이 집을 찾아가서 함께 하셨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불가능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주님의 능력이라면 오빠인 라자로를 죽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빠인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늦게 찾아온 주님이 원망스럽지 않았을까요? 화가 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녀는 원망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대신 더욱 더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보여 주지요.
그 결과 그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마지막 날에야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마르타의 말과는 달리, 지금 당장 다시 살아나는 영광을 목격하게 됩니다.
화가 나고 원망할 일이 많은 세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주님께 대한 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그 믿음을 통해 화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열정을 쏟아서 일에 몰두하다보니 신앙생활을 잊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일에 몰두하다보니 아기 낳는 것을 잊어버려서 어느 순간에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고 말하는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일에 몰두하더라도 가정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또 자녀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또한 그 안에서 소소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즉, 오로지 일에만 몰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에 몰두해서 신앙생활을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분은 여유가 있어도 신앙생활을 못할 확률이 더 높아집니다. 우선순위가 제일 나중이기에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다 하고나서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 자체를 잊어버리고 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집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훌륭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아무리 바빠도 또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들을 만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할 대상을 계속해서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은 내 삶의 한 가운데에서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만이 부활이요 생명이요, 우리 생의 전부임을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인간이셨습니다. 인간 세상에 완벽히 육화 강생하신 그분께서는, 우리네 인간들이 느끼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똑같이 느끼셨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불의 앞에 분노하셨고, 한 인간이 겪는 고통 앞에서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리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하듯이 예수님께도 유난히 절친했던 가족이 있었으니, 친구 라자로와 그의 누이들, 마르타와 마리아였습니다. 본격적인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는데, 때로 심한 허기에 시달리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는, 엄청난 식욕의 소유자들인 제자들을 이끌고 그들의 집을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예수님을 비롯한 장정들을 위한 손님맞이의 총 책임자는 마르타였습니다. 그들이 예고도 없이 대거 방문할 때 마다 마르타는 즉시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그녀는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마르타는 한 사흘씩 앓아누울 정도였습니다.
음식 솜씨도 좋고 마음씨도 착했던 마르타는 언제나 예수님과 제자단을 극진히 환대했습니다. 늘 기쁜 마음으로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틈만 나면 찾아오고, 엄청나게 먹어대니, 어느 순간 마르타의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한번은 얼마나 힘들었던지,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따지기까지 했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동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루카 복음 10장 40절)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오빠 라자로를 각별히 사랑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요한 복음 11장 5절)
그런데 한번은 마르타가 예수님의 처신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라자로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 급히 좀 와주십사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11장 3절)
마르타는 평소 자신의 가족이 한 마음 한 몸으로 합심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기울였던 봉사와 희생, 그간 쌓아온 각별한 친분과 우정을 생각했을 때, 만사 제쳐놓고 즉시 달려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웬걸!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인연도 관련도 없는 다른 사람들은 다 치유시켜주시면서, 보통 인연이 아닌 오빠 라자로는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놔두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한 마르타는 솟아오르는 화를 겨우 눌러참으며 오빠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게임이 완전히 끝난 후 예수님께서 도착하신다는 말을 전해들은 마르타는 즉시 달려가서 볼멘 소리로 따졌습니다. 오빠의 죽음에 대한 깊은 슬픔과 꼭 필요한 순간 적절히 개입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늑장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복음 11장 21절)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굳게 결속되어 계시는 분이시고, 그분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라도 그분께서 허락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마지막 기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낱같은 희망을 마음에 품고 예수님께 아룁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11장 22절)
오빠를 향한 마르타의 사랑이 참으로 애틋합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그분의 능력을 향한 마르타의 믿음이 참으로 깊습니다. 이런 마르타의 마음을 갸륵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외치십니다.
“네 오빠는 살아날 것이다.”(요한 복음 11장 23절)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을 향한 마르타의 믿음은 100퍼센트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퍼센트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11장 24절)
“네 오빠는 살아날 것이다.”라는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라자로의 부활 뿐만 아니라 종말의 부활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마르타는 마지막 부활로만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종말 부활 신앙은 예수님 시대 당시 이미 군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마르타의 반응은 그러한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2퍼센트 부족한 마르타의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시고 채워주시기 위해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 부활의 원동력이며 부활 그 자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은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은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복음 11장 25~26절)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의 부활 신앙도 예수님께서 일깨우시고 채워주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그분만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예수님 그분만이 우리 생의 전부임을, 예수님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임을 온 몸과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마르타처럼 믿읍시다.
-이기정신부-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요한 11,25~27)”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하느님 가족 되면 영원히 안 죽는다는 말씀.
마르타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고 고백한 점 공감합니다.
세상에선 미래를 못 보는 조건에 살지만 우리도 마르타처럼 믿읍시다.
물질계에 매이고 자기생각대로 살면서 잘난 체 하는 인물들 문제아죠.
2000년 후 지금 우리는 거부할 근거 찾지도 못했으면서 거부안됩니다.
2000년 정도 지나면 한 사건 실화가 변한다는 말은 들은 적 없습니다.
인생 큰 코 안 다치려면 마르타의 대답처럼 지금에도 공감해야합니다.
감사히 공감하며 믿는 이들은 하늘의 영원한 도를 깨달은 분들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고백은 삶으로 해야한다
-반영억신부-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구지 낫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핏줄인 라자로를 살려내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여전히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기 전에 함께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믿었습니다.’의 고백이 아니라 ‘믿습니다.’하는 현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다 아는데 가지 않는 길
-이종훈신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 이렇게 두꺼운 성경의 요약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하느님을 믿으라고.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하느님은 살아 계시다고 믿으라는 호소이다. 그분을 볼 수 있고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는 비법이 있다면 이렇게 많은 말과 이야기들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먼 곳에 계셨지만 사랑하는 라자로가 죽은 것을 아셨다(요한 11,11). 사람들에게는 그가 죽었지만 그분에게는 잠든 것이었다. 마치 그가 숨을 멈출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처럼 보인다. 그를 되살려내서 사람들이 당신을 믿게 하시려 했던 것 같다.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었겠지만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도전은 없었을 것이다. 병이 낫고 악령이 쫓겨나는 것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지만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사람이 되살아남은 그 조차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느님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계신다. 죄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하느님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그런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음식점 운영을 다루는 한 TV프로에서 그 주인장은 ‘자신이 고단하면 손님 입은 즐겁고 내가 편하면 손님 입이 불쾌해진다.’고 말했다. 당연하지만 명언이다. 사랑은 고단하지만 그 고단함 속에는 충만함이 있다. 사랑이 아닌 다른 마음이 있다면 그 고단함은 불평과 미움의 씨앗이 되어버린다. 사랑은 그 자체로 행복하다. 순수한 사랑은 보답은 물론이고 그 수고에 대한 보람도 바라지 않는다. 혹시 있다면 사랑하는 이가 즐겁고 행복함일 수 있겠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이 또한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으라는 호소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보고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으니 그분이 내 앞에 나타나기를 바람은 처음부터 그분을 따를 마음이 없는 거다. 하느님은 이제는 다시 사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시지 않을 거다. 그분은 이미 다 보여주셨고 어디 사시는 지도 알려주셨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그분은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는 선행 속에 사신다. 그분은 이 세상에 계시면서도 안 계시는 분이고, 그분이 사시는 집은 세상으로 이미 내려와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곳이다. 오직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그분을 뵐 수 있고 그분이 사시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느님, 당신이 숨어계신 곳을 다 알려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공개된 비밀을 들었지만 당신을 찾으러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적으니 그 오솔길은 언제나 한적합니다. 다 알지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그 길을 오늘도 조용히 한가롭게 걸어가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숨어계신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이들을 이끌어주셨으니 오늘 저의 발을 주님 계신 곳으로 인도해주소서. 아멘.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
-송영진신부-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1-22)”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는
마르타의 말을 겉으로만 보면,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곧바로 오시지 않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은 비난이나 원망이 아니라,
“예수님은 병들어 죽어가는 병자를 죽지 않게 할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라는 신앙고백이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병을 고쳐서 수명을 연장하는 의사가 아니라,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래도 마르타의 말에는 인간적인 아쉬움이 어느 정도 들어 있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늦게 오신 것은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라고 저는 믿습니다.” 라는 뜻도 들어 있고,
“오빠는 이미 죽어서 묻혔지만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마르타는 직접적으로 청하지는 못하고,
신앙고백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간접적으로 자신의 희망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희망이 지금 당장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희망인지,
종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두 희망이 섞여 있을 것입니다.)
마르타의 말에서, 마태오복음에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말이 연상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 9,18).”
이런 말은 예수님을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으로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마르타가 처한 상황은 거의 모든 사람이 살면서 몇 번씩 겪는 상황입니다.
즉 인간 세상의 일반적인 현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일은,
병 때문이든지, 어떤 사고나 전쟁 때문이든지,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고, 슬픔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셨더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보내지 않았을 텐데...” 라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라던데, 나에게 이렇게 큰 고통과
슬픔을 주는 것이 사랑인가?” 라고 따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금 더 오래 산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텐데,
그래도 우리 심정으로는 그 ‘조금만 더’ 라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어떻든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은 마르타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요한 11,23-24).”
예수님 말씀은 ‘지금’ 라자로를 살리시겠다는 암시입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대답은 종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서의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혀 있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마르타는 예수님께 그 일을 직접 청하지 못했고,
그래서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마르타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청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권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고, 이미 무덤에 묻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르타는,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하거나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속으로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마르타 자신의 희망과 다른 것처럼 보이더라도
마르타가 그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5-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5,24-26).”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라는 말씀과 5장의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
“지금, 여기서, 자신의 삶 안에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는 동안에는 안 믿었다가 죽은 다음에야 믿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살아 있을 때 믿어야 합니다.
또 머리로만 믿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온 삶으로’ 믿어야 합니다.)
마르타의 신앙고백은 표현만 보면, 베드로 사도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는 신앙고백과 같은데, 두 신앙고백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마르타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 성녀 마르타는 예수님의 시중을 든 여자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성녀 마르타의 신앙고백과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은 동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1,19-27: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 축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쉬고 계실 때에,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자기는 부엌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예수님 앞에 앉아서 자기를 도와줄 생각도 않고 있는 마리아에게 자기 일 좀 거들어 주게 하라고 예수님께 말하였던 마르타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보고,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동생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님께 대해서 고백한 신앙 내용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하시는 중에 여러 번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을 보았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죽은 과부의 외아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21-22절)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하시고 라자로를 살려 주시면서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은 “지금 여기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이 단지,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다음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되고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따르면서, 즉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주님의 뜻과는 역행하는 자신을 끊는 삶, 자신을 죽일 수 있어야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자신을 이기는 즉 자신이라고 하는 이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혹은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 이때에 우리도 주님께 당신은 “부활이요 생명”(25절)이시며, 또한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 27)
-한상우신부-
무더위 속에서도
습한 장마속에서도
꽃은 꽃의 길을
걸어가며 꽃으로
피어납니다.
사랑과 믿음
열정과 헌신 사이에
성녀 마르타가
있습니다.
마르타는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만나는
인격적인 체험을
하게됩니다.
마르타의 진심어린
고백에서 숭고한
사랑과 지극한
믿음을 봅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진실된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아름다워지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주님을 향하는
진실된 사랑이
우리의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마르타의 슬픔이
예수님을 통해
뜨거워지는
믿음이 됩니다.
모든 관계가
예수님을 통해
맑게 치유되고
있습니다.
병든 라자로의 소생도
믿음에 대한 마르타의
응답도 모두 예수님을
우리 삶안에 모셔들이는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사랑은 죽음과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 사랑안에
우리가 있음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마르타 성녀의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마르타 남매(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여러 일화 중 하나지요.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 11,3) 오늘의 대목이 있기 며칠 전, 마르타, 마리아 두 자매가 주님께 사람을 보내어 전한 말씀입니다. 두 자매의 심정은 오늘의 내용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이미 매장이 끝난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도 마르타는 예수님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하고자만 하신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청을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요한 11,22)을 안다고 고백합니다. 이 앎의 고백은 예수님 향한 그녀의 굳은 믿음과 변치 않는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사랑하신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고 말씀하신 바가 있는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를 죽음에서 일으킴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요한 11,4)을 드러내실 예수님께서 먼저 마르타의 믿음을 확인하십니다. 기적이 대중의 얕은 호기심이나 자극하는 기괴한 스캔들이 되지 않으려면 그 기적의 당위성인 "믿음"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려는 기적은 "사랑"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당신께 대한 믿음이 생명의 조건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되살아나는 생명은 물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은 믿음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마르타는 신앙 역사에 길이 남을 명 대답, 정답을 남깁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 당시 제자들부터 우리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이 신앙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분이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주님의 종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진리입니다.
제1독서인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요한의 글답게 온통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 사랑... 그야말로 사랑 타령입니다. 그리고 "사랑"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말씀이 "머무르다"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과 "머무름"은 뗄려야 뗄 수 없이 밀착된 말씀들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머무름은 상대를 거처 삼아 그의 안에 자신을 두는(놓는) 존재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통해 이 머무름이 동시에 상호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네요. 그분 안에 내가 머무르고 내 안에 그분이 머무르는 신비는 사랑할 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1요한 4,15) 마침 오늘 마르타가 믿음으로 고백한 내용이지요. 이 믿음 또한 머무름을 부른다고 합니다. 내 안에 그분이 계시고(머무르시고) 그분 안에 내가 있는(머무르는) 상태, 서로가 서로에게 머무르는 것은 하나됨의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내 안에 그분이, 그분 안에 내가... 둘은 이미 분리할 수 없이 일치되어 있습니다. 서로에게 머물러 하나된 존재는 칼로 베듯 분리할 수도, 뜯어내듯 떼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믿음은 사랑의 머무름으로 이어지고, 또 생명을 부릅니다. 결국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창조부터, 그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모든 피조물의 사랑까지, 또 우리가 일상에서 소박하게 나누는 작은 사랑까지, 사랑은 생명을 생성하고 보듬고 지키고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기초한 모든 사랑은 생명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기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고 머무르고 사랑이 되어 영원히 사는 그 기적 안에 있습니다. 그 기적 안에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믿음의 뜸들이기
-김찬선신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억울한 성녀
마르타 성녀는 참 억울한 성녀 같아 애처롭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고 오히려 주님 섬기기를 잘했는데,
잘한 것은 아닐지라도 열심히 했는데 꾸지람을 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좀 엉뚱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억울함의 등급이랄까,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억울함과
하느님께 대한 억울함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억울할까 생각해봤습니다.
보통 억울함은 윗사람한테 느끼는 감정이고,
그것도 그저 윗사람이 아니라 내 존재와 삶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분한테
느끼는 감정인데 그 윗사람이 나의 진실이나 선행을 잘못 앎으로써
상 받아야 할 내가 오히려 질책이나 벌을 받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니 윗사람이 내게 소중한 분이면 분일수록,
나의 진실이나 선행이 크게 상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분한테 오히려 질책이나 벌을 받을 때 더 억울하겠지요.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이 나의 진실이나 선행을 몰라줘도 그것이 별로 서운치 않고,
칭찬 대신 꾸짖고 상 대신 벌을 줘도 그것이 별로 억울치 않지요.
그러니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한 마르타는,
어쩌면 마리아보다 주님을 더 믿고 더 사랑한 마르타는
인간으로부터 받는 어떤 몰이해도 억울치 않지만
주님으로부터 자기의 수고가 이해받지 못할 때 무척 서운했을 것이고,
꾸지람 들어 마땅하다고 생각한 마리아는 오히려 좋은 몫을 택했다 하시고
칭찬 받아 마땅한 자기가 오히려 꾸지람 들을 때 무척 억울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입니다.
여기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대해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여인으로,
예수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는 여인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얘기가 먼저일까,
꾸지람 듣는 얘기가 먼저일까 오늘 복음의 얘기가 먼저일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물론 꾸지람 듣는 얘기의 복음과 믿음을 고백하는 오늘 복음이
다른 복음이지만 저는 두 얘기를 연결시켜 이렇게 한 번 추측을 해봤습니다.
마르타는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도 인간적으로 매우 억울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주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오빠 라자로가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치유를 청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러 꾸물대어 라자로가 죽고 난 뒤에야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마르타의 요청대로 순순히 바로 오지 않으신 걸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믿음의 뜸입니다.
밥할 대 우리는 뜸을 들입니다.
뜸을 들이지 않고 솥뚜껑을 미리 열면 밥이 덜 되는 거지요.
꾸지람을 통해 마르타의 일과 사랑을 순수하게 하고 성숙케 하신 주님께서
이제 이런 믿음의 뜸을 통해서 마르타의 믿음을 더욱 성숙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주님의 크신 사랑이고, 그 크신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이 사랑을 언제 확실히 느꼈고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사랑을 느끼고 난 뒤에는 억울함이 틀림없이 고마움으로 바뀌었겠지요?
인간적으로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신앙적으로 초월하는 법과
내 청이 바로 가납되지 않을 때 그것을 내 믿음을 뜸들이시는
주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성녀 마르타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