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7년 7월 28일 제16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7. 25. 18:59

2017 7 28일 제16주간 금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는 다윗 가문의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 교회에도 널리 퍼졌다.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태 13,18-23)  

 

 The seed sown on rich soil
is the one who hears the word

and understands it,
who indeed bears fruit

and yields a hundred or sixty or thirtyfold." 

 


The explanation of the parable of the sow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말씀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으라고 하시며,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뿌려진 씨를 설명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려 주십니다. 율법의 근간이 되는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양심을 지닌 인간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일종의 자연법입니다. 십계명 이외의 나머지 율법은 십계명을 구체적 상황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지침들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구약의 율법을 하나하나 자세히 풀어 주십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알려 주시는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7장 참조).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1-9)에서 당신께서 알려 주신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여 백 배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하나하나 풀이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안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고, 씨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 곧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는 바로 그 복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실천함으로써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받은 복음의 씨앗을 다른 이들에게도 퍼트리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모든 이가 그들의 올바른 태도를 보고 주님께로 모여와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16 참조).
그런데 하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는 조그만 어려운 일이 불어닥쳐도 금세 복음을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안에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은 뒤 뿌리를 내리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빠져 말씀을 실천하지 않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들 마음에 뿌려진 말씀이라는 씨앗이 가시덤불 속에 가두어져 숨이 막혀 죽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돌밭이나 가시덤불 가득한 밭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어떤 열매도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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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뒤뚱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혹시라도 잘못 넘어질까 봐 불안합니다. 이런 예상대로 아기는 얼마 걷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넘어질 때 아팠는지 큰 소리를 내며 웁니다. 하지만 잠시 뒤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또 다시 일어서서 걸어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의 부모는 어떻게 할까요? 만약 아기가 제대로 걷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제 더 이상 스스로 걷지 못하도록 부모가 늘 안거나 업고 다닌다면 어떨까요? 이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아기가 걷지 못하게 해서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보호가 진짜 사랑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넘어지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넘어지더라도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그냥 놔두고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과 시련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어렵고 힘든 상황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진짜 사랑일까요? 어떤 형제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가 이런 아픔을 겪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이를 그냥 보고만 계신다면 저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고백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갓난아기가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지켜만 봐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떠올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만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말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충분히 이겨내면서 많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씨 뿌리는 사람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시면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으로 비유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 최고임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랑을 늘 품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을 늘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세상의 기준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처럼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 더욱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 말씀은 분명히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쓰러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빈스 롬바르디).



실수

실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실수를 하면 창피하고 위축될 뿐 아니라 무능하고 바보 같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실수를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수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자전거를 못타는 제게 친구는 친절하게 가르쳐주었지요. 그러나 앞으로 가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운동 신경이 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도 자전거를 타기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자꾸 쓰러지는 실수의 모습을 친구에게 계속 보여준다는 것 역시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때 친구가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넘어질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앞으로 갈 것을 생각해.”

생각한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요. 저는 실수한다는 부끄러움에 머릿속에 넘어질 것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생각한대로 넘어질 뿐이었습니다.

실수가 있어야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서신 것도 이런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닐까요? 본인의 부족함, 나약함을 인정하면서 하느님께 믿음을 두어야 합니다.                   

기쁘게 사는법

-전삼용신부-


영화 ‘박하사탕’(2000)은 한 중년 남자가 기차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내용은 점점 과거로 돌아가며 왜 순수한 영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명해줍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다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돈과 쾌락과 권력으로 찌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그의 살아온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상황이라고 사람이 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박하사탕을 싸 주던 순수한 여인을 뒤로한 채 세속적인 것을 추구했다면, 그것은 그가 그런 것들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니 박하사탕 안에 담겨진 순수한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잃고 그것과 반대 되는 것들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박하사탕이 군홧발에 짓밟히는 순간 우리는 그가 장님이 되어버렸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학생을 고문하는 경찰, 돈만 아는 사업가, 바람피우는 남편이 될 것임을 압니다. 또한 잃어버린 행복했던 삶을 회상하며 그렇게 “나 다시 돌아갈래!”하며 기차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마음을 알게 됩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 과거가 아니라 과거에 가졌던 순했던 마음임을 압니다.

      삶은 끊임없는 해석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더 행복한 것이라고 해석이 되면 그것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해석이 잘못된 것일 때는 뒤돌아 간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눈이 내가 닥쳐오는 모든 상황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는 눈인지, 아니면 타락하여 모든 것을 잘못 해석하며 살아가는지 살펴야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는 사람의 기쁨의 원천은 하늘나라의 말씀을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 말씀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해석한다면 기쁨이 오고 그렇지 않다면 기쁨을 잃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돌밭과 같은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참으로 기쁩니다. 오래가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부터 기쁨을 전혀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길바닥과 같이 완고한 사람들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말씀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이 무지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아무리 읽고 공부해도 그 말씀에서 기쁨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성경에 맛을 들이지 못하여 아예 읽으려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을 읽으며 기쁨을 찾을 수 있다면 돌밭과 같은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비록 육체적이어서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지만 적어도 성경을 깨닫는 기쁨을 아는 사람들이라 그 기쁨으로 돌을 부수어가면 됩니다. 이들이 지속시키지 못하는 것은 말씀을 읽어서 오는 ‘기쁨’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는다고 기쁨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잘 해석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해석의 기쁨을 잃게 만드는 것이 육체의 욕망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아야 기쁨이 지속됩니다. 아직은 말씀에서 오는 기쁨보다는 육체의 기쁨이 더 크다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돌밭과 같습니다.

      그 다음은 돈 걱정 때문에 말씀에서 오는 기쁨을 잃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은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는데,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니 결국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돈이 기쁨이지 가난이 기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이 기쁘게 보이면 비로소 말씀이 우리 안에서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기쁨을 주는 것은 말씀이고 그 기쁨을 빼앗는 것은 삼구(교만 – 육욕 – 소유욕)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길과 같고, 육체적 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돌밭과 같으며, 소유욕이 큰 사람이 가시밭과 같은 사람입니다. 말씀은 성령을 통해 내 안의 삼구를 부수어버리려고 하는데 내가 그것들을 좋아하여 놓지 않으려고 한다면 말씀이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수없이 읽어도 그 말씀을 통하여 기쁨이 내 안에 담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열심히 내 밭을 일구어가면 그 기쁨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커질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오는 뉴스들만 보아서 그런지 현재 상황은 아베가 큰 실수를 한 것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한국은 더 단결하여 일본제품을 거부하고 있고 일본 여행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들이 수출규제 한 품목 등에 대해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발 빠른 대응을 하여 오히려 소재 국산화율을 높이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 여론도 일본을 고립시키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베는 아마 자신이 내린 결정에 기쁠 수 없어 좌불안석일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 우리가 일본 제품을 많이 사줘서 평화를 빌어줬는데 그 평화를 거부해서 우리가 더 평화롭게 되는 상황이 아닌 지 싶습니다.

      이렇듯 기쁨을 잃는 것은 해석을 잘못하는 까닭입니다. 한국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말년 아베는 기쁨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해석을 하는 이유는 마음이 길과 같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면 잘 해석하고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씨앗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을 열매 맺게 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만이 삼구를 이길 수 있어서 하느님 나라를 올바로 해석하여 하느님 나라와 적대관계가 되지 않게 만듭니다. 주님께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망치로 우리 마음을 잘게 부수어 사랑과 기쁨의 열매가 충만하도록 청합시다. 이것이 기도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겸손해야 하느님 나라가 잘 보이고 해석되어 그 나라가 주는 기쁨을 영원히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고와 땀이 필요하다  

 -반영억신부-

 

몇 개의 작은 화분을 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보기는 좋은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 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 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자기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커가고 그 사랑이 이웃으로 향할 때 비로소 열매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가13,8).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능이 가까워 오면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 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새기고 행하는 만큼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말씀

-이종훈신부-


맑은 날이 있고 흐리고 비오는 날이 있다. 좋은 때가 있고 나쁜 때와 무료한 때도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말 그대로 주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릴 때가 있고, 알아듣기 힘든 때가 있으며 어떤 날은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로만 보일 때도 있다.

 

어떤 날은 가슴 벅차게 말씀하시고 또 다른 날은 콕콕 찔리게 아픈 말씀을 하신다. 또 어떤 때는 외계인의 언어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 날도 있다. 하느님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분이 아니니 내가 이랬다저랬다 하거나 내가 하루하루 조금씩 변해가는 거다. 그 변화가 성장이면 좋겠다.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그분이 나를 잘 찾으시게 있던 그 자리에 가만히 기다리는 게 더 낫다. 하느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내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 같지만 그분이 내게 다가오신다. 아니 이미 함께 계심을 내가 깨달아간다.

 

본래 인간은 하느님을 알 수 없다. 하느님이 알려주셔서 비로소 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당신을 알리시지만 말씀으로 가장 잘 드러내신다. 그분의 말씀은 교육이 아니라 창조다. 거기에는 치유, 깨달음, 양육, 선택, 견디는 힘이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존재를 담고 있다. 이 세상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오늘도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은혜로운 것도 있고 도전이 되는 것도 있으며 무슨 뜻인지 도부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있다. 알아들으면 좋고 알아듣지 못해도 괜찮다. 내가 도망가지만 않으면 그분은 나를 금방 찾으실 테고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전에 하셨던 말씀을 또 똑같이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제가 어떻게 우주를 창조하신 말씀을 다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제 몸도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알아듣는 것은 제가 그렇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딱 고만큼입니다. 오소서, 주님의 성령님!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그분이 오시는 길로 마중 나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송영진신부-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18-23).”

이 말씀은,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길, 돌밭, 가시덤불에 초점을 맞추면,
신앙생활의 어려움에 관한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1) ‘악한 자’, 즉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어도, 듣는 것으로만 그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으로 해석됩니다.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라는 말씀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신앙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실천하지 않아서 은총을 잃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의 일차 책임은 마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은총을 잃은 당사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 이 말씀은, 지능이 부족해서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머리가 나쁜 것은 죄도 아니고, 잘못도 아닙니다.
여기서 ‘깨닫지 못하면’은 말씀을 실천하려는 의지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머리가 좋아서 말씀을 금방 알아듣는다고 해서
남들보다 하늘나라에 더 쉽게, 더 빠르게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가 좋다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천을 해야 들어갑니다(마태 7,21).
신앙생활은, 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머리가 좋거나 나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실하게 실천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또는 공격을 물리치는 최상의 방법은 기도입니다(마르 9,29).
‘기도’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고, 교리에 대해서 잘 알아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런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도 모르고 교리도 모르지만 꾸준히 성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많이 알지만 전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을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2)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환난’이나 ‘박해’를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도 신앙생활의 큰 어려움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는,
“자기의 신앙에 대한 신념도 없고,
환난과 박해 때에 그것을 견디어내는 인내와 끈기도 없어서”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신념, 인내, 끈기는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꾸준히 ‘삶 안에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뿌리’가 없다는 말을,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
즉 ‘삶’이 아니라 머리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 운동선수들이나 음악 연주가들이 평소에 꾸준히 훈련하고 연습해서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예로 들어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신앙생활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삶으로) 해야 합니다.
꾸준한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강한 신념, 인내, 끈기를 키울 때,
믿음과 삶이 완전히 하나가 되고,
그것이 바로 튼튼하게 뿌리를 내린 신앙생활입니다.>

환난과 박해 때에 신앙을 잃거나 버린 뒤에,
“내 탓이 아니라 환난과 박해 탓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2-13).”
시련과 고난 자체가 기쁜 일은 아니고, 시련과 고난을 겪을 때에
자신의 신앙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쁜 일입니다.
그 기쁨은 나중에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때에
더 큰 기쁨을 얻게 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3) 신앙인들 중에서 먹고사는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부유하고 풍족한 사람들은 아쉬운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그들 중에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도 신앙생활의 어려움입니다.
걱정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그것만 걱정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큰 걸림돌이 됩니다.
(너무 힘든 상황 자체가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먹고살기가 힘들어도, 오히려 더 하느님을 찾고,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은 온갖 걱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힘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힘이 들든지 편안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간에
주님만 믿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은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3,18-23: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 마치 씨앗처럼 모든 이의 마음의 밭에 뿌려지지만 그가 내는 결실은 그 마음 토양이 어떠냐에 따라 모두 다르다고 하신다. 즉 풍성한 결실을 내느냐, 아니면 싹도 못 내고 죽이느냐, 싹은 내지만 즉시 죽이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생활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다 받았지만, 그 말씀이 잘 성장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가꾸느냐는 각자의 바탕과 노력과 열의와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나쁜 땅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이 있고, 좋은 땅도 백 배를 내는 곳, 예순 배를 내는 곳, 서른 배를 내는 곳이 있다. 길에 뿌려졌다는 것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인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신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 이 말씀은 쾌락과 이 세상의 걱정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거룩한 빵과 참된 양식을 가시덤불 가운데서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세상 걱정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씨앗이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삶을 지닌 것이며 지금의 상태,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많은 결실을 향해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씨앗이 그렇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과 물과 빛과 기후와 환경 조건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길바닥이나 돌밭에서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서 곡식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농사를 짓더라도 그러한 곳에서 결실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곳에 씨를 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의 밭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잘 싹트고 잘 자라서, 많고 좋은 결실을 낼 수 있도록 그 바탕과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길바닥이나 돌밭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고 곧 외면하고 마는지? 아니면 들을 때는 기쁜 마음으로 흥분하고 감격도 해가면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빠져 하느님 말씀을 숨도 못 쉬게 가두고 뒷전으로 미뤄 놓는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씀의 씨앗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으로, 조금씩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바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이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을 잘 성장, 큰 결실을 낼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마음,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자. 여기에 그리스도를 닮는 큰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마태 13, 23)

-한상우신부-

말씀의 시간을
살아가셨던
소중한 분들을
기억합니다.

말씀의 마음이
끝내 열매를
맺게되는 믿음의
마음입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깨닫고
믿음으로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말씀의 관계가
요아킴과 안나
마리아의
관계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씀이
다 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우리를 위해
낮아지고 우리를 위해
먼 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말씀이
사랑의 마음임을
믿습니다.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성가정의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말씀으로 가르치고
말씀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되셨던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일전에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풀이해 주십니다. "씨"는 곧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마태 13,19)이고, 씨가 뿌려진 땅이란 말씀을 들은 이의 "마음"(마태 13,19)입니다. 씨가 뿌려진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마태 13,23) 이의 마음이고, "길"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마태 13,19) 이의 마음이지요.

"돌밭"은 "말씀을 들으면 기쁘게 받지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마태 13,20-21), "가시덤불"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걱정과 유혹"(마태 13,22)으로 말씀이 질식되니, 말씀을 그저 듣고, 기쁘게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걸 알겠습니다. 관건은 그 말씀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인간의 자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은총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한 영역입니다. 지식이 많다고, 학위나 자격증이 있다고 쉬이 깨닫는 게 아닙니다. 학문적으로 많이 안다면 전문 이론과 자료에 접근이 용이하기는 하겠지만, 깨달음은 전 존재적인 사건이기에 머리만으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인간이 가진 모든 조건을 총체적으로 건드리시고 뒤흔드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십계명 이야기입니다. 시나이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자손이 시나이 산 앞 광야에 진을 치고는 하느님 말씀에 따라 계약 체결을 준비합니다. 셋째 날 아침, 드디어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 나타나셔서 그들이 지켜야 할 계명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이 계명들을 "왜 지켜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1)는 첫째 계명에 있을 겁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출발하고, 그 관계성에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탈출 20,5) 우리는 우상숭배를 금지하시는 이 말씀에서 역으로 우리가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배웁니다. 즉 "경배"와 "섬김"은 오직 하느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은 꼭 하느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종교, 민족, 직업 등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준수해야 하는 덕목도 포함합니다. 생명을 지닌 존재들 간의 질서와 존중을 위해서는 보편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근간에도 역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수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규칙이나 규율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십계명 앞에서도 그럴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갈 때, 주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을 위해 헌신한 기억을 떠올리기보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기억하고 쪼그라드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계명이 사랑 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더 사랑하기 위해 살피는 디딤돌로서가 아니라, 부족한 항목 체크 리스트 정도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는 계명 앞에서 그렇게 경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독서에 화답하는 시편에서 주님의 법을 가리키거나 수식하는 말씀들에 머무르다보니 법 앞에서 경직되었던 마음이 활짝 개이는 느낌입니다. "완전, 생기, 참됨, 깨우침, 올바름, 기쁨, 밝음, 맑음, 경외함, 순수, 영원, 진실, 의로움, 값짐, 감미로움..." 오늘 주님의 계명 앞에서 특히 더 생기 넘치는 아름다운 말씀들을 엮어 노래하는 시편 저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렇지, 계명은 사랑이지! 사랑하니까 주시는 거고, 사랑하라고 주시는 거지' 하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계명은 굴레가 아니라 자유니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은 이 계명들의 연장이고 적용일 터인데,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의 차이는 꽤 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 답 역시 오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복음 환호송) "바르고 착한 마음, 간직(머무름), 인내."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듣고 온 존재로 들은 말씀은 이 토양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하시는 분과 말씀이신 분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선량하고 순수한 마음과, 그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머물러 말씀이신 분에게 물들어가는 시간, 그리고 어떤 도전이 와도 말씀과의 밀회를 소홀히 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인내.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가 설령 많이 부족하더라도 희망을 놓지 않고 말씀을 끌어 안고 있다면, 비록 가난한 죄인에 불과한 영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말씀을, 당신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일치의 신비입니다. 말씀 묵상을 사랑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말씀의 씨를 마구 계속 뿌리시는 하느님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합니다.
비유의 내용을 보면 땅 또는 밭의 비유라고 함이 맞을 듯한데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뿌려진 씨가 떨어지는 네 가지 땅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씨 뿌리시는 하느님이 비유의 주체라고 주님께서는 분명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받아들이는 우리가 비유의 주체라면 땅이 왜 모양이냐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고 열매 맺지 못하는 귀책사유가 땅에 있지만
씨 뿌리시는 하느님이 비유의 주체라면
‘하느님은 씨를 왜 이렇게 뿌리실까’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리고 이 경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귀책사유가 땅에 있지 않고
씨를 그렇게 뿌리시는 하느님께 귀책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들에 씨를 뿌립니까?
그 아까운 씨를 낭비나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 같으면 씨를 가시덤불이나 돌밭에 뿌리지 않을 것이고
길바닥에는 더더욱 뿌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저는 멍청한 농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씨 뿌리기를 이해시키기 위해
성서학자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씨 뿌리는 방식을 예로 든 것뿐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아무튼 하느님은 아무 데나 씨를 뿌리는 분이시고
당신의 귀중한 말씀의 씨를 낭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본래 낭비가 많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는 하느님은
우리 눈에 주지 말아야 할 놈에게도 벌이 아니라 사랑을 주시고,
주실 뿐 아니라 퍼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북한에 조금 주고도 퍼부어준다고 비판하고,
이웃에게 조금 주고 엄청 많이 줬다 생각을 하는데
주님은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넘치게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러 하기에 그 사랑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없이 여기는 것 곧 무시하는 것인데
계시는 하느님을 없는 분으로 여기고 그분의 말씀은 그래서 말씀이 아니라
개소리거나 잔소리기에 이런 자들에게 말씀은 아예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말씀의 청취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뿌리시는 씨 덕분입니다.

시멘트 바닥에 조그만 균열이 와도 그 틈에서 풀이 싹트듯
다른 소리만 재밌어하고 하느님 말씀은 흘려버리던 사람도
하느님 말씀이 그 사람의 틈을 파고들 때가 옵니다.
사람들의 말이 시들해지고 마음이 허해지기 시작할 때지요.

그러나 아직 말씀의 토양이 부족하기에 유혹이나 시련이 닥치면
하느님 말씀의 싹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이내 말라비틀어집니다.

그런데도 하느님 말씀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 번 벌어진 균열이 점점 커지고 토양이 점점 많이 쌓이면
이제 말씀의 싹을 틔울 뿐 아니라 제법 큰 가지로 자라납니다.
그런데 근심걱정 때문에 다시 숨이 막혀 죽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 말씀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근심걱정 때문에 말라죽게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이제는 기도를 합니다.
근심걱정만 하던 사람이 이제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근심걱정만 하던 사람이 이제 근심걱정꺼리를 하느님 앞에 풀어놓습니다.
숨 막히게 하는 저 근심걱정꺼리를 없애달라고 기도하니 하느님께서
그것들 치우시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열매 맺는 땅이 되게 하십니다.

마구 그리고 계속 씨 뿌리시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28일 제16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