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7월 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19. 7. 19. 18:51

2019년 7월 20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그는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니.
(마태 12,14-21)


A bruised reed he will not break,
a smoldering wick he will not quenc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누룩을 넣어 반죽을 부풀릴 시간조차 없이 황급히 이집트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머뭇거릴 수 없어 양식도 장만하지 못한 채 그들은 이집트 땅을 빠져나와야 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뒤로 돌아설 수 없습니다. 오직 약속된 땅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광야였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끊임없이 그들이 나아가는 길을 방해할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방해하는 파라오도 있지만, 이스라엘 스스로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를 잊지 못하며 끊임없이 하느님께 한탄을 쏟아 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시고 이스라엘을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종 메시아가 백성에게 올바름, 곧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리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 곧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을 지키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드디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 곧 젖과 꿀이 영원히 흐르는 하느님 나라를 선사하셨음을 선포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문설주 상인방에 발라 이스라엘의 첫째 아들만 살려 주던 그 어린양의 피가 아니라, 모든 이를 구원할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 피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흘리게 할 예수님의 피가 결국 온 세상을 구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이렇게 보니 바리사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데 쓰이는 도구가 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신부님과 함께 목욕탕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께서는 목욕탕 관리사에게 가서 때를 미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때를 미는 것이 피부 건강에 좋지 않다고 매스컴에서 말하지만, 이 신부는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되어서인지 어쩌다 목욕탕에 가면 관리사에게 때를 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게도 때 한 번 밀어보라고 권합니다. 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샤워를 하기 때문에 때가 없다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한 번 때 밀어봐. 아마 깜짝 놀랄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때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 신부 다음에 저 역시 어렸을 때를 떠올리며 목욕탕 관리사에게서 때를 밀었습니다. 잠시 뒤에 관리사는 “어휴~ 때 좀 봐요.”라고 말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척 창피했습니다.

매일 샤워를 해도 몸의 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죄도 그렇지 않을까요? 종종 고해소 안에서 한참동안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에게 “죄 고백하세요.”라고 말씀드리면, 그제야 이렇게 이야기하시더군요.

“저 죄 없어요.”

매일 샤워를 해도 때가 나오는 것처럼, 아무리 깨끗이 산다고 해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죄를 짓습니다. 여기에 내 마음 속으로 짓는 죄까지 따지고 본다면 죄의 굴레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늘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성찰과 함께 자주 고해성사를 보면서 내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에 반해 예수님은 마귀 두목 베엘제벨의 힘을 빌어서 악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판단이 맞을까요?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고 자기와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단죄하려는 모습에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나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고 단죄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모든 민족들이 희망을 거는 이름입니다. 우리를 올바름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주님께 희망을 두지 않고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살아가면 힘든 삶,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의 이름입니다.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경험이다(데이비드 마커).



희망

우연히 어떤 할아버지 한 분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연세에 비해서 아주 건강하신 분이었지요. 그래서 “참 건강하시네요.”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말문이 터지셨습니다. 소위 ‘내가 왕년에....’라는 시리즈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어떤 운동을 즐겼는지부터 시작해서, 건강을 위한 식습관은 무엇인지... 그리고 과거에 자신이 정치인이었고 무슨 일을 했는지를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냥 연세에 비해 건강하시다고 말씀드린 것뿐인데 정치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건강과 정치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과거의 내 모습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의 모습에 자신이 없을 때 과거의 내 모습에 연연한다고 합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과거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즉, 이런 과거에 대한 말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연연하면 연연할수록 비참해지는 것은 내 자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바로 희망입니다.                   

'이미' 용서하신 하느님

-전삼용신부-


 어린 소년 쟈니는 조부모님을 방문하고 선물로 새총을 받았습니다. 그는 새총 쏘는 연습을 하다가 그만 실수로 할머니의 애완 오리를 죽게 했습니다. 그는 두려운 마음이 생겨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오리를 장작더미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보니 여동생 샐리가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할머니는 “샐리야, 설거지하는 것 좀 도와줄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샐리는 “오늘은 쟈니가 부엌일을 도와 드리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지 쟈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샐리는 쟈니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오리를 기억하지?”

      그래서 쟈니는 설거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후 할아버지께서 낚시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샐리는 저녁 준비하는 것을 좀 도와 주어야 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샐리는 씩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쟈니가 저녁 준비를 돕고 싶다고 했어요.”

      또 한 번 샐리는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오리를 기억하지?”

      샐리는 할아버지와 낚시하러 갔지만 쟈니는 집에 남아서 저녁 준비를 도왔습니다.

      쟈니는 며칠 동안 이런 식으로 샐리의 일까지 힘겹게 하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잘못을 자백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쟈니야, 다 알고 있었단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단다. 다만 샐리가 너를 노예로 삼는 것을 네가 얼마나 견디는지 두고 보았을 뿐이야.”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도자들은 율법을 강조하여 구원받기 매우 어려운 것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613개조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자신들과 같은 성인들만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이것은 마태오 사도가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름’으로 번역한 것은 ‘심판(crisis: 판결)’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심판’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제시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무자비한 심판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판이란 것입니다. 마치 이사악이 야곱을 심판할 때, 야곱이 ‘에사우’라고만 해도 에사우가 받을 상속권을 주는 것처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곧 심판에 관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오리를 기억하지?”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만 하면 이런 죄책감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아드님께 지우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죄를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못하니 계속 아담처럼 뒷걸음을 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도 믿기만 하면 지금 당장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갖지 못하던 이들이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나 사제들 정도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관념을 예수님은 뒤집어놓으신 것입니다. 너무나 혁신적인 하느님 자비에 관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 기쁜 소식이 너무나 단순하고 쉬워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구원을 받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율법을 지키느라고 고생한 건 뭐야?’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율법을 열심히 지키느라 수고했던 자신들에게 영광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시이 도오기찌라는 범죄자의 이야기입니다. 이시이는 현대 범죄 역사상 유례없는 범죄자로서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했으며 방해하는 자는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는 형무소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두 사람의 캐나다 부인이 그를 방문하고 창살을 통해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를 포기하고 성경 한 권을 주고 떠났습니다.

      이시이는 무심코 그것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읽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야기가 있는 곳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 말씀이 그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읽는 것을 그만 두었다. 마치 5인치나 되는 못으로 꿰뚫린 것처럼 내 마음은 찔렸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믿었다는 것과 그리고 굳어 버렸던 내 마음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후에 간수가 이 사나이를 교수대에 데려가려고 왔을 때 그가 그곳에서 본 것은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라 미소로 빛나는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는 소식입니다. 이미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심판의 진실입니다. 믿기만 하고 다가온다면 주님은 받아주시겠지만, 그것을 믿지 못하여 죄책감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려 한다면 구원될 수 없습니다. 무자비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무자비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가장 절망적인 사람이라도 희망할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가장 큰 죄인이라도 지금 당장 마음만 바꾸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반영억신부-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싫어하고 시기질투하며 심지어 미워합니다. 봄비처럼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 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봐 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 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에게는 한 숨 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용수철을 누르듯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습니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을 치유 시켜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면서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맙니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고 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나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을 때 침묵의 가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 상하고 깨져서 할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되어지는 이들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세상,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영혼의 울림으로 들려옵니다. 그래서 거리에서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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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어떤 일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면 게을러서이고, 내가 시간이 걸리면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남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을러서이고, 나는 바뻐서이다. 누가 하라하지 않는데 하면 월권이고, 나는 진취의 기상이 있어서이다. 남이 강력한 주장을 하면 그 사람은 고집스러운 것이고, 나의 경우는 단호한 의견발표이다.” 그야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입니다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강인함
-이종경신부-


고등학교 때 알게 된 성당 친구가 있습니다. 뒤늦게 세례를 받은 그는 성당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싸움이 생겼는데, 싸움의 중심에는 그 친구가 있었습니다. 사실 말이 싸움이지 일방적으로 맞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척이나 많이 맞은 얼굴에는 별다른 상처 하나 없었고, 친구는 여전히 씩씩했습니다.

그러고는 나중에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 그때 왜 맞고만 있었어?”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나 이제 성당 다니잖아.” 성당에 다니면서는 다른 사람을 때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일꾼이지만, 그의 모습은 강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강함이 아닌 부드러움, 아니 부드러움을 넘어 나약함이 그의 모습입니다.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고, 불꽃을 잃은 심지도 꺼버리지 않는 섬세함과 연민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당신의 연약함으로 강함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신비를 알려준 그 친구가 참 고맙습니다.

의로운 약함과 참된 강함은 신비로이 통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2,14-21: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다른 손처럼 건강하게 해 주신 것을 보고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를 했다고 한다. 악한 일을 모의하는 사람들은 빛을, 바른 길을, 생명을, 보물을, 진주를, 사랑 그 자체와 평화를 없앨 모의를 한다. 이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으로 물러가셨다고 한다.

 

그분이 물러가신 것은 그들의 모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악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즉 당신을 자랑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이어서 이사 42,1-4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어리석은 지도자들로부터 조용히 물러나신다. 그들 안에 있는 부러진 갈대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연약한 모습이라도 파멸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들이 언제나 당신께로 회개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참아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도록 하라고 하신 분이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참아주시는 분이다. 이로써 모든 민족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 말씀은 이것들을 쉽게 하실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온유함을 뜻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참아주실 수 있는가? 이는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참아주셨듯이, 그분의 구원업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다 이루시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때에는 터무니없고 모순되는 논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므로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분은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는 선언을 주님께로부터 들어야 할 것이다.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12, 17)

-한상우신부-

말씀으로
만나게되는
신앙의 살아있는
순간들입니다.

말씀은
이루어지는
결과보다 여정이
더 중요합니다.

말씀은 가장
적절한 때에
우리 삶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끝내 말씀이
희망이 되고
말씀이 끝내 승리를
일구어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말씀은 우리 삶
모든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실패를 성공으로
이끌어줍니다.

말씀은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말씀은 고갈된
우리 영혼을 생기로
가득 채워줍니다.

매일매일이
말씀이 피어나는
순간들입니다.

주님 말씀으로
견디지 못 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 말씀은
끝내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희망입니다.


-오상선신부-


어제에 이어 안식일 논쟁을 촉발하는 사건(마태 12,9-13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이 하나 더 일어난 뒤, 오늘의 복음 대목으로 이어집니다.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 규정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시는 예수님이 못마땅해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마태 12,14) 하지요. 율법 조항들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의무를 다해온 그들은 예외가 만드는 작은 실금들이 자칫 전체를 뒤흔드는 균열로 이어질까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마태 12,15)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아직 당신의 때, 아버지의 때가 오지 않은 줄 아시기에 고요히 물러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을 표현하기 위해 인용한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이사 42,1-4)에도 나오듯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마태 12,20)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마태 12,15) 물러나신 예수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분명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피해 변두리로 물러가신 건데 사람들이 굳이 예수님 뒤를 따라오는 겁니다. 종교 중심지에서 공인된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는 받아보지 못한 관심과 배려, 인격적 눈맞춤이 그들을 매료시킨 걸까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면서 백성을 위해 움직이시는 장소가 중심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 한가운데가 아니어도, 종교 지도층 휘하가 아니어도 하느님의 은총과 만날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빌미를 제공한것이 안식일 치유였음에도 예수님은 그치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일, 아버지의 일을 하십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모든 율법 규정을 우선하는 하느님의 뜻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 내면에 강인하고 굳건한 심지가 보입니다.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마태 12,19) 않으시지만 "올바름을 선포"(마태 12,18)하는 데에서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섬이 없으신 주님의 종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파스카 밤의 광경이 펼쳐집니다. 온 이스라엘이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대목에서는 "모세"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순간을 위해 활약해 왔고 앞으로도 활약할 민족의 지도자인데, 지금 이 순간에는 모세 대신 주님께서 전면에 드러나고 계십니다. 파스카의 선두에는 그동안 중간 역할을 하느라 수고한 모세를 넘어서 진정 하느님께서 계심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탈출 12,42) 순수 영이시고 물질과 형상에 매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표현하기 위해 때로는 의인화 기법을 사용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처럼 낮과 밤 구조에 묶여 계시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빠져나가는 다급한 상황에서 내내 충실히 희생적으로 곁을 지켜주셨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밤을 새우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신 하느님께서 실제로 인간이 되신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의인화된, 육화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인간처럼 표현해서라도 보다 더 가까이 그분을 느끼고 싶었던 사람들의 염원에 대한 응답이고 실현이지요. 당신 백성을 위해 쉼의 때인 밤 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우신 하느님의 유전자는, 법이 규정한 쉼의 날임에도 자비의 행위를 멈추지 않으시는 예수님에게로 당연히 이어집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들 중 하나를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바로 그 "선택받은 종"이심을 밝힙니다. 백성 가운데에 "올바름"을 세우되 무력이나 재물, 율법에 기대지 않고 사랑과 자비에 기대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실 분이라는 소개입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율법은 관리자의 시각이 아닌, 수혜자의 입장에서 사랑과 자비의 시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시점에 다다랐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느님 현존의 중심 이동은 예수님께서 물러나신 장소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로의 회귀까지 요구합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금지 규정에 순응하던 차원에서, 더 사랑하기 위해 "그 이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느님 심장에서 찾아내어 실행하는 자발적 차원으로 넘어서라는 초대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초대에 순응하여 더 사랑하고 더 자비를 베푸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김찬선신부-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여러분은 관종이란 신조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관심종자關心種子 또는 관심병觀心病종자의 준말이지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괴상한 짓을 한다거나
나쁜 짓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깔보는 표현입니다.

사실 관심을 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바람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이것을 깔보거나 나쁘게 얘기할 것까지는 없다할 수 있는데
관심종자나 관심병종자는 이 정도가 아니라 병적일 정도로
자신이 알려지길 바라고 관심 받고 싶어 하는 것이기에 깔보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깔보는데도 관심종자들은
이에 대해 개의치 않고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요즘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지요.
요즘 정치가들은 자기 지지자들을 모으기 위해서 막말을 하고,
유투버들은 광고수익을 올리려고 이상한 것들을 인터넷에 올리곤 하지요.

그런데 관심종자는 정치적인 이유나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심리적인 이유나 존재론적인 이유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모르고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것을 못 견디기에
좋은 쪽으로 좋게 관심을 못 받을 바에는
나쁜 쪽으로 안 좋게라도 관심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대개 자기는 남에게 관심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고는 싶은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받고 싶은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을 때 무화無化의 두려움을 못 견디고,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될까봐 두려운 겁니다.

존재감이라는 말이 있고 존재감이 없다는 말도 있지요.
분명 같이 있는데 그가 있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고,
심지어 있는지 없는지조차 관심이 없는 것인데
존재감이 없거나 떨어지는 경우가 두 가지입니다.
힘이 없을 때와 사랑이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을 경우 보통 연기 나는 심지를 끄고,
부러진 갈대를 꺾는 것처럼 힘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도 존재한다는 느낌을 가지려고 합니다.

나 여기 있다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치고,
내 말을 안 들으면 죽이겠다고 하거나 실제로 죽이고,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이 자기를 봐주면 그때 존재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힘도 없고 사랑도 없으면 곧 관심을 끌만한 아무 것도 없으면
내 사는 곳에서 존재감이 없게 되고, 없는 사람 취급 당할까봐
이상한 짓이나 나쁜 짓을 해서라도 존재감을 가지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직한 존재감과 첫째가는 존재감은 사랑의 존재감입니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자기가 자랑스럽고 그래서 오늘
주님처럼 자기를 주장치 않고 알리지 않아 존재감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도 좋고, 심지어 남을 위해 내가 무화되어도 좋습니다.

이렇게 사랑할 때 진정한 존재감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폭군과 같이 힘의 존재감은 있을 때 느껴지나
그가 사라지면 존재감도 사라지지만
어머니와 같이 사랑의 존재감은 있을 땐 모르다가 없으면 느껴집니다.
폭군은 없어도 되고 없어지길 바라나 어머니는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사랑만이 진정한 존재의 이유이고 의미이고,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5년 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