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2019년 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 11,28-30)
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을 “있는 나”라고 하시며,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광야로 나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게 허락해 달라고 말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이름이 ‘야훼(에흐예)’, 곧 ‘있는 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야훼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나는 있을 것이다.’ 또는 ‘나는 있다.’입니다. 이 낱말은 명사가 아니라 있음, 곧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이름은 단순히 그 사람에게 붙여지는 의미 없는 낱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특징, 곧 ‘우리와 함께 항상 계신 분’, ‘아브라함 때도, 이사악 때도, 야곱 때도 계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더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도 늘 함께 계셔 주시는 분’이라는 특징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억압받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참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음을, 당신이야말로 참된 ‘야훼’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밝히시며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권고하십니다. 여기서 ‘온유하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프라위스’입니다. 이 낱말은 본디 히브리어 ‘아나빔’(가난한 이들)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온유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온유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온유한 이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마태 5,5 참조). 곧,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그 땅, 하느님 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의 삶을 잘 떠올려 보면 ‘빨리빨리’ 보다 ‘천천히’가 더 좋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섣부른 선택에 후회하기보다는, 오랫동안 신중하게 생각해서 마음에 드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천천히’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늘 서두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떤 분들은 살면 얼마나 살겠냐면서 너무나 짧은 인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서두르다가 놓쳐버리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천천히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이제 막 받았다고 주님이 내 앞에 떡 하니 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을 향해서 첫 발을 떼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서두르지 말고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 앞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과정 안에서 후회의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 용기를 내어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우리의 짐이 무거워 힘들어도 함께 하시면서 위로와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 가득하신 분께서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이 모든 짐들을 처리하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어떻게 온전하게 알 수 있을까요? 세례를 받자마자 곧바로 알 수 있는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작년에 전설의 록밴드 ‘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영화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였습니다. 저 역시 퀸의 노래를 상당히 좋아했기에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미처 몰랐던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퀸의 리더 ‘프레디 머큐리’가 동양계였다는 사실, 그룹이 해체 되기도 했다는 사실 등을 전혀 알지 못했었지요. 그저 노래만 듣고 좋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서는 이 노래가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새롭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퀸’을 더욱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알면 알수록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고 그래서 그분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듀크 대학 연구에 의하면 우리 행동의 45%는 결정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양치질을 할 때 어느 쪽 치아를 먼저 닦습니까? 신발을 신을 때에는 어느 쪽부터 먼저 신습니까? 세수할 때에는 어느 손이 먼저 얼굴에 닿습니까? 그밖에도 화장실 갈 때, 침대 정리할 때, 운전할 때 등등 우리의 삶 안에서 많이 하는 행동을 하게 될 때, ‘나는 결정 했어. 이렇게 할 거야.’라고 결정을 하고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바로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내 삶 안에서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좋은 습관을 그리고 내 자신의 성장을 위한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도 습관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좋은 모든 것들이 나의 습관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때, 하늘 나라는 멀리에 있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에너지가 넘친다
-전삼용신부-
‘최강의 인생’을 쓴 데이브 아스프리는 자신의 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돈과 권력과 쾌락을 다스렸는지 그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 째는 지금 이렇게 절제 없이 산다면 20년 후에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상상하는 20년 후의 나의 미래를 위해 지금 ‘아니오!’란 말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애정이나 인기, 돈이나 명예, 쾌락에 휩쓸리다보면 거기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빼앗겨 정작 힘이 필요할 때 주저앉고 말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의사결정이 아닌 이상 삶의 모든 패턴을 자동화하라는 것입니다. 몇 시에 일어나서, 어떤 운동을 얼마나 하고, 식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할 것인지, 출근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귀가해서는 어떻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의 자신의 욕구를 절제해야 하고, 그 방법은 욕구를 이기기 위해 평소 생각과 판단에서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학계에서 진행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판사들이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가석방 심사를 하는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10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1,000여 차례가 넘는 공판을 조사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판결 결과’는 범죄 유형이나, 수감자의 학력, 수감 생활 등의 변수보다는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시간대’에 더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전에 내리는 공판에서는 판사가 매우 너그러운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판사들은 수감자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점심 전에는 거의 0%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점심 식사와 잠시 휴식을 거친 뒤에는 다시 우호적 판결을 내릴 확률이 65%까지 오른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내리는 시간대’와 ‘판결 결과’의 상관관계는 꾸준하게 반복되어 나타났던 것입니다.
‘시간대’가 ‘판결의 결과’를 가르다니,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을까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가석방 승인 여부를 둘러싼 여러 의사결정들이 판사들의 ‘의지력 계좌’를 점차 소진시켰던 것입니다. 따라서 의지력이 바닥났을 때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도출할 확률을 높이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의사결정 피로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의사결정을 많이 하면 할수록 피곤해져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생각과 판단은 우리의 의지력을 소진시켜 결국 통제해야 할 것들을 통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참조: ‘최강의 인생’, 체인지 그라운드; 웅 이사의 하루공부, 유튜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은 바로 구원받기 위한 믿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벳사이다, 코라진, 카파르나움은 믿음이 없어서 수많은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간직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너무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생각해야 할 때에 부모에게 맡겨버립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부모가 자라고 하면 자고 학교에 가라고 하면 갑니다. 숙제를 하라고 하면 하고 밥을 먹으라고 하면 먹습니다. 이것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와 겸손으로 얻는 ‘안식’은 ‘쉼’입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겸손하면 어린이처럼 에너지가 넘칩니다.
축구나 야구,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지친 선수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경기에 뛰게 하지 않습니다. 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잘하기 위한 실력도 중요하지만 선택을 하기 위한 에너지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와 같은 사람들은 옷을 한 가지만 입었습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에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니까 자신의 에너지의 한계를 알기에 하루의 일과를 정해놓고 온유하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 부모님인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해 놓은 시간표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준 하루를 이렇게 알차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주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그래서 주님의 뜻에 따라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미리 생각해보고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잠자기 전에 감사 일기를 쓰고 다음 날 할 일들을 시간을 생각하며 시간표를 짜 봅시다. 다음 날 훨씬 힘이 덜 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메어주시는 멍에를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한 이들은 일일이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통해 평안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내 멍에는 편하다
-반영억신부-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옳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셨고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감당하면 짐과 멍에는 가볍고 편하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요한5,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한계, 죄스럽고 못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정령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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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에 목말라 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시면서 우리의 목마름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의미에서 목마름이 아니라 충만한 생명, 악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풀려나는 생명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또한 육화를 통해서 하느님은 한 인간, 나자렛의 예수 안에 당신의 목마름을 태우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을 목말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사랑에 목말라 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목마름은 예수님 안에서 타오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서 인간적 목마름과 신적 목마름이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이 갈망은 이 목마름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수난 전날 성자께서 성부께 드린 기도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모든 이들의 일치를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악마는 분열의 아비이고 항상 갈라놓고 항사 싸움을 일으키며 많은 악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목마름이 또한 우리의 목마름이 되기를 바랍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2015년 1월 25일).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키려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악의 세력에 짓눌리며 살고 있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를 못해 절망해 버린 사람들, 또한 자신의 약함과 죄의 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세상을 건설하는 법,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이것은 겸손하게 시작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높이 올라가려 한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높은 건물을 지으려 한다면 터부터 닦아야 한다. 이것이 겸손이다. 건물이 높아지면 높이 질수록 그 기초는 그만큼 깊어야 한다. 기초가 튼튼한 만큼 건물도 튼튼하게 지을 수 있다. 건물은 높이 올라간다. 그러나 그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은 먼저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29절) 주님 안에서만이 이러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면 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이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열성적인 이들에게 주님의 계명은 가볍다. 그 멍에는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파생되는 어려움을 이야기 한다. 이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멍에는 이미 멍에가 아니라,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이 된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불쏘시개인 부정이라는 멍에를 벗어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들게 보이는 것은, 세상의 욕망에 물든 마음은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없다.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이다. 그 무게는 우리가지지 못할 만큼 무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짐은 우리의 힘을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사람들을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그것을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는 힘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즉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천국의 멍에를 지도록 해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그러한 삶을 노력하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한상우신부-
땅과 노동
땅과 휴식이
주님을 향합니다.
휴식은
하느님을 향한
참된 순종입니다.
휴식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휴식은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내어드리는 기쁜
봉헌입니다.
휴식과 실천은
하느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총입니다.
휴식을 통해
삶이 회복됩니다.
휴식을 통해
주님을
만나게됩니다.
신앙안에는
하느님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휴식도 필요합니다.
휴식도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놓는
믿음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님안에서
힘과 안식을 다시 얻는
은총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을 만나기에
십자가는 편하고
십자가는 가볍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말씀하시는 분의 의지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예수님께서 삶에 짓눌려 허덕이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모두" 당신께 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자신감이 묻어 있습니다. 당시는 물론 오늘날 인간 실존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데다, 그 해결책을 바로 당신께서 주실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영육으로 지친 이들에게 예수님이 주실 선물은 바로 "안식"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쉼 없이 달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더 가지려고, 더 영향력을 끼치러고 자신과 주변을 몰아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해볼 만큼 다 하고 나서 탈진해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이들도 있습니다.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 세우고 덧쌓고 허무는 욕망의 탑은 저마다의 개성만큼 다양합니다. 그 욕망이 자신을 갉아먹는 줄 모르는 채 탑 쌓기에 골몰한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건 안식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시지만 우유부단하거나 나약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이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 아시기에 당당하고 확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자신감은 스스로를 잘 아는 겸손에서 흘러나옵니다.
자기 꼴을 조금씩 알아가는 이라면 타인에게 "나에게 오너라!"라든가 "나에게 배워라!"라는 말을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자신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내세울 것도 없으며, 오히려 드러날까봐 전전긍긍 하게 만드는 어둠과 죄악의 실체를 직면하게 되니 그렇습니다. 그러니 당신께 배우라는 예수님 말씀은, 자신은 물론 타인과 세상에 지친 우리에게 참 새롭고 신선한 초대입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명령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밝혀지는 역사적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절규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계약을 기억하신 하느님께서 모세의 질문에 당신 이름을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밝히십니다. 그분은 누구에게도 어디에게도 기인하지 않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참 존재자이십니다.
"있는 나". 있음은 처음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영원한 현존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세상 누구도, 역사의 어느 순간도 하느님의 현존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있음"이 온 세상 모든 역사의 씨줄 날줄을 엮어 오셨고 여전히 엮어가고 계십니다.
"너희를 끌어 내어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탈출 3,17)
하느님의 굳은 결심이 느껴집니다. 그분은 모세에게 당신의 확고한 의지를 단호히 피력하십니다. 그분의 결정에는 그 자체로 실현이 담겨 있습니다. 그 실현이란 오늘 독서 마지막 부분에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탈출 3,20)
모세는 이처럼 부르심의 순간부터 하느님께서 이루실 일의 결과까지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모세에게는 "있는 나"께서 완성하실 일에 대해 일말의 의혹이나 의구심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세상이 메워 준 멍에를 벗고 하느님의 멍에를 메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고역이었던 세상 멍에가 더 달콤하고 수월했다는 망각적 향수에 사로잡혀 후회와 불평, 반항과 반역의 헛발질로 헤매기도 할 겁니다. 이 모든 걸 아시고도 당신 백성에게 자유와 해방을 이루실 하느님은 진정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
주님이 지워주시는 멍에가 세상 안에서 바둥거리며 지고 있는 멍에보다 편하고 가볍다고는 하지만, 사실 두 멍에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자꾸 비교선상에 놓고 저울질하다보니, 전환의 과정에서 마찰과 소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이 곧 이 전환의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에게 오너라!" "나에게 배워라!" 하시는 예수님의 멍에를 받아 지려면 일단 지고 있던 세상의 멍에는 벗어야겠지요. 그 고통스런 무게는 물론, 익숙함까지도 내려놓고 떠나보내야 새 멍에와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종살이의 멍에를 벗기고 지워주실 새 멍에가 자유와 해방을 약속한다면, 예수님께서 지워주실 새 멍에는 진정한 안식을 보증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길 원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온유와 겸손으로 오늘의 고생과 짐을 집시다. 그분이 함께 가볍고 편한 멍에로 받쳐 주시겠다는데 그 까짓 것 뭐 별거 있겠습니까. 아자아자!

최고수에게 배우는 고수들
-김찬선신부-
우리는 인생길을 가는, 길 떠나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길에는 우리가 져야 할 짐들이 있고,
누구나 예외 없이 나름의 자기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나름대로 다 힘겹고,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사는 가리봉동 남구로 역 근처를 나가 오가는 사람들의 군상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제가 마치 철학자가 된 듯 인생을 넓게 보게 됩니다.
어제도 나가 오가는 사람을 보고 있으니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축 처진 어깨에 무거운 배낭을 하나 같이 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늙은이들이었습니다.
폐지를 싣고 남구로 역의 비탈진 길을 내려가는데 그 모습이 위태롭습니다.
그것을 보는 제가 서글퍼지면서 저 젊은 가장은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저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한 때 저 젊은이 같았던 늙은이는 이제
자기 한 몸 부지하려고 저리 위태롭게 짐을 싣고 가는구나 생각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순간부터 가족을 위해서건 자기 한 몸을 위해서건
누구나 다 짐을 져야 하는데 이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당신께 오면 우리가 안식을 얻도록
짐을 벗겨 주시겠다거나 덜어 주시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짐을 내려놓고 싶어 기대를 걸고 갔던 사람은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자기 짐을 내려놓으라거나 벗겨 주시겠노라 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인생길을 가는데 혼자 가지 않고 굳이 당신을 따라 가려는 사람은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시는데 다만 오늘 말씀처럼 어떻게
자기 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 가르쳐 주시겠다하시고
그것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어떤 사람의 짐은 가벼울까?
어떤 사람에게 안식이 없고 어떤 사람은 안식을 얻을까?
길 떠나며 많이 가지고 가려는 사람에게 짐이 무겁습니다.
같은 짐이라도 무겁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에게 짐이 더 무겁고,
누구나 져야 할 자기 짐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짐이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이 없는 사람이란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지금 나의 처지와 상태에,
지금 나에게 맡겨진 일과 책임에,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에게,
“예”하지 못하고 “왜”하는 사람입니다.
“예”하지 못하고 “아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예”하지 못하고 “더”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께 가서 배우지 않는 사람이 짐을 무겁게 지고
그래서 안식도 없습니다.
우선 주님께 가지 않는 사람의 짐이 무겁고 그래서 안식이 없습니다.
주님께 가지 않고 혼자 지겠다니 짐이 무겁고 그래서 안식이 없겠지요.
다음으로 짐 지는 법을 배우지 못하니 짐이 무겁고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지기 고수시고 최고수시기에
온유하고 겸손하게 지면 짐이 가볍고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최고수에게서 한 수 배워 고수가 되고픈 사람은 오늘 주님께 달려갑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20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