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2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2019년 7월 12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마태오 10,16-23 )
You will be given at that moment
what you are to say.
For it will not be you who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야곱은 아들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산을 가지고 이집트에 들어가 아들 요셉을 만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시며, 당신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을 것이나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셉 덕분에 야곱의 가족은 이집트 땅 고센에 정착합니다. 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고센 땅은 이집트에서도 가장 비옥한 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영원한 하느님이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던 브에르 세바에서(창세 21,33; 26,25 참조) 하느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야곱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며,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을 박해를 생각하시며 “뱀처럼 슬기롭게” 살라고 권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박해를 피하여 대충 타협하며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을 따르다 보면 미움을 받을 각오도 해야 하고, 박해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일부러 박해를 받으려고 찾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는 박해가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뱀처럼 슬기로워야 합니다. 사실, 박해자들이 박해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세상이 박해하고 거부하는 것은 주님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일꾼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박해하는 이들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난 깨달았어. 모든 것은 결국 어느 정도는 ‘그러면 좀 어때’라는 것을, 오늘 할 일을 다 못했어. 그러면 좀 어때? 차가 잘 안 나가. 그러면 좀 어때? 돈이 별로 없어. 그러면 좀 어때? 부모님은 날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면 좀 어때?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해방되는 기분이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내 방식이 될 거야.”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좀 어때?’라면서 살아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유 있게 살아가는 세상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훨씬 더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러면 좀 어때?’라는 마음을 간직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의 마음을 계속해서 키우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유가 없고 초조해질 수밖에 없고, 긍정적이기 보다 부정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자유로움보다 억압과 구속의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그러면 좀 어때?’라는 마음을 품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생기면 이러한 마음을 품기가 훨씬 더 쉬워집니다. 어린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자기 옆에 부모님이 계시면 자신 있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하지만 자기 혼자만 있다면 자신 있게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물쭈물하면서 주위 눈치만 보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믿을 대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좀 어때’라는 마음은 믿음의 대상이 있을 때 훨씬 더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또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그러면 좀 어때?’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더욱 더 자유롭게 살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반대자 앞에 서게 되는 위험의 순간에서도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야말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나 지혜롭지도 또 순박하지도 못한 모습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슬기롭지 못한 모습입니다. 또한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만을 새기면서 부정하는 것은 단순하게 믿고 따르는 순박함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더욱 더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좀 더 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좀 어때?’라는 마음을 품으면서 말이지요.


어떤 말을 만 번 이상 되풀이하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렇게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기억을 하고 지향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도 이 지향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그 결과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늘 되풀이하면서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어떤 분께서 자신은 늘 이렇게 기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어렵고 힘든 이들이 주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게 해주세요.”
늘 기도의 시작에 이 말을 하기 때문에 만 번 이상 되풀이 한 것이 분명한데,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이 이루어지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위로와 힘을 받는 통로가 다르고, 또 그 강도 역시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말이 또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루어지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모호하게 “알아서 해주세요.”라는 기도보다는 주님의 손길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영과 일치된 삶의 평온함
-전삼용신부-
생후 4주 때 각기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자라다가 39년 만에 난생 처음으로 만난 일란성 쌍둥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둘은 똑같은 ‘짐(Jim)’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키도 180센티미터로 똑같았고, 체중도 90킬로그램으로 똑같았습니다. 미네소타대 연구진이 조사해보니 더욱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났습니다.
- 둘 다 어릴 때 ‘토이(Toy)’라는 이름의 애완견을 갖고 있었다.
- 둘 다 처음엔 ‘린다’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했다가 헤어지고 ‘베티’라는 이름의여성과 재혼했다.
- 둘 다 아들의 이름을 ‘제임스 앨런’이라 지었다.
- 둘 다 엷은 파란색 ‘쉐보레’ 차를 갖고 있었다.
- 둘 다 똑같은 상표의 담배를 피우고 똑같은 상표의 맥주를 마셨다.
- 둘 다 소방관과 보안관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 둘 다 손톱을 깨무는 습관과 편두통이 있었다.
제퍼슨 의대의 버렌트(Thomas Behrendt) 박사팀은 일란성 쌍둥이들을 각기 짝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해놓고 한쪽 쌍둥이에게 눈을 감도록 해보았습니다. 그의 뇌파가 즉각 알파파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있는 한쪽 쌍둥이의 뇌파도 동시에 알파파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참조: ‘왓칭 2; 텅 빈 공간이 진정한 나일까?’, 김상운, 정신세계사;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책 저자의 사상은 가톨릭 교리에 맞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저는 다만 예화를 인용할 뿐이지 책 자체를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같은 염색체를 가지고 어머니의 뱃속에서 같이 자란 쌍둥이들은 커서도 저런 일치를 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품 안에서 오랜 시간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또한 지금도 하느님 품 안에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 언제든지 하느님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하느님과 비슷해질 수 있을까요? 하느님과 비슷해지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됩니다. 그러면 나는 고생을 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서 큰 업적을 쌓고 주님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보내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야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파견하실 때도 같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세상은 천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에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 예언자들을 죽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세상에 파견된 자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이 아니라 박해가 약속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영광을 바라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결국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맙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나의 힘으로 복음을 전하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하느님의 주파수에 맞추어놓고 나는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의 마이크가 되어드리면 됩니다. 마이크로 말하는 이가 두려울 수는 있어도, 마이크가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나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내가 완전히 죽지 않고서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저도 강의 전에는 걱정이 되어 내용을 되새겨보며 긴장을 합니다. 그러다 끝나고 나면 ‘주님께서 다 하시는 일인데, 내가 왜 긴장을 했지?’라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그러면 알게 됩니다.
‘아, 내가 주님의 영광이 아닌 내 영광을 위해 강의를 하려고 했구나!’
긴장되고 떨리는 이유는 자신의 영광을 찾기 때문입니다. 나를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세상의 구원만 생각한다면 지금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지금의 고통은 ‘나’를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냥 나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위 쌍둥이처럼 하느님과 닮게 되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을 보며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자신의 저서에서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어떻게 버티어냈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교도관들이 윽박지르며 온갖 욕설을 쏟아낼 때도 내 머리엔 시와 이미지가 물밀 듯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난 자유롭고 행복했지요. 어떤 죄수들은 철조망을 뚫고 탈출하려 했지만, 내겐 어떤 철조망도 없었거든요.”
그는 수용소에서 겪었던 10년간의 경험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저장하여 그 기억을 바탕으로 ‘수용소의 군도’를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솔제니친은 하늘로부터 오는 영감과 나중에 이것을 통해 쓰게 될 자신의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지금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나로부터 탈출하여 하느님과 이웃의 행복만을 바라게 될 때 지금의 고통으로부터도 탈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업적도 남기게 됩니다.
나의 영광을 위한 모든 걱정근심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오시는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의 쌍둥이가 되어드립시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걱정은 나를 생각할 때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 어떤 풍파가 닥쳐오더라도 항상 자신의 삶에 대해서 Yes!라고 외쳤던 요셉!
-양승국신부-
요즘 첫번째 독서로 봉독되고 있는 창세기에서는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스토리가 소개되고 있으니, 요셉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특별한 사연입니다.
요셉의 생애는 참으로 기구했고 파란만장했습니다. 한 며칠 계속해서 연재되고 있는 그의 스토리를 묵상하다보니, 웬만한 인기 주말 드라마 저리 가라입니다.
아버지 요셉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던 어린 귀공자 요셉에게 난데없이 다가온 십자가는 그 나이에 감당하기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형들로부터의 철저한 응징, 어둡고 깊은 수렁 속에 홀로 남겨짐,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가는 처량한 신세,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용서가 안 되는 형들의 가혹한 행동...이집트에서의 노예살이와 우여곡절...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 충만했던 요셉,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했던 요셉이었습니다. 드라마틱한 삶이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가운데, 마침내 그는 대제국 이집트의 재상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평생 꿈꾸어오던 장면, 형들과의 재회 순간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대기근을 견디다 못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까지 오게 되었는데, 마침 식량 판매의 결정권자가 요셉이었습니다.
제가 요셉이었다면 그래, 정말 오랜 세월 내가 참아왔다며, 그간 참아왔던 서러움과 분노를 형들 앞에서 있는 데로 다 쏟아놓았을 것입니다.
“형님들! 내 얼굴 기억 안나세요? 형님들이 죽일 작정을 하고 깊은 구덩이 속에 던져버린 요셉입니다. 형님들! 대체 그때 왜 그러셨어요?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실 수 있나요? 그러고도 밤에 잠이 오던가요? 밥이 넘어가던가요?”
그러나 요셉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참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기 45장 4~5절)
형들의 만행으로 인해 그 어린 나이부터 갖은 고생 다 겪고 숱하게도 죽을 고비를 넘겼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하지 않습니다. 크게 용서합니다. 오히려 형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자 요셉의 형들은 엄청난 불안감에 쌓이게 됩니다. ‘이제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으니, 그간 참고 있었던 요셉이 우리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철저하게 보복하고 응징하겠지?’ 하는 생각에 요셉을 찾아와 엎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말까지 건넵니다.
“이제 우리는 아우님의 종들일세.”(창세기 50장 18절)
형들의 태도에 깜짝 놀란 요셉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들 하지 마시라고 만류합니다. 그리고 형들을 따뜻이 위로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창세기 50장 19~21절)
자신에게 닥친 크나큰 불행과 역경조차도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바라봅니다. 혹독한 시련과 십자가를 하느님 은총의 선물로 바라봅니다. 참으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요셉의 인생관입니다. 그 어떤 풍파가 닥쳐오더라도 항상 자신의 삶에 대해서 Yes!라고 외쳤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참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만사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매사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반영억신부-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굳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예수님이시라면?'이라는 자문이 필요합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악, 고통, 죽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움과 실패, 그리고 죽음의 도구에서 사랑과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의 표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2013,726세계청소년대회).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0,16-23: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양들”과 “이리떼”의 의미를 보면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육에 따른 악한 것이 그 안에 항상 들어 있기 때문에 선할 때는 양이라고 하지만,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양과 같다고 한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리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대하라고 하신다. 뱀은 지혜의 상징이며 비둘기는 순결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신다. 그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제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선을 위해 악을 참고 견딜 때 승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순명하였다. 그들이 순종한 것은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절)고 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악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의 잔인함은 인간의 잔인함에 못 미친다. 이성적인 인간이 잔인하게 굴면, 그 잔인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끝맺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끝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23절)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박해를 하기 때문에 그 복음이 다른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올바로 살지 않으면 그 자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박해를 당하면 당장 위험에 뛰어들어 죽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죽게 되면 그들에게 배워 은혜를 누리게 될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말씀 안에 확고히 뿌리를 박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다. 자꾸 사람의 일로 돌아가려는 나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삶이며, 우리는 이 시대에서 순교정신을 살 수 있다. 지금의 순교는 바로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이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 16)
-한상우신부-
우리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벅찬 우리의
시간입니다.
슬기로움과
순박함은
교만이라는
악순환을
멈추게합니다.
슬기로움과
순박한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슬기로움과
순박함은 지혜의
깨어있는
방식입니다.
슬기로움과
순박함은 우리를
드디어 예수님께로
이끌고 머물게합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삶을 바꾸는
회개와 용서를
체험합니다.
삶의 존엄성
관계의 소중함을
다시 되찾습니다.
순수함과 순박함은
삶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기쁨입니다.
시련을 이겨내게
하는 힘을
주님에게서 얻습니다.
순박한 믿음이
슬기로운 겸손이
가장 아름다운
구원의 지혜임을
믿습니다.
참된 지혜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뜨겁게 바라봅니다.

-오상선신부-
복음에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당부가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제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두려움을 야기하는 위협적인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리 떼, 의회에 넘김, 채찍질, 끌려감, 죽게 함, 미움, 박해" 등 입니다. 그저 듣기만 해도 불편하죠. 어쩌면 인생에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복병들입니다.
복음 선포와 치유, 구마 등의 권한을 받아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로 우쭐하기도 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제자직의 진면모를 드러내십니다. 이 길은 과거 예언자들이 걸었던 길이고, 주님의 길입니다. 단맛만 존재하는 인생이 없듯, 이제 쓴맛까지 알게 된 제자들이 진정한 제자의 길로 초대된 셈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찬찬이 살펴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단지 위험 요소만을 나열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끌려가고 채찍질 당하고 관리들 앞에 설 테지만,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니"(마태 10,20)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시고, 또 당신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겠지만,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마태 10,22)이라고 위로하시지요. 또 박해를 받겠지만 일단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3)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고보니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그저 고통으로만 끝나는 내용은 없네요. 모든 고난에 희망의 열매가 반드시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이것이 곧 파스카의 여정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예수님께서 얼핏 듣기에 상반되는 덕목을 동시에 요구하십니다. 에덴에서 인류의 적이 되어 버린 뱀과, 노아에게 올리브 잎을 물어다 주어 땅에서 물이 빠졌음을 알린 비둘기의 조합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고대 전통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이고, 비둘기는 온유와 순결, 평화와 희망의 상징이니, 이 모든 덕목이야말로 이 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자질이 싶습니다. 물론 지혜로우면서도 가식으로가 아니라 진실로 순박한 영혼이 되는 건 인위적인 자기 노력만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우고 또 비워 하느님 안에 깊이 침잠한 영혼이 은총에 힘입어 길어 올릴 수 있는 샘물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창세 46,3-4)
파라오가 혁혁한 공을 세운 요셉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 가족을 이집트로 초청하고(창세 45,16-20), 이를 받아들인 이스라엘의 가족이 이집트에 정착하면서 이제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의 역사는 새롭게 전개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유다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이 될 파스카 사건의 밑그림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난 야곱의 기쁨에 머무릅니다. 죽음같은 상실과 실의에 찬 삶 끝에 얻은 놀라운 보상입니다. 이 역시 굵직한 역사적 흐름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파스카 중 하나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 부활로 이어지는 파스카는 민족 전체의 공동 체험이기도 하지만, 제자들 각자, 우리 각자가 저마다의 삶에서 겪어내고 있는 개별적 체험이기도 하니까요.
십자가 죽음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뒤따라온 행복도 무미건조할 뿐이겠죠. 어둠이 없었다면 빛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지 모를 겁니다. 우리의 삶은 성조들이나 제자들의 삶이 보여주듯, 그저 슬픔과 고통으로 끝나버리지 않고 반드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위로와 보상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파견 훈화에서 무엇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고통에만 주목해 주저하고 두려워하느냐, 아니면 이어지는 하느님의 현존 약속을 믿고 의탁하느냐, 파스카의 초대 앞에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선택하는 일은 우리 몫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파스카의 신비를 일상 안에서 살아오셨으니 벗님을 축복합니다. 오늘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간 것처럼 벗님도 험한 순례의 여정으로 또다시 초대받을 겁니다. 이집트에서 힘을 기른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로 우리에게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열렸으니, 벗님에 대한 주님의 축복과 함께하심을 믿고 이 순례의 길을 기쁘게 걸으시길 축원합니다.

요셉처럼 용서할 수 있을까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79647
조심은 하되 걱정은 말라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107130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14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