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1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2019년 7월 11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백)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동굴에서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베네딕토는 마침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서방에서 처음으로 수도회 규칙서에 공동생활의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규칙서는 수도 생활의 표준 규범서로 삼을 정도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베네딕토 아빠스는 547년 무렵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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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하늘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오 10,7-15)
"As you go, make this proclamation: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Cure the sick, raise the dead,
cleanse the lepers, drive out demons.
Without cost you have received;
without cost you are to gi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셉은 형제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아우가 자신임을 밝히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형제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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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스스로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오랫동안 형제들로 말미암아 고초를 겪은 것을 생각하면 복수를 해도 시원하지 않을 터인데 요셉은 그러지 않습니다. 오랜 고초를 겪은 뒤 재상이 되면서 자신에게 주어졌던 과거의 모든 사건이 하느님 손길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이 지니는 참된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였던 요셉은 원수와 같은 형제들을 용서합니다. 아니, 그들 잘못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던 하느님의 손길을 보고, 형제들의 잘못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모든 것을 바로잡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보는 듯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것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이 일이 긴급히 이루어져야 할 일임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복음 선포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박해하기도 할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에게 그러하였던 것처럼 어떤 형제들은 그들을 팔아넘기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개의치 않고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보다 앞서 보내신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우리 사람은 어떨까요?”라는 의문을 던지게 되면 대부분이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답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분은 자신이 어렸을 때 이러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현재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살핌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차이는 분명히 큽니다. 그런데 스스로 그 보살핌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분의 경우는 어렸을 때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하시고, 또 어떤 분은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학대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역시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사랑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사랑을 많이 받았다면서 기쁘게 사시는 모습을 보이는 분들도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결국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지금의 모습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의 이유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으로 정리해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먼저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느끼지 못할까요? 바로 ‘나’만을 강조하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나’라는 단어보다는 ‘너’라는 단어가 더 많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의 고통보다도 너의 고통에 끝까지 함께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너’의 대상인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인 ‘나’를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큰 사랑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기억하며 만들어가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라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저 주어야 합니다.


불교 용어 중에서 탐진치(貪瞋癡)라는 말이 있습니다. 탐욕(貪慾)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라는 세 가지 번뇌를 일컫는 말로, 곧 욕심 부리지 말고, 화내지 말고,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번뇌가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므로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이 삼독은 불교에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도 모든 욕심을 내려놓아야 함을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 강조하셨고, 실제로 당신의 삶으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삼독에 빠져서 이 세상을 힘들게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독에 해당하는 것에 멀리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주님이 아닌 세상의 것들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끊임없이 힘들게 살아갑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화내지 말고,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작은 실천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일하고 기도만 해도 행복할 수 있는가?
-전삼용신부-
어떤 무신론자가 봉쇄 수도원에 와서 수도자들이 사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수도원장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없다면, 이렇게 사는 삶이 후회스럽지 않을까요?”
그러자 수도원장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이 사람들이 억지로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사람들은 이 삶이 행복하여 스스로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이 삶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느님이 계시다면 마지막 때에 진짜 후회하게 될 분은 당신일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느님이 없다고 믿고 사는 것이 행복이고, 하느님을 믿는 삶은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제로 사는 삶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결혼해서 사는 것도 절대 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행복하다고 믿는 삶을 선택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서양 수도회의 기틀을 세우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수도원 규칙은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기도하고 일만하라고 하는데도 신앙생활이 재미있을까요? 그래서 2차 주회도 있고 뒤풀이도 생기는 것입니다. 저도 아직은 기도하고 일만 하라고 하면 자신이 없습니다.
베네딕토 수도회는 마치 작은 하느님 나라처럼 수도원 안에서 의식주를 해결합니다. 이 세상에 하늘나라를 재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잠자고 밥 먹는 데 8시간, 일하는 데 8시간, 기도하는 데 8시간을 잡아놨습니다. 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따분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수도회에 들어오라면 아무도 안 들어올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수도회가 건재하는 것을 보면 그런 삶이 행복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져가는 것은 ‘평화!’입니다. 이 평화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는 것이나,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은 결국 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그 인사를 받는 사람이 “전 평화로운데요?”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른들은 게임에 중독되다시피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하는 아이가 한심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게임 외에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을 게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 게임이 행복을 오히려 해치는 것이었음을 알게 하는 방법뿐입니다. 그 방법이란 계속 그것만 하게 만들어서 질리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유산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원하는 대로 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볼 만큼 지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들어가자 본당 수녀님들이 당신들의 수도회에 저를 보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제가 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회는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구 사제는 자유롭기라도 한데, 수도회 들어가면 갇혀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교구 사제로 살아보니, 가끔은 수도회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도회는 그 규칙이 있어서 일정 시간까지는 들어와야 하고 세상 많은 유혹으로부터 공동생활을 하면서 보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교구사제로 마음대로 살다보니 그것이 힘들어 나를 잡아줄 수도회와 같은 삶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교구사제냐, 수도회냐를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조금은 망설일 것입니다.
고구마를 억지로 빨리 익게 할 수 없습니다. 안 익었으면 기다려야합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내가 초대하는 삶이 행복하게 보일 때까지입니다. 내가 전하는 평화를 받아들일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선물하는데 이미 평화롭다고 한다면 그 평화를 실컷 즐기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나 끝내 자신들의 평화가 곧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심판 때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벌을 받게 됩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행복을 전하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행복하다 믿는 이들은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낫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고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는 것은 “기도하고 일하기만 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란 뜻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주 가끔만 다시 와서 찔러보고 지금은 그냥 죄를 짓게 내버려두십시오. 우리도 일하고 기도만 하는데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아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삶의 기본자세를 철저한 무소유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도직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에서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돈에 사로잡히고 출세를 노리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대신에 출세하려고 안달하고, 돈에 얽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제들과 주교들이 그러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슬픕니다. 아닙니까? 복음의 근본, 예수님의 부르심의 근본은 이것입니다. 봉사하는 것, 자기 자신을 잊고 봉사에 몸 바치는 것,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저 너머로 가는 것입니다. 지위의 편의성. 저는 하나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광장을 지나다니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바리사이들처럼, 정직하지 않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봉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를 장사꾼이 되게 합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잠시 맡겨 주신 것이니 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거저 받고서는 선심 쓰듯이 주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또 다른 군국주의와 패권주의의 망령 앞에 필요한 ‘이순신 장군 정신’ ‘행주산성 정신’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선발하시고, 각별히 신경써서 잘 양성시킨 열두 제자들을 실제적인 사목 현장으로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배운 과목은 ‘성공적인 복음 선포’를 위한 이론 수업이었습니다. 이제 이론 과목을 잘 이행한 사도들은 구체적인 실습 현장인 양떼들 사이로 파견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 머릿 속이 조금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준비가 덜 된 사도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스승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세상 물이 덜 빠진 사도도 있었습니다. 성격이 불같아서 수가 틀리면 초대형 사고를 칠 사도도 있었습니다.
복음 선포 현장에서 펼쳐질 모습을 미리 그려보니 걱정도 컸습니다. 복음 선포를 노골적으로 방해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마치 하이에나처럼 노회한 유다 고관 대작들을 생각하니, 밤잠을 못이룰 지경이었습니다. 얼마나 걱정이 크셨으면 파견에 앞서 이런 표현까지 쓰셨습니다.
“나는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오 복음 10장 16절)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양들이 굶주린 이리 떼 사이에 둘러쌓이면, 생존의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잠시 후 제자들에게 펼쳐질 상황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늘 지니고 있어야 할 중요한 인식 한 가지가 있습니다. 복음 선포를 나서자 마자 즉시 펼쳐질 위험한 상황 앞에서, 주님 도움 없이는 위임받은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겸손한 의식, 만사를 주님 중심에 두고, 매사에 주님께 우선권을 두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태도로 무장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리 떼 한 가운데 서 있는 양들’이란 표현을 묵상하면서, 서글프고 처량한 우리 민족의 과거와 오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찌 이리 우리 민족을, 틈만 나면 강탈하고 먹어치우려는 이리 떼들 사이에 서게 하셨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베의 발언이 도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습니다.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찌 그리 천박하고 몰상식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번 발언들을 통해, 그가 한국에 대해 지니고 있던 본색을 가감없이 드러냈고, 그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던지는 모욕적인 발언 앞에 나라 전체가 휘청거리고 허둥대고 있습니다.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상황을 이토록 극단으로 몰고가는 이유는 재신임, 극단적 우경화, 군국주의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도구로 우리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들이 우리 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안그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인식에는 도무지 변화나 진정성이 없습니다. ‘남과 북의 분단’ 동족상란의 비극인 625 전쟁을 ‘하늘이 내려주신 천운(天運)’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양들을 가운데 둔 이리 떼처럼 호전적인 그들은 우리나라를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무시하고 침략해도 되는 만만한 호구(虎口)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70여년 전의 한반도 침략에 이어, 다시 한번 경제적 침략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 우리나라를 향해 또 다른 선전 포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끔히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반복된다는 것을 처절히 실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부끄러운 상황을 내려다 보며, 지난 과거를 돌아봅니다. 철저한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범 국가로서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갖은 만행을 저지른 그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청하지도 않았고,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 호주머니만 챙기는데 급급했던 후안무치한 일부 정치인들의 졸속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너무나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친일파 세력들, 이른바 ‘토착 왜구’세력들이 아직도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가 일본의존적 구도 속에 돌아가고 있었는지? 참담합니다. 아베의 경제 제제가 이토록 우리를 큰 혼돈 속으로 몰고 가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많은 고난이 뒤따르겠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금부터라도 일본으로부터 또 다른 독립, 경제적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고통의 순간은 거듭남의 순간, 전화위복의 순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일본의존도를 대폭 낮춰야겠습니다. 지긋지긋한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아직까지 못 다 이룬 일본으로부터의 경제 독립, 기술 독립을 이뤄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스승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한 가지 특별한 당부를 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오 복음 10장 9~10절)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오 복음 10장 12~13절)
스승님께서는 위험한 복음 선포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의 복장 검사를 실시하십니다. 다들 이런 저런 준비물들을 잔뜩 챙겼겠지요. 그분은 그 자리에서 모두 압수하십니다.
놀라운 일 한 가지는 당시 근동 지방 여행자들에게 지팡이는 생존을 위한 필수 물품이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들짐승들이나 뱀, 전갈, 혹은 강도를 만난다면 적어도 자기 방어를 위한 도구로 지팡이 하나 정도는 다들 들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지팡이를 버림으로써 평화의 사도로서 복음선포에 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또한 스승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해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빌어주라고, 그러나 평화의 인사를 거부하는 집 앞에서는 즉시 발의 먼지를 털고 되돌아나오라고 가르치십니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지금 또다른 군국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아베의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슴 깊숙히 비수처럼 패권주의 사상을 간직한채, 동북아 지역의 평화를 깨트리는 그들 앞에, 우리 역시 주님 말씀처럼 과감히 발의 먼지를 털고 되돌아 나와야겠습니다.
폭력과 불의 앞에 분노하시는 정의와 평화의 주님께서, 틈만 나면 인류의 평화를 깨트리는 그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일부 정치인들에게만 일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침략자 왜구들 앞에,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밤잠까지 설쳐가며 전략을 짜던 ‘이순신 장군 정신’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평화주의자 우리 동포들을 괴롭히고 능멸시키기 위해, 마치 이리 떼나 늑대 떼처럼, 끝도 없이 성벽을 기어오르던 왜구들과 항전하기 위해 남녀노소 모든 주민들이 힘을 합하던, ‘행주산성 정신’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정인준 신부-
창세기 저자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상봉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생 요셉을 알지 못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는 권한을 가진 재상 앞에 그들은 어쩔 줄을 모릅니다.
라헬은 요셉과 막내 벤야민을 낳았습니다.
요셉은 친 동생이 너무 보고 싶어서 다음에 내려 올 때에 벤야민을 데리고 오라고 명합니다.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을 잃고 막내를 옥이야 금이야 하고 기르는데, 그 아이마저 변을 당할까봐 아버지는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딱한 사정 때문에 형제들이 차마 막내와 동행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막내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양식을 구하도록 허락합니다.
이런 상황을 형들이 요셉에게 하자 요셉은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다가 결국 형들 앞에서 자신이 요셉임을 밝힙니다.
자신을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형들에 대한 미움도 있었겠지만 그는 핏줄의 진한 정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4-5)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라고 소명의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당부하시는 여러항목은 사실 복음선포의 기본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병자들과 마귀를 쫒아내는 권한을 주셨으니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마귀에 시달리는 이들을 구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9-10)
그리고 머무는 집에 평화를 빌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받아들이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그들이 재물이나 사람들에게 걸려 복음 선포의 소중한 소명을 잊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구원의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부족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소명을 펼치시려 하십니다.
그들은 주님의 크신 사랑에 힘입어 복음선포의 소명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스승의 제자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크기에 제자들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 형들을 용서하고 그곳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복수 대신 요셉은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택한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0,7-15: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라고 권능을 주시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우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하신다. 주님께서 지니신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주님의 권능과 같은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한때 세속적이던 이들이 이제 하늘 중심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되살리고 악마를 쫓아낼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모습이 되도록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리고 하신다. 만일에 그들이 보상을 바라고 영적인 선물을 베푼다면 그것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즉 탐욕을 단죄하셨다. 주님께서 그 권능을 제자들에게 거저 주셨으니 제자들도 그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니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9절)고 하신다. 보수를 바라지 않는다면 금과 은과 돈을 지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잘못해서 그들이 하는 선교활동이 인유 구원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재물을 끊은 사람은 생활에 필요한 것마저도 끊는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치면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았다.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10절) 이는 세속의 물건에 관심은 버리라는 말씀이다. 참된 보물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옷만 있으면 된다. 마음의 악행 때문에 이단이나 율법 같은 다른 옷을 걸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신발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탈출 3,5 참조) 가시나무와 덤불로 덮인 거룩한 땅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지팡이는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격도 없이 권위를 사용하려는 모습을 말한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절) 필요한 음식과 옷만 받으라고 하신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11절) 사도들이 묵는 집은 사람들의 평판이 좋은 집에 머무르라고 하신다. 나쁜 평이 도는 사람이면 자칫 말씀이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렀다.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12절)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신다. 평화의 인사는 말과 몸짓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집에는 평화가 내려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우선 평화가 주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들의 끝은 멸망이라는 것이다. 그들 앞에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신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한상우신부-
일상생활 자체가
수도생활입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제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느 것에도
사로잡히거나
갇힐 수 없는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삶이
복음의 참된 기쁨입니다.
수도생활은 언제나
행복을 지향합니다.
수도생활의 행복은
양극단의 치우침을
언제나 경계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초대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일상생활의 양극단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포용하고 종합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중심점이
수도 공동체를
풍요롭게 합니다.
맡겨진 소임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자기 중심의 마음을
버리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은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생활안입니다.
먹고 자고
기도하고 노동하는
모든 삶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오상선신부-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예수님의 당부를 담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이 말씀은 복음 선포, 치유, 되살림, 구마 등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한"으로 이루어질 모든 일들의 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제자들의 소박한 출신 성분이나 기질적 부족함이 오히려 하느님 도구로서의 자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율법에 능통한 학자 계급도 아니고 의술에 출중한 재주를 지닌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하고 투박한 이들이 하느님의 도구가 될 때, 그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권능이 더욱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또 자기 것이 아닌 능력에서 나온 결실에 대해 아무도 소유권이나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을 겁니다. 그 권한의 원천이 자신이 아닌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될 이들보다 한 발자국 앞서 은총을 체험한 이들입니다. 순서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오히려 먼저 받은 이에게는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할 거룩한 사랑의 의무가 주어지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길 떠나는 이가 준수해야 할 가난과 의탁, 머무름, 평화의 기원, 거부당할 때의 대응 방법을 차례로 일러 주십니다.
"마땅한 사람."(마태 10,11)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 마땅하지 않으면..."(마태 10,13)
마땅함이라는 말씀에 머무릅니다. 합당하고 적합하며 제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권력이나 재산, 지식, 힘을 소유한 존재를 가리키기보다, 길을 나선 제자들을 환대하고, 가난하고 부족한 그들을 통해서도 하느님 현존을 감지해 존중하는 이들을 가리킬 겁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마태 10,14)
제자들은 충분히 거부와 배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꽃밭만 주어지지는 않으니까요. 예수님은 그에 맞서지 말고 평화의 사람으로서 대응하기를 바라십니다. 담담히 떠나되 어떤 마음의 앙금도 남기지 말고 "발의 먼지"와 함께 털어 버리라고요.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를 다룹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하느님께서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놀라고 두려워 당황하는 형들에게 요셉이 한 말입니다. 이는 요셉이 형들에게 버림받아 이국땅에 팔려가면서부터 시작된 고통의 순간마다 하느님께서 자기와 함께해 주시며 복을 내리셨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창세 39,2.23; 41,38 참조) 내 잘난 덕에, 자기 능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베풀 수 없는 신비한 힘에 감싸여 왔으며, 비록 이방인이지만 자기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힘을 감지하고 경외하며 존중한 여러 "마땅한 사람" 덕분에 살 수 있었다는 걸 놓치지 않는 그는 진정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창세 41,38)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먼저 준비시키셨다고 굳게 믿으며 고통과 슬픔의 앙금을 말끔히 털어내었습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가 된 요셉이 여전히 형제들을 "우리"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비록 자기를 배척하고 사지로 몰아낸 형들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소속과 생명의 원천인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돌보시는 하느님은 그가 우여곡절을 견뎌낼 수 있게 지탱해 준 구심점이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형들의 잔인한 죄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큰 믿음과 신뢰가 과정 안에 있었던 아프고 슬픈 상처를 치유해 형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용서는 충분히 사랑받으며 치유받아 과거를 재해석할 내적 힘이 무르익으면 가식없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첫 파견에 나선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대와 달리 행여 배척과 거부를 당하더라도, 하느님의 돌보심과 섭리를 믿으면서 묵묵히 가야합니다. 아직 하느님을 맞이할 "때"가 되지 않은 그(그 고을)를 뒤로 하고 길을 떠날 때, 원망하지 않고 온유와 평화를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과 순수한 용서와 화해를 나눌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진정한 "우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특별나지도 않고 평범하기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이제 그분의 파견을 받은 "평화의 사도"가 되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거저받은 은혜를 거저 묵묵히 나눔으로써 파견하신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정주영성과 탁발영성
-김찬선신부-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묘하게도 오늘은 성 베네딕도 축일인데 복음은 제자들을 파견하는 얘기,
곧 프란치스코가 이 복음을 통해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을 택한 얘기입니다.
우리 교회를 대표하는 두 가지 영성이요, 우리 교회를 떠받치는
두 중요 영성을 한 자리에서 논할 수 있는 전례적인 coincidence우연입니다.
실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리아의 삶과 마르타의 삶이 있고,
그래서 관상수도회와 활동수도회가 있듯이
정주영성과 탁발영성이 우리 교회 안에 있습니다.
정주영성을 대표하는 것이 베네딕도회이며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베네딕도 성인 덕분에
우리 교회는 이 위대한 영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주영성이란 어떤 것입니까?
말을 그대로 보면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머무는 삶을 뜻하지만
단지 한 곳에 머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머무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정해진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싶지만 그러지 않고,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지만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뭔가를 정할 때 결정권이 내게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다는 것이며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고 하느님 결정에 온전히 순종하고 따르겠다는 거지요.
그러니 이 얼마나 대단한 순종의 자세입니까?
그런데 이 대단한 영성에 어떤 문제가 있기에
프란치스코와 탁발영성이 있어야 했습니까?
하느님의 결정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면 문제가 있을 수 없지요.
문제는 하느님 결정을 수도원 원장과 공동체가 대신하는 거였기에
이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이 빠질 경우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 아니라
그저 수하 수도자가 원장에게 인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되고,
원장과 수하 수도자 관계와 수도자 서로 간의 관계가 위계적이게 되며,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개인의 자유는 없고 전체주의가 될 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탁발영성은 어떤 것이고 정주영성과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탁발영성은 정주하는 영성과 달리 복음 선포를 위해 오늘 복음 말씀대로
둘씩 짝을 이루어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세상을 다니는 삶을 사는 거지요.
흩어져 찾아오지 않는 양들을 주님께 모아들이기 위해서는 찾아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프란치스코는 생각을 하였고 그러기 위해서
개인에게 성령의 자유를 최대한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자유를 개인이 온전히 살도록 하느님과 개인 사이에
원장과 공동체의 개입을 최소화하자는 것이 프란치스코의 생각이고,
그래서 법도 최소화하고 원장의 역할도 최소화하며 명칭도 원장이 아니라
수호자로 바꾸고 서로 간에도 위계적 관계가 형제적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탁발의 영성도 역시 하느님이 빠지면
개인의 자유는 성령의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 될 뿐이며
공동체는 최소한의 질서도 없는 인간적인 집단이 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주영성이든 탁발영성이든 하느님이 안 계시면
그 수도 공동체는 그저 인간적인 집단이 되지만
하느님께서 계시면 하느님 교회를 든든하게 받치면서
또한 교회를 활기 있게 하는 두 기둥이 됩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베네딕도 성인을 교회에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베네딕도 영성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이 영성을 충실히 살아가도 기도하고,
프란치스칸은 프란치스칸대로 오늘 복음 말씀처럼
복음 선포의 소명을 잘 살아가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13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