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19. 7. 9. 18:29

2019 7 10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마태오 10,1-7)


Jesus summoned his Twelve disciples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to drive them out
and to cure every disease 
and every ill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셉이 이집트에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을 감옥에 가두자, 그들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라며 서로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분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형제들의 잘못으로 이집트까지 끌려와 갖은 고초를 겪다 재상까지 된 요셉, 바로 그 요셉 덕분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형제들의 잘못이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준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면서 당신 계획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셉의 형들은 서로 말합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는 형제들을 보고 요셉은 눈물을 흘립니다. 거기서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넘긴 것은 요셉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할 것임을 알려 주신 바 있습니다(창세 15,13 참조). 이렇게 보니 인간의 일은 언제나 하느님 손바닥 위에 있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죄악에서 돌아와 다시금 당신의 일을 해 나가기를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이따금 인간이 죄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지경이 되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기도 합니다(에제 36,1-38 참조).
우리는 하느님께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에 개입하시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쁜 소식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요셉처럼 세상 속에서 형제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에 따라 제자들은 이스라엘 집안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길 잃은 양에게 하늘 나라를 선포할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칭찬의 힘은 대단하다는 말을 많이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자녀들에 대한 칭찬뿐만 아니라, 내 이웃을 향한 칭찬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디에 초점을 맞춰서 칭찬을 해야 할까요? 이 부분에 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쉽지 않은 문제를 풀게 한 다음, 한 집단에는 “좋은 점수 받은 것을 보니 실력이 뛰어나구나.”라고 말해주었고, 다른 집단에는 “정말 열심히 문제를 풀었나보구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즉, 첫 번째 집단에게는 능력에 초점을 맞춘 칭찬을 해주었고, 두 번째 집단에게는 노력에 초점을 맞춘 칭찬을 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한 뒤에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내주었습니다. 이 문제들은 청소년들은 도저히 풀 수가 없는 것들이었지요. 하지만 놀라운 차이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능력에 초점을 맞춘 칭찬을 받은 청소년들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모두 포기했지만, 노력에 초점을 맞춘 칭찬을 받은 청소년들은 자그마치 90% 이상이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능력에 초점을 맞춘 칭찬을 받은 청소년들은 “내 능력 밖이야.”라는 말을 하고서 포기했답니다. 이는 무엇일까요? 능력에 대한 칭찬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에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요? 이는 한계를 알기가 힘들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떤 모습을 보실까요? 능력일까요? 노력일까요? 전지전능하신 주님에게 우리의 능력은 너무나도 하잘 것 없어 보이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남는 것은 딱 하나, 바로 노력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노력의 모습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편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보십시오. 절대로 능력으로 뽑으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갈릴래아의 어부들, 세리, 열혈당원,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뽑으신 예수님께서는 능력보다 그들이 앞으로 할 노력에 초점을 맞추셨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내 자신에 대한 이유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이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의 큰 사랑으로 앞으로 할 우리의 노력과 정성을 보시고서 이 자리에 있게끔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자신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어떤 정성을 가지고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을까요?
실제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는 우리가 어렵고, 불행하고, 불만족스러울 때 도래한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과 진정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때문이다(M. 스캇 펙).



희망을 바라보며 걷는 이.

맑은 날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눈비가 내리는 굿은 날이 좋습니까? 아마 대부분 맑은 날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맑은 날만 계속될 수 없습니다. 흐린 날도 있고, 눈비가 내리는 날도 있습니다. 또한 바람이 엄청나게 부는 날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렇게 굿은 날이 있기 때문에 맑은 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맑은 날이 더욱더 돋보이게 하고 기다려지게 하는 이유는 굿은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게 되니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어떤 시간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바로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희망을 보려고 하지 않고 고통과 시련 자체에만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자체에만 머무르고 있고, 어떤 이는 그 너머에 있는 희망을 바라보고 걸어갑니다.                   

"유다에게도 주셨는데!"

-전삼용신부-


 한 중년남성이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가다가 자신의 앞의 차가 자전거를 탄 10대 소년을 들이받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소년은 차 앞부분에 깔려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달려가 차를 들어 올렸습니다. 소년은 극심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아저씨, 조금만 더 높이요, 조금만 더 높이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중년남성은 차를 20센티미터 이상 들어 올렸고 그 소년을 친 운전사가 소년을 빼냈습니다.


      소년을 병원으로 옮긴 뒤에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기적을 일으켰는지 깨달았습니다.

      “사고 현장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어요. 그 소년이 제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거였죠.”

      사고를 조사한 경찰 당국도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어찌된 건지 통 모르겠네요. 차체 앞부분을 땅에서 완전히 들어 올리다니. 사람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올까요?”

      중년 남성의 이름은 톰 보일이고, 이 일은 2006년 여름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뜻밖에도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2005년 여름 영국 선더랜드에서 친구와 함께 캠핑을 가던 23세 카일라 스미스는 차를 나무에 들이박는 사고를 당해 차가 뒤집혔습니다. 신장 165센티미터의 가냘픈 스미스는 자신도 등뼈 두 마디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자신과 함께 타고 있던 친구를 빼내기 위해 차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무조건 차를 들어 올리지 않으면 친구의 다리는 못 쓰게 되니까요. 그래서 제 팔을 운전석 창문으로 넣어 차 지붕을 밀어 올렸죠.”

      스미스는 BBC 등 영국 언론에 나와 자신의 몸무게보다 20배가 더 나가는 무게를 들어 올릴 당시 자신은 차 무게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그 일은 이미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발동하여 불가능을 잊게 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미 죽어서 하루가 지나 싸늘하게 죽은 자녀를 다시 살게 해 달라고 청하는 사람은 그 자녀의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청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감히 범접하지 못하여 기도를 해 드리면서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사랑의 날개입니다. 새의 몸통과 날개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하면 불가능한 것까지 믿게 됩니다. 그런데 사제인 제가 신자의 그 사랑에 범접하지 못하여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들을 쫓아내게 하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의 선포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냥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것과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선포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입니다. 기적이 없는 복음 선포는 힘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같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희망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러한 권한을 주신 열두 사도 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다에게도 주셨다면 우리에게도 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영화 ‘명량’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먼저 적진으로 뛰어듭니다. 열두 척의 배중에서 오직 이순신 장군의 배만 적진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싸우고 또 싸웁니다. 한 척, 두 척, 세 척... 열 척을 혼자 맞서 싸워 이기는 것을 지켜본 다른 장군들이 하나 둘씩 이순신과 다시 합류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기세로 열두 척의 배가 죽기 살기로 앞으로 나아가니 일본의 배들이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여러 사람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물론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보고 갖게 된 믿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것을 보아야만 믿음이 시작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돈이 많으면서도 굶어 죽는 이들이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처지가 그럴 수 있겠습니다. 기적의 힘을 지니고도 믿지 못하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한계를 먼저 생각하니 그 믿음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나의 가족이라 생각하고 한계를 무시하며 일단 해 본다면 죄인인 우리도 많은 기적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본당에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도시간과 안수시간을 갖는다면 수많은 이들의 치유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한 마디만 해 주면 됩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화살에 맞았습니다. 화살을 쏜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아내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화살을 쏜 사람의 이유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화살촉에 독이 묻었는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길을 가는 사람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화살에 맞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지혈하고, 약 바르고,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일본이 경제보복이라는 화살을 우리에게 쏘았습니다. 일본이 왜 경제보복이라는 화살을 쏘았는지 알아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동북아시아의 질서,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역사를 고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혜를 모으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내부적으로 분열하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당리당략을 위해서 자중지란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경제보복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야곱의 아들 중에서 요셉은 예수님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예수님의 패러다임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점이 예수님과 비슷할까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요셉은 형제인 유다에 의해 은 20에 팔렸고, 예수님은 제자 유다에 의해 은 30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냈고,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냈습니다. 요셉도 부당하게 고소당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부당하게 고소당하였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은 영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을 때 용서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셨고, 12명의 제자는 사도가 되어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오늘 복음에서 나온 12명의 제자와 같은 사도직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사도직은 밭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희망을 심으면 희망이 열매 맺습니다. 봉사를 심으면 밭이 풍성하고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으로부터 그와 같은 권한과 능력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약속을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자매의 부르심에 대한 묵상글을 적어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숫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부르고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고

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좌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어 누워 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나를 일으켜 주신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하기 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복음은 바로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0,1-7: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는 단신께서 모든 질병과 병을 치유해 주셨듯이, 제자들에게도 치유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해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도록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신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을 완성하시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갈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부른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제자들의 신분을 보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의아한 선택이셨다. 어부, 세리, 열성당원과 같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지도자급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잘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과 하느님의 지혜의 차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실 때, 지금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즉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장차 무엇을 해 나갈 수 있는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즉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그러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5) 하신다. 이 말씀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실과 생활양식을 제자들이 피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치유해 주셨다. 이 말씀 바로 이단자들의 집회에 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 분부는 또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른 민족들과 이단자들의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도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6)고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다음으로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어 있었다.

 

결국은 유대인들이 부름을 받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여 다른 민족들에게로 복음이 선포되었던 것이다. 이는 다른 민족들이 더 큰 은총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늘 나라와 그것이 뜻하는 모든 것을 선포하였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 어떤 사람이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채운다 하여도, 이제는 세상이 그것을 선포할 것이다.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은 파멸하고 만다. 그 세상은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 6)

-한상우신부-

복음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 사람을
만나는 삶입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복음선포는
나눔과 배려로
다가가야합니다.

그래서 선교는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따뜻한 존중입니다.

삶의 현장으로
가야합니다.

생활의 실천이
빠져버린
복음선포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삶 자체를
보살피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입니다.

현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복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픔과 힘겨움의
현장안으로
들어가셔서
이 땅에 살고있는
이들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소외와 갈등을
어루만지는 복음이
참된 복음입니다.

그 복음에
참여하고
동참합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열둘"이란 숫자를 내외적으로 품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에 협력할 열두 제자를 뽑으셨고, 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를 대표할 열두 아들이 등장하고요. (막내 벤야민은 가나안 땅 아버지 야곱 곁에 남아 있어 이름만 거론됩니다만 요셉과의 끈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이 부여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마태 10,1)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 이미 산상설교를 기점으로 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접해 가르침을 듣고 있던 터라 "이제야 열두 제자를 뽑으셨나?" 하며 이 시점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보다 깊고 친밀한 관계로 당신과 엮일 정예부대를 "가까이 부르신" 것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가련한 군중의 현실을 목도하신 후,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하고 명하신 직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더러운 영, 질병, 허약함을 치유할 "권한"(마태 10,1)을 열두 제자에게 첫 선물로 주십니다. 이렇게 "권한"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 무슨 대단한 자격이나 권력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돕고 섬기는데 필요한 도구로서의 힘입니다. 이 능력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을 위해 쓰기로 되어 있는 선물이지요.

이어서 그 권한을 받은 열두 제자의 이름이 길게 나열됩니다. 이처럼 경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실제로 그 당시 그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진실성에 보증이 될 뿐만 아니라 해당 인물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열둘"이란 숫자는 야곱(이스라엘)이라는 한 아비의 피를 나누어 받은 열두 아들과, 그들을 수장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완전한 숫자입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부르셔서 묶어 주신 열두 사도는 혈연으로 엮인 구약의 백성을 초월하는 하느님 백성을 상징합니다. 모든 인종, 언어, 혈연, 지연, 종교, 신분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완전한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지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
사실 이방인 지역도 사마리아 고을도 가지 말고 그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라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칫 인종차별주의나 민족우월주의, 선민사상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말씀으로 곡해될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편파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복음 내용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그 답이 헤아려집니다. 지금의 열두 사도는, 그들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만, 그 자리로 불리워 권한을 받은지 고작 몇 시간도 채 안된, 말하자면 "초짜, 애송이" 단계일 뿐입니다. 그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본 것은 있을지 몰라도 각자 흩어져 그 엄청난 권한을 흉내도 아니고 실제로 수행하기엔 미숙함이 없지 않을 시기일 겁니다. 그야말로 첫 파견이니까요. 갓 사제서품을 받고 파견된 보좌신부나 갓 종신서원을 한 수도자라고나 할까요!

이방인 지역이나 사마리아 고을들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맞닥뜨리게 될 때, 부족한 믿음에 균열을 일으킬 무수한 요소들이 잠재된 곳이지요. 열두 사도는 먼저 종교와 관습이 익숙한 이스라엘 동포들 안에서 길 잃은 양들을 찾아나서는 첫 걸음을 떼면서, 이제부터 차근차근 하느님의 일을 실전으로 배워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예수님 부활 사건과 성령강림을 통해 "때"가 되면, 어느새 굳건해진 영혼과 정신, 믿음을 지니고 이방인 지역과 사마리아 고을은 물론 온 세상으로 파견되어 선하고 호의 가득한 "권한"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채 준비가 되지 않은 미숙한 상태에서 "권한"은 자칫 오용될 염려가 큽니다. 또 감당하기 벅찬 상황 안에서 이 권한을 섣부르게 사용하게 되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사도들을 그저 주술사나 치유사 정도로 그치게 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권한이 기술로 전락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죠.

제1독서는 형들의 질투로 팔려가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재상이 된 요셉과, 굶주림을 모면하려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의 해후 대목입니다.

"죗값"(창세 42,21).
"피에 대한 책임"(창세 42,22).
형들을 알아본 요셉이 부러 을러대는 으름장에 형들은 영문도 모르고 두려움에 떨다가 이 두 단어를 스스로 꺼내어 듭니다. 느닷없이 당하는 오해와 종용 앞에서 스스로 자기들의 죄를 소환한 것이죠. 이는 어쩌면, 죄악은 당한 이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지만, 가해자에게도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남에게 해를 입힌 자는 삶의 구비구비마다 부딪히게 되어 있는 크고 작은 고통 앞에서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범죄 현장으로 돌아가 그 언저리를 맴돌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 자신도 죄악의 피해자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의 첫 파견 때 주신 권한이 바로 이 죄악의 고리를 끊어 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병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시 사고방식 안에서) 더러운 영과 영육의 질병과 허약함은 부지불식간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죄악의 상처에 그 뿌리를 두고, 죄책감과 자기혐오와 절망에서 영양분을 받아 성장하니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권한을 허락하실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분께서 인류의 "죗값"을 치르러 오셨고 "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져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해 책임을 지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주님은 민족들의 의지를 꺽으시고 백성들의 계획을 흩으신다.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 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화답송)
어떤 구실로도 요셉의 형들이 저지른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요. 다만 하느님께서 그런 험한 꼴을 당한 요셉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민족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성장시켜 주셨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얕은 계략과 검은 술수보다 크신 하느님의 계획을 느낍니다.

이처럼 악과 결탁한 세상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있었어도, 결국 이 죽음을 통해 온 인류의 죗값을 치르고 속량하여 구원을 이끌어 내신 하느님 계획 앞에서는 무력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권한을 받은 이의 자격과 상관 없이 권한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권한이 권한을 부여한 이의 피의 값이기 때문입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 고쳐 주고 싸매 주고 일으키고 온전함을 되돌려 주는 일은 이 권한을 행사하는 제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보잘것 없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 제자들인 벗님을 통해서 오늘도 일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 감사!

일꾼이 아니고 사랑꾼이야!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가 여러 제자 중에서 뽑혀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복음 선포의 소명을 받고 파견되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주제를 부르심과 파견
또는 부르심과 소명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언자의 소명처럼 하나로 묶어서 얘기할 수도 있는데
저는 오늘 따로 떼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인데
이때 부르심이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가지고 파견되기 위해
부르심 받은 것이고 그래서 부르심 자체보다는 소명, 파견이 더 강조되지요.

사실 제가 이 삶에로 부르심을 받은 지 47년이 되는데
저는 거의 대부분을 하느님께서 세상에로 파견하시기 위해 부르셨다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아왔고 그래서 지금까지 늘
내가 가야 할 세상을 봤고 내가 수행해야 할 소명을 봤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나의 부르심은 우선 하느님께로 부르신 거라는,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소명과 파견을 아주 나쁘게 생각하면 옛날에 소로 농사를 질 때
힘이 다할 때까지 농사를 짓게 하다가 늙어 일 못하게 되면 잡아먹는데,
마치 그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저를 일꾼으로 부려먹고서는 나이 먹어 늙으면
용도 폐기하는 것으로 저의 소명이 끝날 수 있는데도 그런 것이
결코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1 차적으로 나를 사랑으로 부르신 것이며
당신과 함께 있으라고 부르신 것이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1 차적인 부르심은 당신께로의 부르심입니다.
소명과 파견은 그 다음 그러니까 2 차적인 겁니다.

하느님은 저를 일 부려먹기 위해서 부르신 하느님이 아니고
당신과 함께 있자고 부르신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이제는
어떤 일을 하는 제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저이고 싶은 것이고
일꾼이 아니라 사랑꾼이고 싶은 겁니다.

이 생각이 틀린 생각이 아니고 이 바람도 잘못된 바람이 아니지만
그렇지만 이기주의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찜찜하기도 한 것은
아직도 수행해야 할 소명이 남았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하느님 사랑 안에 안주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직도 젊은데 이런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요즘 들어 언뜻언뜻 이일저일 제가 많이 하지만 다 지나가는 것이고
지금 하고 있는 협동조합도 대단한 것인 양 추진하고 있지만
다 지나가는 것이고 다 지나가고 나면 나는
하느님께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돌아갈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저는 용도 폐기된 고물처럼 될 거라고
생각되어 앞으로의 저의 삶을 못 견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 차적으로 저를 하느님 당신께 부르셨고
사랑으로 부르셨고 사랑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르심이 이기적이지 않기 위해서 또한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소명을 받아 파견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그런 다음 주님께 돌아가 당신께서 주신 소명,
잘 했는지는 모르지만 열심히는 수행하고 돌아왔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12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