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2019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마태오 9,32-38)
Jesus went around to all the town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curing every disease and ill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야곱과 씨름을 하시다가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라고 하시며 복을 내려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야곱은 야뽁 건널목에서 만난 사람과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해서 이기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 야곱은 에사우를 두려워하며 밤에 몰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 그다음에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을 자기보다 앞서 야뽁 건널목을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에사우가 두려워 강을 건너지도 못합니다. 그러다 어떤 사람을 만나 밤새 싸움을 하다 엉덩이뼈까지 다칩니다.
그러나 야곱은 새벽 동틀 무렵까지 버텼고, 결국 그 사람에게서 축복을 받고서야 씨름을 그만두는데, 그 사람이 야곱을 두고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고 말해 줍니다. 이 대사에서 우리는 야곱과 겨룬 사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 곧 하느님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에사우를 피하여 몰래 숨던 야곱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시려고 천사를 보내셨던 것일까요? 이 사건 이후 야곱은 용기를 내어 에사우에게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음을 보십니다. 꼭 제1독서에서 야뽁 건널목을 건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야곱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격려하고 보살필 일꾼들을 보내 달라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일꾼들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가 꺾여 있던 그들 가운데에서 일꾼이 일어서야 합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닮은 일꾼,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길 만한 일꾼,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 앞에서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며, 백성이 하느님을 향하여 올바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일꾼이 태어나야 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내 것이라고 한다면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다보니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뜻밖의 일들을 경험하게 되고, 내 몸이 또 내 생각이 따르지 않아서 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때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면서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빌린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이해가 됩니다.
솔직히 빌린 물건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렌터카를 생각해보십시오. 렌터카를 타면서 평소에 타던 내 차와 다르다고 실망하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냥 빌린 차니까 그러려니 합니다. 우리 몸 역시 주님께서 잠시 빌려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빌렸다고 해서 막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렌터카가 내 차가 아니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조심하게 사용하지 않습니까? 만약 차에 상처라도 낸다면 배상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몸 역시 주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러면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막 사용해도 될까요? 다시 되돌려 드릴 그 때를 대비해서 잘 사용하고, 삶의 마지막 날에 주님과 셈을 하게 될 때 자랑스럽게 주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빌려준 것에 대한 어떤 비용을 청구합니다. 그래서 귀한 것일수록 빌리는 가격은 더욱 더 높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빌려 주시면서도 아무것도 청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당신의 뜻에 맞게 살아갈 것을, 사랑을 실천하면서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꾼이 많아지도록 청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꾼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성직자, 수도자만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되어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몸을 최대로 활용하는 사람,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스스로가 그러한 내 자신이 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노력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번데기가 애벌레로, 애벌레가 나비로 변신해야 온전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변신하는 과정이 있고, 실제로 변신을 해야 온전히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인간이 아기로만 살고 있다면 어떨까요? 또 어린이로만 살고 있다면, 청소년과 청년으로만 살고 있다면? 물론 보호를 받는 유아, 청소년기에만 머물렀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시기를 거쳐 즉, 변신의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어야만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또 한 번의 변신 기회가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인간이 되어 가게 된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제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을 펼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모님께 청하면서 그 그늘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다는 이유만을 계속 만들어서 변신의 기회를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인간, 참으로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어떤 변화든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피하는 사람은 지금의 모습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추수꾼은 ‘기(氣)’를 살려주는 이들>
-전삼용신부-
‘오리지널스’의 저자 애덤 그랜트가 인터넷 안경 사업 공룡이 되어버린 ‘와비파커’ 설립자들에게 투자를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왔던 이들이 학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업에 실패하면 취직할 곳들을 이미 마련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오프라 윈프리까지 모두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의 일에 뛰어든 것에 비해 열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와비파커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인 닐은 애덤 그랜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안을 마련해놓았어요. 잘 안될 경우를 대비해서 졸업 후에 일할 직장을 구해놓았어요. 제프도요. 데이브도 대안으로 여름 동안 인턴십 두 개를 확보해놓았고, 전에 다니던 직장으로 돌아가는 얘기도 진행되고 있어요.”
실패할 것을 예상해서 뒷일까지도 다 준비해 놓은 이들에게 누구도 투자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애덤 그랜트도 열정이 없는 이들에게 투자하지 않았고, 이것이 평생의 가장 큰 후회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재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덤 그랜트는 이때 깡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덤비는 이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氣)’입니다.
“창업할 때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만두는 게 나을까?”
경영 연구자 조지프 라피와 지에 펭은 5,000명을 추적 조사한 결과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던 위험 회피적 사람들, 그러니까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이들이 직장을 바로 그만두고 창업한 이들보다 실패할 확률이 33%나 낮게 나왔습니다.
와비파커 창립자들과 더불어 ‘패스트컴퍼니’가 선정한 가장 혁신적인 기업 목록에 오른 기업들을 운영하는 창업자들은 창업을 한 뒤에도 어느 정도는 계속 직장을 다녔다고 합니다.
나이키 공동 창업자인 필 나이트는 신발을 팔기 시작한 이후에도 5년 동안 회계사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첫 번째 애플 컴퓨터를 발명한 스티브 위즈니악은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창업한 이후에도 본래 다니던 휴렛팩커드에서 일하며 1년간 겹벌이(투잡)를 하였습니다. 구글 창업자들은 사업이 성공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학업에 방해가 될까봐 헐값에 구글을 팔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사실 빌 게이츠도 하버드를 중퇴하고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자신의 프로그램을 팔았고 그 사업으로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을 때 휴학을 한 것이었습니다.
“기가 살았네!”라고 말할 때, 이 ‘기’는 열정을 내가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입니다. 이 기가 살아있어야 무엇을 해도 성공할 확률이 큽니다. 워런 버핏은 항상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고 10년 이상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에 투자합니다. 그래야 기가 살기 때문입니다.
백종원씨는 우리나라 소규모 식당을 창업하는 사람이 인구에 비해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상태로 창업하기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창업을 하는 많은 수의 사람들은 직장을 가진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잃거나 직장이 없어서 생계수단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꼭 성공해야만 하니 사람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용당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태로 장사를 하니 사람들은 좋은 ‘기분’을 느낄 수가 없어서 그 가게에 가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기’가 없이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실패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아야 기가 삽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은 이미 빠져나갈 굴을 파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감옥 생활이 감옥 생활이 아니고 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 사람이 탈출하지 못하게 잡을 정도로 그 주인공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빠져나갈 구멍’이 ‘기(氣)’인 것입니다.
기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지거나 실패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마치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고아처럼 이 일이 실패하면 인생이 끝이라고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기가 꺾이면 불안해지고 그러면 무엇을 해도 안 됩니다.
작은 방에 아기를 혼자 놓아두면 아무리 장난감이 많아도 아기는 엄마를 찾으며 웁니다. 그러나 엄마가 들어가면 아기는 엄마는 본척만척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바쁩니다. 엄마가 있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기가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말하는 ‘수확할 밭의 일꾼들’은 바로 이 기를 살려주는 이들입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하느님께서 우리 등 뒤에서 지켜주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믿음을 주는 이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마태오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분(예수님)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일꾼들은 바로 기가 꺾인 이들에게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게 해줄 수 있는 목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해지면 안 되고, 자녀가 실패하면 안 되고, 가족이 병에 걸리면 안 되니 기도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목자는 좋은 추수꾼이 아닙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면 기가 꺾입니다.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참 추수꾼은 이 세상에서 다 잃어도 괜찮다는 믿음을 주는 목자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목자여야 합니다. 이 믿음이 신자들에게 기를 북돋아 줍니다. 기가 꺾인 신자들이 없도록 기를 살려주는 목자들이 많이 나오도록 기도합시다.

-조재형신부-
명동에 다니던 치과가 있습니다. 늘 하얀 가운을 입던 원장님을 보다가, 사복을 입은 원장님을 보았습니다. 사복을 입은 원장님의 모습은 가운을 입던 원장님과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복장은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교복을 입었습니다. 교복을 입고 가서는 안 될 곳이 많았습니다. 교복에는 학년과 이름이 표시되었습니다. 교복을 입고는 안 될 행동이 있었습니다. 불편하기도 했지만 교복이 저를 보호 해 주기도 했습니다. 의사의 흰색 가운은 의사의 권위와 의사의 품격을 드러냅니다. 비자 신청 때문에 대사관엘 갔습니다. 사제 복장을 하고 갔습니다. 직원이 신자라고 하면서 인사 하였습니다. 저도 신자인 직원을 만나니 긴장했던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몸과 함께 있습니다.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몸은 마음을 제약하지만 몸은 마음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엉킨 매듭을 풀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격이 급해서 엉킨 매듭을 천천히 풀지 못하는 편입니다. 종교란,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생기는 엉킨 매듭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은 외면한다고 해서, 덮어버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지하게 내면을 들여다보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을 하는 것은 어쩌면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황님께서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많은 유혹을 받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신앙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유혹 5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완고함에 빠지는 유혹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처럼 많이 아는 것으로 남을 심판하고, 비난하려는 유혹입니다. 교회에 있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잘못한 이들을 하느님께로부터 심판받아야 하는 사람들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둘째는 상처를 치유하기 전에 붕대부터 감으려는 유혹입니다. 붕대를 감으면 상처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것으로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민주와 자유는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묘약은 없습니다. 오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돌을 빵으로 만들려는 유혹입니다. 물질과 자본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물질과 자본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우리는 모두 영적인 형제요 자매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는 유혹입니다. 십자가는 차에 걸어 놓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목에 거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무겁지만 우리가 묵묵히 지고가야 하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와 함께 지냈습니다. 많은 병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아팠던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는 교회의 유산을 포기하려는 유혹입니다.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교회는 변화되고 쇄신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버려야 할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를 버리는 사람들은 없듯이, 교회의 전통과 정신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추수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일구어가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의 굳어진 혀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유학 초기 때의 일이었습니다. 서너 달이나 되는 긴 첫번째 여름방학 기간을 맞이했습니다. 사목 체험도 할 겸, 제대로 된 현지 언어도 배울 겸, 야심차게 한 시골 본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본당 신자들의 배려로 참 행복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유치원 수준의 언어로 겨우 미사 집전 정도만 하는 저를 측은히 여긴 신자들께서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다만 크게 괴로웠던 일 한 가지는, 밤이면 밤마다 거듭된 저녁식사 초대였습니다. 뭐 대단한 만찬이 준비된 초대는 아니었습니다. 소박한 스파게티 한 접시나 피자 한판 두고,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정담을 나누는 소박한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이런저런 긴 대화는 정말 괴로웠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남한에서 왔냐? 북한에서 왔냐?” “요즘 북한 상황은 어떠냐?” 등등,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관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다 더 이상 깊은 대화가 안된다는 것을 파악하고 난 후부터는, 그저 꿔다논 보리 자루가 되고 맙니다. 뭔지도 모르는 길고 긴 말잔치 앞에 저는 그저 희미한 미소만 짓고 앉아 있었습니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노랫가사가 딱 제 처지였습니다.
당시 제가 느꼈던 소외감은 참으로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이지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언어가 되야 서로의 진심을 들여다볼 수 있고, 언어가 되야 상대방의 철학과 인생관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와 소통이 안되는 그는 그저 머나먼 존재,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게 되더군요.
따지고 보니 언어라는 것,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정말이지 대단한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언어는 한 인간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희로애락을 나누고 사랑과 우정을 쌓아갑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언어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 잊지 못할 추억담들을 나누며, 웃고 우는데, 나만 거기 끼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오랜 고독과 소외감 속에 살아온 말못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각별했던 예수님 눈에 그 가련한 존재는 즉시 가장 특별한 존재, VIP, 우선적 선택의 대상으로 다가왔습니다.
은혜롭게도 말못하던 사람은 뜨거운 주님 사랑에 힘입어 즉각적인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설마했었는데,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내 삶이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고 배척된 영원한 이방인이요 왕따로 살다 끝나려니..’했었는데, 자비하신 주님의 자상한 손길에 힘입어 새 살, 새 인생을 찾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말 못하는 이처럼 살아갑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눌러참아야만 합니다. 목구멍까지 어떤 단어가 올라오지만, 애써 도로 내려보내야만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 다들 내 등뒤에서 수근거립니다. 앞에서는 환한 미소 짓지만 돌아서서 낄낄대며 인정사정없이 깎아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가련한 우리들 인생에 밀착동반하시니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의 굳어진 혀를 풀어주시고, 용기와 지혜를 더해주시어, 진정으로 해야할 말을 편안히 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라는 곳간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영의 비추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사업이 완성되는데 한 몫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측은지심,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희망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엾은 마음!', 다시 말하면 애간장이 녹아나는 아픔으로 함께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면 바로 그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9,32-3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사람들은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는 말을 못했으므로 자신을 위해 청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데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귀는 그의 혀를 묶어 놓았고, 영혼도 차꼬를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장애를 해결해 주셨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33절)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33절) 군중이 이렇게 놀라워 하니까,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3절)고 비방을 한다. 군중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한 때 그가 거부했던 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혀가 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며 예수님을 헐뜯는다. 이 말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헐뜯는 자들을 꾸짖지도 않으시고,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다. 하늘 나라의 복음과 병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가지고 그들을 직접 찾아 다니셨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작은 마을도 지나치지 않으시고 온갖 곳을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왜 가엾은 마음이 들었을까?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어서 가엾이 여기신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을 거둘 일꾼들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영의 선물은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37-38절)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기도와 훈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을 쏟아 부어 주신다. 풍성한 수확은 모든 믿는 이를 의미하고, 적은 일꾼은 수확을 위해 파견된 사도들과 그들을 본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권한을 지니고 계심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이 청도 기도도 하기 전에 제자들을 사도로 지명하시며, 타작마당을 키질하여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버리는 분에 관한 요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그분 자신이 농부이며, 수확할 밭의 주인님임이 드러난다. 그분이 그들을 수확할 일꾼으로 파견하셨다면 수확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 38)
-한상우신부-
참된 일꾼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다시 한번
성찰하게됩니다.
참된 일꾼이 필요한
우리들 시대입니다.
참된 일꾼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삶으로 기쁘게
실천합니다.
실천은 믿음을
지향합니다.
믿음은 순명으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
먼저 계시기에
일꾼인 우리가
있음을 깨닫게됩니다.
시련속에서
일꾼은
일꾼다워집니다.
시련마저도
주님을 드러내는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일꾼과 기도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일꾼의 뜻을
비우고 내려놓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분명 기도입니다.
기도는 일꾼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주님의
참된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도안에서
일꾼은 주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일꾼의
진정한 길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앞부분은 예수님의 구마 기적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고, 뒷부분은 예수님의 선교 여행입니다.
마귀 들려 말못하는 이를 치유해 주시자 사람들의 평판이 갈라집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마태 9,33)고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예수님의 행적이 못마땅한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쫒아낸다"(마태 9,34)고 비난을 하지요.
선을 있는 그대로 선이라 받아들이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재창조의 신비 앞에 경탄하고 찬미하며 하느님의 경이로움에 감사를 올리게 되니 그렇습니다. 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선에 대해서 악이라 왜곡하여 규정하는 이들은 행복과 점점 멀어집니다. 두려움을 야기하고 혐오스러우며 매사에 찝찝한 상태로 남는 악에 기대어 선을 평가하기에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진 탓입니다.
군중의 경탄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또 바리사이들의 곡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시는지 복음사가는 침묵합니다. 진리를 행하는 이는 주변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니까요. 호평도 악평도 그분의 태도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분은 진리와 선으로 아버지의 뜻을 묵묵히 행하실 뿐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예수님은 귀로 들려오는 평가에는 잠잠하셨지만 이처럼 군중을 만나서 직접 보신 현장에서는 마음이 출렁이십니다.
"가엾은 마음!" 권능과 위엄과 영광의 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민과 공감의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의 실존입니다. 홀로 청정하고 충만한 하늘 위 옥좌를 박차고 내려와 바람 잘 날 없다는 가지 많은 나무가 되신 분은, 자녀들을 흔드는 작은 바람에도 가슴을 앓으시며 애태우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예수님은 양들이 불행한 원인이 "목자의 부재"라고 진단하시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진실되고 선하게 돌볼 목자가 필요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분은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 마음에 착한 목자이 되고자 하는 결심이 세워지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평판에 좌우되지 않고 다만 양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헌신할 착한 목자말입니다.
양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시달리며 기가 꺾인 하느님 백성입니다. 그들이 착한 목자의 손길로 생명을 얻고 풍요로워지고 각자의 생명력을 충만히 살기 바라십니다. 예수님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제1독서는 그 유명한 야곱의 야뽁강 씨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창세 32,25)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야곱이 온 가족을 먼저 건네 보내고 뒤에 혼자 남습니다. 세상에는 공동체적으로 함께 할 일도 있고, 홀로 직면해야 하는 일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 앞에서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순간이 소중한 만큼, 각자 하느님과 홀로 대면해 씨름을 하는 순간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필요하지요.
"저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
야곱의 집념이 느껴집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 혹독한 세월을 지낸 그가 이제 형을 대면해야 하는 순간에 앞서 자기와 가족의 목숨을 보장받으려고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지금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니까요. 결국 엉덩이뼈를 다쳐가며 목숨을 걸고 매달린 끝에 야곱은 축복을 받고(창세 32,30) "이스라엘"이 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어쩌면 세상과 인류에게 복을 얻어 주기 위해 당신 목숨까지 바치신 우리의 예수님이, 자기와 가족의 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매달린 야곱의 치열한 기도를 확장해 완성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과 뒤엉켜 밀고 당기는 야뽁 건널목의 씨름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느님과 홀로 대면해 바치신, 외롭고 뜨겁고 피땀 어린 절규의 시간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그리고 야곱이 다친 엉덩이뼈는 예수님께서 바치신 목숨으로 연결되어 세대가 바뀌어도 퇴색될 수 없는 사랑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살다 보면 우리 각자 하느님 앞에 서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대신할 수 없고, 대충 묻어갈 수 없는 결정적 때(카이로스)입니다. 목숨을 걸고, 때론 목숨보다 소중해 보이는 각자의 "무엇"을 걸고 끝까지 매달려 복을 얻어내려는 집념이 과연 스스로에게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가 아니라 그분 바로 곁자리를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거룩한 집념과 갈망으로 주님과의 한 판 승부에 나서려면, 믿음과 열정, 사랑의 근육을 키우고 다듬는 준비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말씀과 성체는 이 한 판 승부를 위해 영혼의 체력을 단련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아멘.

눈의 정화가 필요해.
-김찬선신부-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여러 차례 한 해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
<형제의 잘못을 보지 말고 고통을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목표로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목표로 삼았던 것은
잘못보다 고통을 보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겠지요.
예를 들어 서울역의 노숙자를 봤을 때
그들의 가엾음과 고통을 보기보다는 그들의 더러움을 더 보고
더 나아가 그들의 게으름을 더 보게 되기 쉽지요.
그런데 노숙자들의 가엾음이 뻔히 보이는데도 어찌 보지 못할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가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왔고 우리나라 성철스님이 얘기해서 유명한 말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말입니다.
선의 화두이기에 그 해석이 다양하지만 제 식대로 풀이하면
첫째는 자기 관점에서 보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의 이쪽에서 보면 서산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동산이고,
산 안에서 보면 산이 보이지 않지만 산 밖에서 보면,
그것도 멀리서 보면 산이 보이고 그때, 산은 산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런저런 사람을 자기중심으로 보면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저 사람일뿐인데.
마음에 들면 예쁘고 들지 않으면 밉고,
마음에 들면 그의 고통이 보이고 들지 않으면 잘못만 보입니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들어와 있으면 그가 있는 그대로 보이고 고통도 보이지만
내 마음에 미움이 들어와 있으면 그가 하는 짓마다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잘못만 눈에 들어옵니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겸손하면 이웃을 그대로 보고 그래서 그의 약점도 보고 고통도 보지만
교만하면 내 중심적으로 보기에 낮추어보게 되고 잘못만 골라보게 되며,
심지어 무시하게 되는데 우리말로 바꿔 얘기하면 업신여기게 되는 겁니다.
업신여긴다는 우리말은 누가 분명히 있는데도 없이 여기는 것이니
얼마나 대단한 시선의 왜곡이고 굴곡입니까?
아무튼 오늘 복음에서 사라의 주님은 군중의 가엾음을 보시는데
바리사이들은 군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못마땅한 주님만 보이고 그것도 악마의 수괴로만 보입니다.
요즘 정치권 특히 모 정당을 보면 국민의 어려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일본의 무역제재로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운데도 그것은 별 관심이 없고
오로지 반대하고 끌어내려야 할 대통령과 여당만 보입니다.
맞불작전인지 그런 야당에 맞대응하고 맞고소하느라
국민의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여당도 못지않게 한심합니다.
양쪽 다 사랑의 눈으로 보지 않고 권력 다툼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정치가든 신앙인인 우리든 눈의 정화가 필요한데
사랑이 가장 완전하고 탁월한 세정제요 정화제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11 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