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7일 연중 제14주일
2019년 7월 7일 연중 제14주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다
(루가 10,1-12)
Into whatever house you enter, first say,
‘Peace to this household.'
If a peaceful person lives there,
your peace will rest on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평화를 빌어 주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평화와 위로를 예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 위로와 평화를 주시면, 주님의 종들이 그분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모든 민족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와서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이사 66,18 참조).
그러나 원수들에게는 하느님의 진노가 닥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이사 66,14-17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 곧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드디어 주님의 평화가 내렸음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기쁜 소식을 전하며, 마귀들마저 복종시킵니다.
하느님께서 위로와 평화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 덕분이 아니라, 당신의 무상적인 은총 덕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여전히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지만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곤 하였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새 창조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거저 의롭게 되고, 거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모든 율법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지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거저 낙인을 받았음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이름을 당신 책에 거저 적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람으로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정순택 주교-
오늘 1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가장 마지막 장의 한 부분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막 돌아온 유다 민족에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배를 마치고 고국 땅에로의 귀환은 유다 민족에게 하느님의 승리로 이해되었지만, 막상 돌아와서 마주한 고국 땅의 실상은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성전은 무너져 있었고, 성도 예루살렘은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희망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이사 66,12)
적지 않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순히 이 세상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이 힘든 세상을 돌파해 가는 참된 열쇠임을 믿고, 그것을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14)라고 말합니다.
복음 말씀은 일흔두 제자를 선교 파견하시는 대목을 들려줍니다. ‘일흔둘’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노아의 홍수’ 이후 그의 세 아들을 통해 불어난 노아의 자손들의 숫자인데, 이들을 통해 온 세상에 민족들이 갈라져 나갔다고 하여,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이입니다. 교회가 오늘 복음을 들려주는 까닭은, 우리도 복음 선포의 사도임을 상기시켜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어지러운 세상살이에 지친 내 마음에 평화를 구하기 위해 성당에 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힘든 세상을 하느님의 평화로 가꾸기 위해 파견된 사도들입니다.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 66,13) 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이사 66,14) 하시는 하느님에게서 용기를 길어내야 합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갈라 6,15)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세상의 외형적인 기준으로 참된 행복을 재단하지 않으며,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갈라 6,15)인 하느님 안에서 거듭 태어나 이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바꾸어 나가는 일꾼이 됩시다.

위협과 두려움, 그러나 평화
-김혜윤수녀-
“남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입시 경쟁에 지쳐있던 시절, 감당하기 어려운 소임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던 때, 총원에 들어와 책임을 맡고 있는 현재까지도, 이 책을 만난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언제나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싸우지 않아도 되고’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를 성경은 ‘평화’라고 표현합니다. 전쟁과 싸움은 무언가를 획득하고 소유하기 위해 발생하는데, 이미 충분히 흡족한 상태에 있어서 더 무엇을 소유할 필요도 꼭 이기려는 마음도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연중 제14주일의 본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평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본문은 선교와 사목의 궁극적 목적이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누리기 위한 것임을 표명하고 있고, 제1독서에서는 버려져 황폐해졌던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드는 상황이 묘사되고 있으며, 제2독서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결과가 평화와 자비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 복음의 맥락
지난 3주간의 복음들은 마치 3부작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연중 제12주일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소개되었다면 제13주일에는 그 소개된 분을 따르라고 촉구한 바 있으며 제14주인 이번 주일에는 이 부르심의 목적이 ‘파견’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다만 오늘 복음의 특이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12사도의 파견이 아니라 72제자의 파견을 묘사한다는 점인데(루카복음서에만 등장) 이는 본문이 집필될 당시 이민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루카복음서는 이미 9장에 12사도의 파견을 서술한 적이 있고,(9,1-6) 이어서 10장에 72제자의 파견을 배치합니다.(10,1-12) 12사도의 파견이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면 72제자의 파견은 전 세계를 향한 것이고 이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강조하려는 루카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 보내심
선교의 대상: 제자들의 파견은 “모든 고을과 고장”(루카 10,1)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는 매우 큰 시사점을 전해줍니다. 중세와 근대 그리스도교가 선교에 대하여 가졌던 인식은, 주로 사제와 수도자들을 먼 곳으로 보내어 그곳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다 본질적으로 깨닫게 되는데, 선교의 대상은 멀리 있는 변방의 국가들이 아니라 도시와 가까운 마을, 내 주변의 사람들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 바 있는 프랑스 교회는 선교를 명분으로 자행되었던 과거의 식민지 정책에서 돌아선다는 의미로, 프랑스야말로 우선적으로 선교되어야 할 땅임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복음화와 사목, 선교를 위한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은 나 자신과 우리 가정, 우리 주변인 것입니다.
선교의 방법: 다음으로 본문은 진정한 사목과 선교가 적용해야 할 방법을 ‘수확’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씨를 뿌리고 열매가 무르익기까지 키우고 보호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72제자는 그저 열매를 거두어들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선교가 인간의 전략이나 치밀한 실행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주도하시고 구현하시는 사건임을 표명합니다. 그런데 이 ‘수확’을 위해 명심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3-4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 보호와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가야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여유조차 없이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도직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므로, 인사하는 일에조차 깊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실 ‘사도’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는 ‘파견된 자’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사도직’은 ‘파견하신 분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도직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일을 지상에서 구현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개인적 성실과 열성으로 최선을 다한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와 열성에만 의지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 일’이지 ‘사도직’이 될 수 없습니다.
선교의 내용: 전해야 할 가르침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9절) 왔음을 알리는 것이고 이 하느님 나라의 특징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5절)라고 인사하라고 하시는데 이 인사는 ‘샬롬’이라는 전형적인 유다인들의 인사이며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평화는, 정치적 협상과 교섭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쟁 중지와는 구별됩니다.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이 주시는 사랑과 자비가 너무나 충만하고 흡족해서, 아무리 주변에서 싸움을 조장하고 딴지를 걸어 억울함과 불안, 분노를 유발시킨다하더라도 도무지 싸울 의지나 마음이 안 생기는 평정의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 예루살렘의 평화
복음화와 선교의 결과를 제1독서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구원신탁으로 제시합니다.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는 이들”(이사 66,10)에게 이제 구원된 기쁨의 상황이 ‘물’과 ‘모성’에 대한 은유로 선언되는데 “평화를 강물처럼, 평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인다는 표현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위로를 받으리라”(12-14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물’과 ‘어머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황폐해졌던 예루살렘에 이제 생명과 삶의 필수적 요소들이 공급됨으로써 평화와 구원의 도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하느님 백성의 평화
제2독서는 바오로의 선교 전략을 소개합니다.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자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갈라 6,14) 구원과 은총은 매일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역설을 강조하면서, 진정한 교회의 사목과 선교는 “새로운 창조물”로 사는 것임을 선언합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15절) 할례는 하느님의 백성이 됨을 상징하는 전례적 행위였습니다. 이는 유다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분 짓고 남성을 여성과 구분 짓는 표식이었으나 이제 ‘새 창조’를 통해 하느님 백성이 됨은 더 이상 할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16절)라고 인사합니다. 새 창조의 열매는 하느님의 평화와 자비인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누구도 내편이 아니고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온전히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양심과 신념, 지켜내야 할 존엄과 열정, 용기와 지혜 같은 것들입니다. 돈주머니나 보따리, 신발도 없이 맨몸으로 낯선 땅을 통과해 가야하지만 그 위협과 두려움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온전한 동행에 집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평화야말로 세상과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궁극적이며 강력한 힘입니다. 누구도 뺏을 수 없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진정한 평화를 사는 것,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복음화의 모습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의 마음
-박수태신부-
지금 시골에서는 농사일로 한창 바쁩니다. 농사를 지을 때, 어느 때가 가장 바쁜 때 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추수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추수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기 때 문입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싹이 나든가 썩든가 낙곡이 되든가 품질이 떨어지든가 하 기 때문입니다. 추수 때가 되면 농부들은 시간과의 전쟁을 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루카 10,2)고 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지금 이 얼마나 절박하고 긴박한 상황인지를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의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 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나이가 들면 하나같이 느끼는 것이 인생이 길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인지, 참 삶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비신자들의 이야기 를 들어보면 주로 돈, 명예, 자녀, 정치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나이가 팔십이 넘은 영감님이 수백억의 재 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커피 한 잔을 사는데도 인색하며, 공장을 돌리면서 어떻게 하면 더 벌 수 있는지 노 력하는 것을 보고 참 어리석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친구들 이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는 아직 죽음에서 먼 줄 압니다. 정신이 있을 때에는 더 살 줄 알다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서는 자신은 죽는지도 모르고 죽습니다. 그래서 파멸되고 맙니다.
그러한 인간의 삶을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시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깝겠습니까? 그러한 급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 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유들이 소명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학생에게 돈을 많이 주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농부들이 밭을 갈 때, 항상 소들에게 입에 망을 씌웁니다. 왜냐하면 일보다 먹는 데 더 신경 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의 절박성 때문에 가난을 요구하셨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에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의 멸망을 안타까워하고 속이 타들어가는 하느님의 마음을 깨달아 참된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고봉연신부-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이사 66,12) 이사야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는 암울하고, 절망적이었습니다. 정 의가 흔들리고, 평화가 사라진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세상, 새 창조를 예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혼돈과 전쟁, 죽음으로 몸부림치는 예루살렘을 친히 위 로하십니다. 평화에 굶주린 예루살렘에게 평화와 기쁨의 젖을 먹이겠다 고 하십니다.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이사 66,13) 하느님께서 약속 하신 평화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호수, 평온한 바다와는 다릅니다. 고통이 있고, 아픔과 상처가 있고, 좋지 않은 일들이 있고, 전쟁이 있는 현실 속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고 인생의 거친 파도 를 넘어설 수 있는 의지와 힘이 되어주는 평화를 주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평화 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갈라 6,17)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임을 자랑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 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와 자비만을 구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바오로 사도가 꿈꾸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오늘 루카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명의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 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루카 10, 5) 예수님으로 파견된 제자들은 평화를 전하는 사도로 활동합니다. 주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제 들도 각자 소임지에서 평화의 사제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일흔 두명의 제자들이 그리고, 사제 들이 살고 전하는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이리떼 가운데서도 평화로울 수 있으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 는 평화와 다릅니다. 예수님만이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를 빕 니다. 복음 환호송으로 낭독된 콜로새서 말씀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콜로 3,15)

-서공석신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는 사실은「마태오」,「마르코」및「루가복음서」들 안에 모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들은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루가복음서」에만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파견하셨다(9,1-6)고 말한 다음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세워 보내셨다.”(9, 51-52)고 말합니다. 이「복음서」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예수님이 앞장서서 예루살렘의 십자가를 향하여 먼 길을 가면서 여러 가지를 가르치신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루가복음서」저자는 초기교회의 발전이 열두 사도들의 수고만으로 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복음서」는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이 별도로 일흔 두 사람을 더 파견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 외에 일흔두 제자도 파견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십자가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루가복음서」를 집필한 사람이 그「복음서」의 후편으로「사도행전」도 집필하였습니다.「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떠나신 후, 그분이 파견한 제자들이 활동하여 그리스도 신앙이 예루살렘에서 온 세상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알립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 시대 그 지역 사람들의 예의범절(禮儀凡節)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 중동(中東) 사람들은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온갖 안부를 묻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한동안 지체하는 것이 관례(慣例)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니는 사람은 그런 통속적 관례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의범절보다 선포할 복음이 더 우선(優先)한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환자에게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은 귀에 라디오 이어폰 꽂고, 목에 무선 전화기 걸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면서 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오로지 복음말씀만을 소중히 모시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복음선포라는 말입니다. 기원후 85년경,「루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背信者)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기원후 66년에 유대인들 중 과격파가 로마정권을 거슬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역사가 유대전쟁이라 일컫는 독립전쟁이었습니다. 로마에서 팔레스티나까지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전세(戰勢)는 유대인들에게 유리하였습니다. 그러자 과격파가 아닌 유대인들도 그 전쟁에 대거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그 전쟁을 외면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이 파견한 병력이 도착하자 전세는 역전되어, 유대인들의 참혹한 패배로 전쟁은 끝났습니다. 수도(首都)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기원 후 70년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민족을 배반한 자라고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본산(本山)인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것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이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기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런 해석은 유대인들을 더욱 자극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떼부터 유대민족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 한편 로마제국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로마황제를 숭배하라고 강요하였고, 그것에 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역사적 악조건에서 오늘 복음은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위험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선교는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나라의 선포는 그들이 말로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에게 병은 육체적 고통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종교적 절망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불행이 닥치면, 하느님이 벌하셨다고 쉽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을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하느님은 자비하신 아버지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하였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불행을 당한 사람이 그것을 하느님이 주신 벌(罰)이라고 착각하며 절망하는 데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친 것은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고, 벌을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살리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혜로운 분이라고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열두 사도의 파견과 별도로 일흔두 제자의 파견을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신앙인들의 노력으로 이룩한 교회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의 자유로운 참여와 기여가 있어, 발생하고 유지되는 유연한 조직체입니다. 유럽이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교회는 성직자 위주의 경직된 조직체가 되었습니다. 극소수의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의 무식한 사람들을 선도해야 했던 유럽중세 사회였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교계제도(敎階制度)에 몸담은 사람들은 교회의 모든 일을 결정하였습니다. 신분 따라 복장도 달리하던 시대였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직도 유럽중세의 그런 유물(遺物)들이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신분을 탐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다스리고 억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섬김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몸가짐입니다. 경직된 과거의 유산을 털어버리고 섬김을 실천하는 유연한 교회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0년 7월 4일 연중 제14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