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6월 23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Margaret K 2019. 6. 22. 18:32

2019 6 23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루카 9,11ㄴ-17)

  
Then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aid the blessing over them, broke them,
and gave them to the disciples to set before the crowd.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빵을 먹고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시어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로 지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전례 안에서 기념해 왔던 육화의 신비 전체와 삼위일체의 신비까지도 바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의미 안에 함축되어 있고, 오늘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이야말로 하느님 사랑과 구원 의지의 가장 탁월한 표현이요 그 구체적인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제시하시면서, 당신의 살을 우리의 양식으로, 당신의 피를 우리의 음료로 내어 주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분이 스스로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신 겸손과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신 수난과 고통, 부활을 통하여 이룩하신 승리까지도 모조리 우리에게 내어 놓으실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당신 안에 갖고 계신 삼위일체의 신비까지도 우리와 함께 나누고자 하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성체와 성혈을 모심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며, 온전한 일치 속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정말 기쁘고 감사한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온전히 채워지는 신비를 경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의 가장 소중한 능력 가운데 하나임을 되새기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진 우리는 이제 그 사랑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고, 우리의 이웃들과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거저 베푸시는 사랑

-한민택신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느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늘 가슴에 품고 사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물음에 인간은 ‘하느님의 무상한 은총’으로 산다고 답합니다. 여기서 ‘무상한’이라는 말이 ‘값없는’ ‘거저 주는’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공짜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장정만도 5000명가량이나 되는 군중을 배부르게 먹이시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모든 일이 배고픈 군중의 처지를 헤아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이 그 빵을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에서 비롯됐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행위에는 세상의 눈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경제나 시장의 논리로는 그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기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아주 작은 인간적 행위를 통해 가능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삶의 다른 차원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이며, 그 관계 안에서 무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만이 서로를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사랑의 행위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지만, 그것이 지닌 놀라운 힘과 의미를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선물을 주고받을 때 우리는 경험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무상으로 내어주는 사랑과 나눔의 행위라는 것을 말입니다. 거저 주는 것이 경제와 시장의 논리에 맞지 않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러한 일을 종종 행합니다. 그리고 경험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가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그 점을 잘 드러냅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새 생명을 바라고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생명이 태어났을 때 놀라운 선물을 받아 안고 기뻐합니다.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아이는 부모님의 무상한 사랑으로 살며 성장합니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약해지면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힘없고 지능이 약해진다고 하더라도 나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나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사랑하시고 희망을 두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희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바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아버지 하느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온 삶으로, 특별히 몸과 피를 내어주는 성체성사로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체 성혈에서 우리를 바라시고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아버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빵과 포도주로 하나 된 기쁨

-김창선선교사-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하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생명의 양식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의 현존에 감사를 드리고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립니다.

가톨릭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미사가 봉헌됩니다. 미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찬미하는 말씀의 전례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며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모시는 성찬의 전례로 구성됩니다. 제대의 예물인 빵과 포도주는 성찬례의 핵심입니다.

오늘 제1독서(창세 14,18-20)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전승을 기리고자, 고대 살렘(예루살렘, 시편 76,3) 임금이고 대사제인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져와 창조주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에 멜키체덱이 바친 거룩하고 흠 없는 예물은 양떼의 맏배를 바친 아벨의 제물(창세 4,4)과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의 봉헌(창세 22,2)과 함께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신 세 가지 제물(감사기도 제1양식)입니다. 멜키체덱은 하느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사제의 예표(시편 110,4; 마태 22,44; 마르 12,36; 루카 20,42)입니다.

제2독서(1코린 11,23-26)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목요일 ‘주님의 만찬’에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관해 가장 먼저 기록된 내용입니다. 성체성사는 유카리스트(Eucharist)라 불리는데 그리스어의 ‘감사하다’(eucharistein)가 그 어원입니다.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십니다. 같은 모양으로 포도주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시고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성체성사를 거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초기부터 교회는 성찬례를 위한 예물인 빵과 포도주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가지고 모였습니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인 디다케(Didache)에는 성찬례를 위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고 성부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가 끝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빵의 형상은 그대로이지만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성체)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포도주 역시 그리스도 피(성혈)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는 미사에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말씀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성체와 성혈로 성(聖)변화를 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명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누룩 안든 빵을 쓰셨습니다.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외적 형태는 그대로이면서 그 실체는 성체와 성혈입니다. 종교혁명의 지도자인 마르틴 루터도 이 실체의 변화를 인정했습니다. 이 ‘성(聖)변화’는 하느님의 무한한 힘으로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나뉜 성체 조각마다 주님께서 온전하게 현존하십니다.

지오반니 란프랑코의 ‘오병이어의 기적’.

오늘 복음말씀이 전하는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사건은 성체성사의 예표로, 네 복음(마태 14,13이하; 마르 6,30이하; 루카 9,10이하; 요한 6,1이하) 모두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선교활동에서 돌아온 예수님과 제자들이 외딴곳인 ‘벳사이다’로 피정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이를 알고 몰려듭니다.

날이 저물어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황량한 곳이기에 그들을 돌려보내 잠자리와 음식을 스스로 해결하게 하자고 예수님께 건의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로 가엾게 보여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십니다. 제자들이 가서 양식을 사오지 않는 한,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인데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르신 대로 군중들을 대충 쉰 명씩 그룹을 지어 자리를 잡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린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됩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봅니다. 주님의 감사기도가 마음의 문을 열어 파스카 음식을 나누는 축복으로 돌아왔나 봅니다.

“이는 내 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5)으로 오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안에서 머문다”(요한 6,56)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기쁨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만 이 행복을 누릴 수 없기에,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삶으로 복음화에 나섭니다. 주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마음에 새기고, 성사생활로 사랑의 힘을 기릅니다.

‘생명의 빵’인 성체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성사생활은 우리 안에 사랑의 샘물이 강물 되어 흘러내리게 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내면의 나를 비우고 성체를 모십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찾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기릅니다. 생명과 성덕의 샘이신 예수 성심,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살이 공동체

-김동훈신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 을 내어주고 쏟아주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실 수 있음에 흠숭과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통해 우리에게 내려주신 당신의 크신 사랑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지난 달 교구 사제 피 정 때의 주제인 “공동체 영성의 사목”으로써 ‘예수살이 공동체’를 나누고 자 합니다.

강사 신부님은 강의 중, 문익환 목사께서 감옥에 있을 때 밥을 미음이 될 때까지 씹어서 넘겼다는 일화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날 문 득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고 곧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올 밥이 되기까지 수고한 분들의 노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체와 성혈을 모 시는 우리들도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강사 신부님은 예수님의 삶을 닮아 가는 것이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신 사람들의 나아갈 목표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아 산다고 하면서 무조건 희생과 봉사만 강요당하다보면 행복을 잃어버리고 결국 공동체에서 벗어나 그 삶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 있 다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는 ‘예수살이’는 품성과 덕목을 바탕으로 신앙과 믿 음을 두지 않으면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본당 사목을 하다보면, 교우분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들에 대하여 열심히 봉사하다가도 소임을 벗어나게 되면, 더 이상 뵙기가 어려울 때가 많기도 합니다. 아마도 ‘예수살이’를 실천 할 때 의무감과 강요에 이끌려 억지로 봉사하다보면 어느덧 지쳐있고 더 이상 함께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의 봉사로만 남아 있었기 때 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살이’를 하면서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을 뵙게 되면, 그분 들의 표정과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품성과 덕목 (가치관)이 바탕이 되어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소임들을 묵묵히 수행해나가는 신앙인임을 느끼 게 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인 오늘 온전히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시고자 원하시는 예수님을 내 안에 합당 히 모심으로써 행복한 삶을 잃지 않도록 기도드리고, ‘예수살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 자 신을 주님과 일치하도록 노력합시다.


성체는 하느님의 사랑과 나눔

-김두신신부-


교회는 거룩한 성체성사를 세우신 예수님을 기념하며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
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라는 말씀을 통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를 완성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와 아브람을 축복하였고 아
브람은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멜키체덱에게 바칩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늘의 별처럼 번창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체성사의 핵심에 대하여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
여라.”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라고 전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라고 하시며 믿는 모든 이들에게
나눔의 기적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체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신 최고의 사랑과 구원 그리고 나눔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
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처음 나눔의 명령에 걱정을 합니다. 가진 것도 특별한 재주도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사실 많은 걱정 가운데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믿음의 부족과 몰이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사업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은 성체성사 세우심과 나눔의 기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22-32 참조)라고 하십니다.
믿음과 성체성사의 기적도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성령 강림
전의 모습이 아니라, 성령 강림 후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으로 사제직과 평신도 사도직에 참여해야 합니다.
인류구원을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고 제관이 되신 예수님의 성체성사를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들의 도리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인격적인 나눔과 동참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나눔을 실천
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증거합시다

받아먹었으니 내어줍시다

-김태호신부-


‘성체성사를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가, 우리를 위해 성체성사가 존재하는가’ 제가 신학생 때 ‘성사론’ 이라는 과목의 시험문제였습니다.

정답은 무엇일까요? 받아먹었으니 내어줍시다 정답은 ‘둘 다’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체성사가 내 안에서 끝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에게 나 자신을 쪼개고 내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의 본질은 나를 비롯한 이웃, 우리 모두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계속해서 다른 이에게 퍼져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성사를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으면서도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것은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 생명의 빵을 받아먹으면서도 계속해서 땅에서 일구어 낸 빵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내 곳간에 빵이 차는 것만 생각하고, 심지어는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의 빵까지 가져와 내 욕심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더 많은 빵을 양산해 내어 독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다가왔던 유혹자는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우리가 땅에서 일군 빵으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 그것을 위해 다른 사람이 피를 흘리게끔 우리를 유혹합니다.

 

욕심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이것까지만” 하는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내 이웃은 피와 눈물을 흘리며 굶어갑니다.

우리의 영혼은 내어줄 때 채워집니다. 나를 쪼개고 내어주어 생긴 빈 공간에 예수님께서 머무르십니다.

예수님의 몸은 빵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채워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생명의 물이 되어 우리의 욕심을 씻어주고 탐욕의 갈증을 없애줍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땅에서 일구어 낸 빵이 많다고 과시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빵을 받아먹고 세상을 향해 나 자신을 내어줍시다.

내 욕심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생명의 물이 샘솟게 합시다. 내 안에서 샘솟은 그 물이 이웃과 온 세상을 상대로 흘러넘치게(즈카 14,8) 합시다.

서로를 살리는, 썩어 없어지지 않는 생명의 빵(요한 6,27)을 쪼개어 나눕시다.


-서공석신부-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고린토전서는 그 만찬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소개합니다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식후에도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이다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것이 오늘 우리의 성찬곧 미사전례의 기원(起源)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믿음이 제자들 안에 발생하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그들은 하느님이 예수님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도록 버려두신 이유를 모릅니다그들은 예수님이 귀머거리들을 듣게 하고벙어리들을 말하게 하면서  모든 일을 좋게 하신 분이었다.”(마르 7, 37)는 사실을 기억합니다다만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만든 율법과 제도를 절대화하면서 율법을 철저히 지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그렇게 엄하신 하느님을 배경으로 그들 자신도 사람들 위에 무섭게 군림하였습니다그들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가르치는 예수님을 미워하였습니다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하느님이 자기들 편에 계신다고 선포하는 조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유대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과 제도(制度)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그것을 절대화하여 하느님이 주셨다고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또 자기 스스로는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자비를 실천하는 마음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십니다그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의 진실(眞實)이었습니다예수님은 당신의 믿음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믿음과 실천이 그들의 권위(權威)를 손상(損傷)시킨다고 생각하였습니다그들은 결국 그분을 제거(除去)합니다그 사회를 지배하는 강자(强者)를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껏 말하고 소신대로 일하는 사람을 이 세상의 강자들은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그런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은 그분이 평소에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면서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마르 8,34).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최후만찬에서 당신을 기억하여 행하라고 말씀하신 성찬(聖餐)을 거행합니다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빵을 들고 또 포도주 잔을 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차차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으로 당신 생애(生涯)를 요약하셨습니다그분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쳤습니다빵을 들고,  ‘내어주는 당신의 몸이라고포도주 잔을 들고, ‘쏟는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면서예수님은 당신의 생애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말씀으로 남기셨습니다.   신앙인들이 성찬에서 그 빵을 먹고그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명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하느님 나라의 생명이 그들 안에도 살아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실제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옛날 사람들은 오늘과 같이 객관적 사실 보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꾸며서 그 안에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담아 전하는 이야기 문화의 시대였습니다그리스의 신화(神話)로마의 신화 등이 모두 이야기 문화의 소산(所産)입니다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이 성찬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사람을 먹이셨듯이, 그분은 오늘도 성찬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그런 의도가 오늘의 복음 에도 보입니다복음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그 표현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거행하던 성찬전례에서 반복 사용되던 양식(樣式)입니다그 시대 성찬에 참여하던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던 양식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신앙공동체는 성찬을 중심으로 발족하였습니다예수님이 유언으로 남긴 성찬입니다제자들은 모여 성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신 이유를 생각하였습니다그들의 뇌리(腦裏)를 떠나지 않는 것은 내어준다.’ ‘쏟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모든 일을 좋게 하신 분이었습니다그러나 그분은 하느님에 대해 유대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생각하셨습니다예수님은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이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뿐 아니라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그것은 유대교 실세(實勢)들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예나 오늘이나 권력을 가진 자는 자기의 권위(權威)에 도전하는 자를 제거하면서 자기의 권위를 과시하려 합니다그것이 못난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입니다예수님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셨습니다 ◆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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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항상 자기 몸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에 다녔던 성당에 대한 기억은 엄청나게 컸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신부가 되어 가보니 너무나도 작은 성당이었습니다. 전교생 숫자가 5,000명이 넘었던 초등학교의 운동장은 어마아마하게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가 본 초등학교 운동장은 너무나도 좁았고 이런 곳에서 5,000명 넘는 학생들이 함께 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너무나도 넓다고 생각했던 도로는 지금 너무 좁아서 늘 길이 막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때는 어리고 작은 아이의 몸이었고, 지금은 훌쩍 커버린 어른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이의 몸에서 커버린 어른의 몸이 되자 전혀 다른 새로움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관점이 변하면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펴보게 됩니다. 관점의 변화가 자세히 보게 하고 이로써 새로움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지루하고 당연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또한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형편없다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나의 관점을 바꿀 때입니다. 어쩔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면서 새로운 삶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힘을 가져다 줄 것 같은 돈과 명예만을 쫓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를 통해서 얻으려는 쾌락에만 집중하려 하고, 이 쾌락에서 새로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오히려 더 큰 쾌락을 추구하면서 금세 실망하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러한 순간의 만족에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행복을 따를 수 있도록, 그래서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직접 내어주면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세상에 집중하기보다 주님께 집중하는 관점의 전환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런 점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요. 배고파하는 그들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지금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세상만을 바라보던 관점에서 주님만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큰 위로를 느끼면서 기쁨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아이리스 머독). 



다른 관점으로 산다는 것.

산수 문제 하나 내 보겠습니다.

‘28 X 7’을 종이에 적어서 계산하지 마시고, 암산을 해보십시오.

물론 곧바로 암산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구구단을 넘어가는 숫자가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저절로 눈을 위로 치켜뜨며 생각하게 됩니다. 눈 위로 문제의 답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우리 몸 자체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몸도 이렇게 다른 관점으로 보라고 계속해서 가리키는데,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해 다른 관점을 갖지 못하는 내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 볼 때입니다.

그 다른 관점이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며, 세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환하게 펼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의 의미

-전삼용신부-


 알렉산더 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매우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였습니다. 세상에 몇 안 되는 놈들이라고 했습니다. 한가할 때면 사냥을 즐겼던 대왕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그 사냥개들을 데리고 의기양양 첫 토끼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습니다. 달아나는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만 있었습니다. 대왕은 화가 나서 사냥개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대왕은 씩씩거리며 돌아와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를 불러 호통을 쳤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쓸모없는 개들을 내게 왜 선물했는가! 그 밥만 축내는 개들은 내가 모두 죽여 버렸네.”

      친구는 대왕의 말에 크게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대왕이시여,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받은 무척 귀한 개들입니다.”

      친구의 말을 듣던 알렉산더 대왕의 얼굴은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굳어져버렸습니다.

 

      선물은 유용성이 있어야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선물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것으로 사람의 영혼을 잡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 알렉산더 대왕처럼 선물을 가치를 몰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대부분은 우리가 호랑이와 사자를 잡는 선물이 되어야 하는 데도 토끼밖에 잡을 수 없는 선물밖에 드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성당에 봉사자들이 많이 있지만 어떤 봉사자들은 수천 명의 신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하는가하면 어떤 봉사자들은 자리만 지키고 있는 듯한 봉사만 합니다. 그 차이는 물론 그분들을 옳게 사용하지 못하는 성직자들의 부족함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을 봉헌할 때 어떤 사람은 온전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부족한 모습으로 봉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나옵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인간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온전한 봉헌을 가지고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숫자 다섯은 성경에서 그리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다만 물고기 숫자 둘이 합쳐지면 그것이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됩니다. 이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우리 자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잡은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나 되기 때문입니다. 열둘은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교회입니다.


      다섯은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 자신을 뜻합니다. 창세기 다섯 째 날 하느님은 하늘과 물속의 온갖 동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과 물고기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길들여질 수 없는 자아의 본성, 육체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섯을 오감, 즉 육체적 본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본성에 사로잡힌 제물일 때 그것들로는 새 백성을 창조할 도구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 다섯 임금이 동맹을 맺고 시띰 골짜기 곧 ‘소금 바다’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소돔에 살고 있던 롯을 잡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삼백십팔 명을 불러 모아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함께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까지 도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마중 나오는 살렘 임금 멜키체덱에게 십분의 일을 봉헌합니다. 육체적 욕망을 이겼을 때 온전한 봉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육체적 욕망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성자와 성령입니다. 하느님은 소돔 땅에 있는 롯을 구해오라고 두 천사로 상징되는 성부와 성자를 보내십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성령을 받고 153마리나 되는 인간을 잡는 어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에 말씀과 진리가 함께 봉헌되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카인과 아벨은 그들이 바치는 제물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바쳤고 아벨은 가축을 바쳤습니다. 땅의 소출은 그저 숫자 다섯(5)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소출은 양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까지 더해 바쳤습니다. 두 가지 조건이 더 충족된 것입니다. 맏배는 신약으로 따지자면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 있고, 굳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 두 가지가 더해져 함께 바쳐질 때 하느님께서는 그 제물을 즐겨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님께 드리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의 제물이 되었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물고기 두 마리가 나에게서 하시는 드러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한 중년의 남자가 미용실에서 드라이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부인 테레사는 몇 년 전 뇌졸중에 걸려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테레사는 얼마 전, 한 미용실에서 머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녀의 머리가 미용실에서 봤을 때처럼 예뻐 보이지 않았습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테레사는 직접 머리를 할 수 없었고, 자신의 몸에 실망했습니다. 앤드류는 테레사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부인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부인의 머리를 예쁘게 하려고 드라이하는 법을 익히기로 한 것입니다.


      부인이 머리를 했던 미용실로 다시 찾아가 스탭에게 드라이 하는 법을 직접 배웁니다. 결혼생활 45년 만에 앤드류는 처음으로 부인에게 처음으로 머리를 해 줍니다.

      “제 부인 테레사는 뇌졸중에 걸렸습니다. 제가 일하러 밖에 있을 때 테레사는 우리 가족을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했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죠. 연인 관계를 위해서는 두 사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출처: ‘할아버지가 왜 여자 머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걸까?’,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뭐가 필요한지 아셨습니다. 이것은 관심입니다. 그 관심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한 기술을 익힙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말씀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좋은 제물이라면 먼저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필 것이고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있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카나의 혼인잔치 때 혼인잔치에 참석한 이들이 필요한 것을 먼저 눈치 채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로 달려가셨습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성령과 말씀을 포함한 주님께 드리는 가장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성모님을 통해 지상 교회에 포도주라는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그렇게 열두 광주리인 교회가 충만한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우리 안에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우리는 교회에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성령은 관심이고 예수님은 그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성령과 예수님은 이웃을 향해 나에게서 솟아나 이웃에 대한 관심과 이웃을 채워주기 위한 노력이 솟아나게 만듭니다.


      빵 다섯 개는 나 자신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나에게 오신 성령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을 봉헌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섯 만이 아니라 일곱을 봉헌해야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봉헌된 우리들을 즐겨 받으시고 세상을 배불리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열두지파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1991823일 사제서품을 받았고, 부족한 제가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28년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니 만 번 이상의 미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모든 미사가 거룩하고, 소중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미사가 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던 시나이산에서 드렸던 미사가 기억납니다. 새벽 2시에 시나이산을 올랐고, 붉게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면서 함께 갔던 순례자들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십계명이 삶의 지침이었다면, 그날 받아 모셨던 주님의 성체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임종을 앞둔 형제님을 위해서 드렸던 미사가 기억납니다. 형제님은 성체를 모시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수녀님께 부탁해서 형제님을 위한 미사를 봉헌했고, 성혈을 영해 드렸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 받아 모신 성혈은 형제님에게는 큰 은총이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그날의 은총을 생각하며 지상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수도원 미사를 봉헌하면서 제의 방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의 사제여! 처음 드리는 미사처럼, 마지막으로 드리는 미사처럼, 유일한 미사처럼 미사를 봉헌하십시오. (Priest of Jesus Christ! Say every Mass, as if it were your first Mass, as if it were your last Mass, as if it were your only Mass! )”

 

성전에서, 성지에서, 가정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지만, 또 다른 곳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거리의 미사입니다. 용산 참사의 현장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거리의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강정 마을의 평화를 위한 미사가 거리에서 봉헌되었습니다. 세월호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거리의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격식과 전례의 분위기는 다를지라도,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지친 이들의 위로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절망 중인 이들에게 희망이 되셨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교인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교회가 없어서 대학교의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인들이 늘어나서 대학교의 강당에서는 더는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는 교회를 신축하기 위해서 200억을 모금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기 위해서 200억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늘어난 신자들은 4곳의 교회로 나누었고, 다른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기 위해서 마련한 200억 원을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탈북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베트남, 러시아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공장을 세웠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의 공동체는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알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그대로 이웃들의 발을 씻겨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광야에서 지치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배부르게 하는 만나보다는 영혼을 살리는 성체와 성혈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해집니다.

 

어릴 때, 물을 퍼 올리던 펌프가 생각납니다. 펌프에는 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부어주고 펌프질을 하면 수백 수천 배의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어린 저에게는 참으로 큰 체험이었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이지만 기꺼이 내어주니, 모든 사람이 마시고도 남는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마중물이 되시어 수많은 신자의 가슴에 용기와 생기를 주고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축복을 받았으면 나누시기 바랍니다. 엄청난 은총이 되돌아올 것입니다. 바다의 물이 마른 적이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모두 아낌없이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양승국신부-

 

성체 성혈 대축일을 준비하며, 우리 교회는 성체성사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도 중요하겠습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크게 강조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선교 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존경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001년 봉헌생활의 날을 맞아, 모든 사제, 수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개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과 사도적 활동의 원천이자 정점으로서 우리가 매일 기념하고 경배하는 성찬례 안에서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을 만나고 관상하십시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성체성사와 선교, 그리고 일상 안에서의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연결시키셨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 식탁에 나아가면 선교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적 노력은 그리스도인 삶의 성찬적 모습의 한 부분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25차 세계 총회 문헌에서는 매일의 무미건조하고 밋밋한 성체성사를 탈피하라고 강조합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기쁨, 창의성, 열정으로 거행하십시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참여하다보니, 어느 정도 습관화되고, 타성에 빠지게 되는 성체성사야말로 정녕 은혜로운 성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성이 영원한 신성에 참여하는 길이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이 하느님성, 그리스도성, 신성, 영원성에 완전히 참여하고 일치할 수 있는 성사, 그래서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맛보는 성사, 우리를 영원히 살게하는 축복의 성사가 바로 성체성사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체성사는 우리 인간 각자의 영혼 성장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건네시는 종합선물세트입니다. 왜 종합선물세트인가 한번 짚어볼까요?

 

성체성사 시작 부분의 참회 예절은 우리의 발걸음을 한없이 자비하시고 따뜻하신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의 전례에서는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오시며, 세파에 지친 우리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건네심으로 충만한 위로와 격려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의 파스카 신비가 재현되는 성찬의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한 부분 한 부분 그 무엇 하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소중한 성체성사이기에, 우리가 조금만 더 잘 준비한다면, 조금만 더 정성을 기울인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 역사상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강론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체성사가 시작되기 전 천사들은 우리를 위한 청원기도를 하려고 기다립니다. 바로 이때가 천상의 은총을 얻기에 가장 좋고 유리한 시간임을 천사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의 성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성체성사를 기쁨과 연결시킵니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체성사를 봉헌하십시오. 성체성사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선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요셉 과드리오 신부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그대가 매일 미사 경본을 덮을 때마다 그대의 미사는 다시 한 번 그대의 생활 안에서 새롭게 시작됨을 기억하십시오.”

  

성체성사가 단순히 전례행위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겠지요. 성체성사의 정신, 영성, 교훈이 하루 온 종일 우리 삶 가운데 자주 기억되고 반복되도록 노력하라는 부탁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했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성체성사의 핵심정신인 희생과 자기증여로, 선교에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가난한 이웃들에게로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로 우리를 파견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성체성사를 거행했다면 우리는 편안하게 지낼 수가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중요한 요소인 화해와 용서에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포기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촉구합니다. 결국 우리를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영성체를 했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지연이나 학연, 빈부격차, 인종이나 국가 등등의 모든 장벽을 허물어뜨리게 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세상 끝으로, 분쟁지역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반영억신부-

 

요한이라는 이름은“불쌍히 여기신다, 자비를 베푸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 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이름은 ‘예수’곧‘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라는 이름과 함께 쓰여야 문장이 완성됩니다. 즉“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신다!”라는 뜻이 될 때 그분의 뜻을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앞세웠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나는 목소리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사막의 목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신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낸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사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목소리가 되어 용감하게 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곧 자기 신랑에게서 빛을 받으며 그분이 커지도록 작아져야 하는 신비의 교회입니다...요한은 우리를 위해, 교회를 위해 언제나 말씀에 봉사하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취하지 않는 교회의 모델입니다.”우리도 요한처럼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하느님의 뜻에 의심을 품어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겪고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을 속 깊이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더 커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할 거야.

말이 많아서 도움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들어 볼래?(이규경) **


-조욱현신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해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 즉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생명을 주는 빵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계신다.”(S.Th., III, q. 65, a.1 ad 1) 즉 성체성사는 선교활동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종합일 뿐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근원적인 힘이요, 또한 표현 양식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2독서: 1코린 11,23-26: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너희를 위하여즉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는 의미의 표현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현존의 신비를 이루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의 신비,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시키는 것이다. ‘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두 번씩이나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24.25)는 예수님의 명령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순간 행하신 것을 그분이 부여하시는 의미와 더불어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이 반복해서 행해야 한다는 그분의 원의를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행위를 반복해서 되풀이 하는 일이 단순히 회상하는 행위정도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기념(anamnesis)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성체성사적 행위를 그분이 부여하셨던 충만한 의미와 더불어 현재에 재생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식탁을 주관하고 말씀을 반복하시는 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제사를 거행하는 사제는 다만 그분의 투영에 불과하다 하겠다.

 

파스카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십자가의 봉헌과 부활로 이루어진 시기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그 먼 과거가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26) 여기서 전하다는 말의 시제가 현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체성사의 거행은 충만한 사랑으로 역사 전체를 뒤덮는 죽음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사는 사랑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죽기까지 온전히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성체성사가 이렇게 거행되지 못하고 우리에게서 먼 이야기로 되고 만다면 그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에 불과하고, 새롭고 신선한 분위기를 창조해주는 기념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고, ‘기억인 동시에 예언이다. 즉 성체성사는 사랑의 마지막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랑의 마지막 표현은 오로지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차 충만함 속에서 다시 임하게 될 하느님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마르 14,2 참조)를 마시게 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복음: 루카 9,11-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은 성체성사에 대한 직접적인 의미는 없다. 그러나 복음사가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행하실 바로 그 행동들을 그분께 돌려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16)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통해 마련하신 음식을 사도들로 하여금 군중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오늘날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람들, 사제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이다. 우리 가운데서 성체성사를 재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말씀뿐이다. 여기서 사도들의 행위는 외적행위 뿐 아니라, 자신도 성체가 되어야 하는 의미가 있다.

 

만일 성체성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기념이라고 한다면 그 성체성사의 거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연 어느 정도로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베풀어 주신 무상적이고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생활한 것이 못되는 기념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성체성사가 오직 우리의 존재 그대로의 봉사와 참여와 형제애가 봉헌될 때에만 참되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렇게 할 때만이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왕국의 결정적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그분의 죽음에 대한 참된 기념선포가 될 것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이렇게 지내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바치신 그 사랑의 행위가 지금의 나를 통하여 계속 선포되고 전해질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사랑과 나눔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이다.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을 때에 우리 자신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나를 봉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를 구체적으로 살아가며 그 신비를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 9, 17)

모든 삶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삶을 향합니다.

무조건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을 언제나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사랑은 공허한
말잔치가 아니라
살과 피 전부를
내어주는 놀라운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는
내어주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생명의 기쁨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일치와 감사로
드러납니다.

일치와 감사를 통해
우리존재의 소중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삶을 변화시키시는
성체와 성혈 안에
삶의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봉헌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듯

우리를 사랑의
존재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빛이 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살과 피가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임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우리의
일상안에서 행합시다.

행하는
생명의 잔치가
가장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오상선신부-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온 군중들에게 "말씀"도 주시고 "치유"도 해주시며 돌보시다가 어느덧 날이 저뭅니다. 이제 군중에게 육신의 양식도 절실해질 만한 시간이 된 것입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루카 9,12)
놀랍게도 제자들이 군중의 필요를 알아채네요. 그리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그 말투가 정보 전달이나 청원의 성격보다 어째 명령에 가깝게 들립니다. 흔히 사람은 은총을 통해 영의 세계를 접촉하고 맛보기 전까지는 직관이나 영감, 믿음보다 데이터와 논리, 합리성에 더 의존하기 마련이고, 타인에게도 그걸 당당히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경험한 세계까지는 그것이 우위를 차지하니 그게 전부라 여기는 겁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예수님의 말씀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담백합니다. 제자들의 형편과 현실적 사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던지시는 이 말씀은,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저희에게는 ...밖에 없습니다."(루카 9,13)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정해 주시고 발휘하도록 틈을 내어주시는데 반해, 제자들은 이성적으로 자기들의 한계를 파악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묶어둡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인간의 "최대치"를 바라보시는 반면, 인간의 시선은 자기들의 "최소치"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제자들이 "...밖에"라고 지칭한 보잘것없는 소량의 음식을 가지고 예수님은 그것들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풍부한 봉헌물이라도 되는 듯 정성을 다해 하느님께 바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지요.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국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게 된 것입니다.

빵과 물고기의 양이 늘어난 이 기적이 예수님의 기도 중에 일어났는지, 제자들이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 9,17)는 말씀으로 그들과 함께 영육의 풍요와 기쁨, 기대감과 희망을 누릴 뿐입니다.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경계를 넘어서면 숫자든 수치든 타이밍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제1독서는 살렘의 임금 멜키체덱이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빵과 포도주로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창세 14,18)가 마련한 빵과 포도주는 세상을 구원하신, 영원한 사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미리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 아브람이 멜키체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은 십일조 전통의 시초가 됩니다. 이는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레위 27,30)라는 계명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러면 너희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는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9)라는 규정에 잘 나타나 있듯 "나눔"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마지막 만찬의 장면이 사도 바오로의 입으로 전해집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1코린 11,24)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1코린 11,25)
예수님이 당신 몸을 베어내고 헐어내고 쪼개어 내주시는 살과 피는 오로지 "너희를 위한", 즉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사랑, 사랑, 흔히 말들은 많이 하지만 이처럼 어마어마한 사랑을 흉내낼 수 있는 은총은 (아쉽게도, 다행스럽게도) 아무에게나 주어지진 않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나눔의 보람과 기쁨이 넘실대니 더 이상 이 현장은 제자들이 말했듯 "황량한 곳"(루카 9,12)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주시기보다 제자들의 손을 통해 나누어 주신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무언가를 나눌 수 있도록, 줄 수 있도록 마련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인간에게는 순명하는 분배자의 역할이 맡겨졌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손에 쥐어 주시는 모든 것에는 이처럼 당신의 뜻에 따라 나누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물리적으로 살과 피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와 내 가족이 독식하여 우리의 살과 피가 될 것을 나누어 그것이 필요한 이웃의 살과 피가 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실상 나눔은 죽음의 경험입니다. 물리적으로 나와 내 식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려는 욕구의 중단이고 내 생명에 더해질 양분의 포기이기에 일차적으로 볼 때 죽음의 체험이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의 인연에서 죽음을 고한 그 양식과 재화가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나누어지고 베풀어질 때 그에게 새로운 생명이 됩니다. 나의 죽음이 타인에게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대부분의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명을 내놓으라는 요구 앞에 서지는 않지만, 예수님처럼 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손에 쥐어주신 모든 것을 나와 내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 이웃을 위해 나눌 때, 그 유대와 연대의 연결 고리를 통해 생명이 이어집니다. 실제로 목숨을 바쳐 생명을 주신 예수님보다, 열 달을 품어 생명을 주는 여느 엄마들보다, 훨씬 쉽고 덜 고통스러우면서도 보람과 기쁨은 그에 못지 않은 생명의 나눔이 오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를 재촉합니다.

아무리 작은 나눔이라도 그 안에는 죽음과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나누고 축복하는 우리는 모두 멜키체덱과 같은, 예수님과 같은 사제입니다. 이 사제직에 참여하는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
-김찬선신부-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고사가 아닌 한 모든 죽음은 결국 먹지 못해 죽는 거라고 합니다.
암 때문에 죽는 것 맞지만 암이 있어도 먹을 수 있는 한 죽지 않고,
암으로 인해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 죽는 거랍니다.

인간은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는 것과 사랑을 먹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우리 삶에 더 필요하고 중요합니까?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하는 사람이 꽤 있는데 그렇게 말해도 됩니까?
그것은 정말 무식한 사람의 입에서나 나오는 막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앞에서 정말로 사랑은 사치입니다.
일단 살아있어야 사랑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묘하게도 자살의 경우는 반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배가 아무리 불러도 살 의지가 없어집니다.
배고프다고 자살하는 사람은 없지만 사랑이 고픈 사람은 자살을 합니다.
배고프면 생명의지가 오히려 강렬해지는데 반해
사랑이 고프면 삶의 의미를 잃게 되면서 생명의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먹는 것이 훨씬 풍요로운 지금과 비교하여 옛날 그렇게 먹을 것이 없어도
지금보다 자살하는 사람이 없었고 풀뿌리를 캐 먹고서라도 살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그때 저의 친척 중에 연애결혼을 하려고 했지만 부모가 허락지 않자
같이 자살을 한 일이 있었는데 배고파도 사는데 사랑 때문에 죽다니
저로서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사랑으로 사는 것이며
주님 말씀대로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의 빵이시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주님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바로 이것이고
오늘 성체와 성혈의 축일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 많다거나
우리를 사랑을 하신다는 그런 뜻 이상으로 사랑 자체시라는 말씀이지요.

하느님만이 나는 사랑이라고 하실 수 있고
우리 인간은 내가 곧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랑을 조금 가지고 있어 그 사랑을 조금 줄 수도 못 줄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존재가 사랑이기에 사랑에 결핍이 없고 전부를 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 전부를 주신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체와 성혈이 바로 당신 전부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체와 성혈은 당신 자신 전부를 사랑으로 주시는 표시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속이요 재현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영원히 현재한다는 표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부모가 돌아가셔도 부모가 남긴 것 곧 유품을 가지고 부모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기억과 추억만으로도 힘이 들 때 살아갈 힘을 얻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품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성사적으로
주시어 우리가 성사 안에서 그 사랑을 기억하고 재현하게 하셨지요.

그런데 부모가 유품을 남겨도 사랑만큼 유품이 각 사람에게 사랑이 되지요.
부모의 정이 없는 자식은 돌아가시는 즉시 유품을 다 태울 것이고,
부모를 더 사랑하는 자식이 유품도 잘 간직하고 부모의 사랑이 재생되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랑을 살과 피의 성사로 우리에게 남기셨어도
그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그 사랑이 성사가 되고 기억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양식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양식, 마음의 양식, 영혼의 양식.

그리고 육신의 양식을 얻으려고 애써 일하고
마음의 양식을 얻으려고 독서를 한다든지 애를 쓰며
영혼의 양식을 얻기 위해 명상을 하느니 정신수양을 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이런 노력을 하는데 우리 신앙인들에게 양식은,
그것도 지금은 물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성체와 성혈이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며 다시 한 번 명심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5월 29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